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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2. 2021

길을 잃다

백엔의 사랑, 낮잠형 인간, 세친구


백화점 2층을 지나가다 매장 앞에 줄을 선 이들을 보았다. 불경기에도 인파에 시달리는 가게들이라니. 럭셔리 매장들이다. 줄을 서 있다가 입장 허가가 나야 들어간다. 소유는 환상을 꿈꾸게 한다. 돈은 어떤 행복을 보장해 주는 문이구나.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출입구.

일본 영화 ‘백 엔의 사랑’(2014)이 떠오른다. 32세 이치코라는 백수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부모에게 매달려 사는 존재다. 캥거루 족 혹은 패러사이트 싱글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이치코는 하는 일 없이 게임이나 하다가 밤에는 백 엔짜리 야식을 먹는다. 그래도 자신을 패배자로 여길 만큼 속으로는 곪았다. 그녀는 동생과 대판 싸운 후 가출한다.

이치코는 별안간 성인의 생활로 뛰어든다. 느닷없이 직업을 얻어야 하고 또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 연명해야 한다. 그녀가 얻은 직업은 백 엔 가게 야간 아르바이트이다. 손님들도 값싼 물건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치코는 늘 바나나를 사는 복서를 알게 된다. ‘열심히 사는 게 끔찍하다’는 남자다.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라고 하던가. 교육도 받지 않고 취업도 하지 않는 이들이다. 중국에서는 996(오전9시~오후9까지 6일) 근무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탕핑이나 콩이지라는  나왔다. '탕핑족'(躺平族) 욕망을 포기하는 이들이다. 콩이지는 루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꽤 배웠으나 취업을 못해 잡일, 구걸로 전전하다 맞아죽은 사람이다. 임시직, 수습직, 인턴, 비정규직, 파견직 등 더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의 암울한 슬픔이 느껴진다. 이들은 질게 뻔해서 경쟁에 나서지 않는다. 진다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재확인만 하게 되겠지. 그래서 멈춘 채, 현상만 유지한다.

그들의 사랑도 백 엔어치 정도에 머문다. 앞으로 나아가는 건 두렵다. 더 가면 돈이 들고 감정도 소모된다. 미래가 출렁거리는 건 너무 힘겹다. 그러니 백 엔만큼만 쓴다. 다음 날이면 후회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백 엔만큼만. 그래서 두 남녀는 약속하지 않는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것이 백 엔의 사랑이다. 밥 먹는 시간만큼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거지 그 이상은 어렵다.

프랑스 작가 로맹 모네리의 ‘낮잠형 인간’에도 비슷한 유형이 나온다. 주인공은 마치 프랑스와즈 사강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떠올리게 하는데 단지 파괴가 아닌 정체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는 ‘삶의 구경꾼’으로 살면서 ‘성장하지 않기’를 원한다. 학교를 졸업했으나 앞으로의 계획/일정/목표가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오만으로 감추고 불행은 환경 탓으로 돌린다. 방향을 상실했기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스스로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커다란 공허가 가슴을 채우고 있다. 달력도 의미가 없다.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과 같겠지. 할 일도, 생각할 거리도 없다 보니 늘 잠을 진다. 밤에는 밤잠을, 낮에는 낮잠을.

그랬던 주인공이 ‘어른’이 되기로 한다. 온 힘을 다해 일하고 현재만을 사랑하려 한다. 돈/사랑/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이고 싶다. 생각을 멈추고 집중하다 보니 어느 순간 최고의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듯 여자 친구가 쏘아붙인다.

“무슨 허물 벗듯 너 자신을 바꿔 버리잖아. 어제는 게으름뱅이더니 오늘은 판매 왕이 되었어. 무시무시해. 넌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어. 조금도 특별할 게 없구나. 넌 속이 텅 빈 사람이었어. 넌 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주인공은 자기 인생에서 '무언가'를 원했다. 텅 빈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그는 ‘무언가’를 얻는 일을 체념한다. 아마 그 후로는 남들과 비슷하게 살지 않을까?

나 이외의 남들은 무언가 지시하는 손을 따라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 타인들도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익사 직전인 경우가 많다. 한 때 반항하고 격렬히 고뇌하는 사람들도 삶과 타협해 그럭저럭 오늘을 사는 건데 말이다.

누구든 낮잠형 인간인 때가 있지 않을까? 나도 위의 주인공들처럼 무기력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내 현실과 앞날을 암울하게 느꼈다. 무거운 책임감도 없던 시절, 그 ‘무언가’를 찾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적당하게 구는 자에게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몽롱하게 있다 보면 낮이고 밤이고 잠만 온다. 이불속에서 하루 중 반나절을 보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때는 20여 시간을 누워있던 적도 있었다. 너무 많이 자면 죽을 수도 있다는데 맞는 말이다. 우습게도 자면 잘 수록 피곤하고 어지러웠다. 낮을 밤 삼아 살다 며칠 만에 보는 햇빛이 낯설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1996)에 울컥했다. 영화는 당시 거품 경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무소속, 섬세, 삼겹의 심란한 청춘을 들춘다. 이름이 말해주듯 무소속은 아웃사이더이다. 만화가가 되고 싶지만 그다지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터에서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곤 한다. 군에서도 의가사 제대한다. 그는 머물 곳이 없다. 섬세는 섬세한 남자다. 부모의 기대와 달리 미용사가 되고 싶지만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게이의 표적이 되어 성폭행을 당한 후로는 스스로를 가두어버린다. 삼겹은 대단한 먹보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비디오 보다가 또 먹는 게 그의 일과. 그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다. 세 친구는 소위 ‘루저’다. 흙수저나 변두리 인생 등으로 자신을 규정한 적이 있는 이들에게는 영화의 세 남자가 자신의 분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치코가 현실을 살게 된 건 복싱 때문이다. 복싱에 몰입한다는 건 살아있음을 몸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투지, 이겨보고 싶다는 의욕도 덤으로 따라왔다. 때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야 한다. 들리는 것도 부족해 억지로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기도 한다. 이치코처럼 그중 어떤 감각에라도 집중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일/사랑/가족/인정 욕구 등은 우리를 집중하게 하는 큰 힘이다. '텅 빈 사람'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럭셔리 매장에 줄을 선 사람들을 생각한다. 애정이나 인정을 구매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겠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애정결핍에 시달린다고 한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편리할 텐데. 흠, 돈이 많은 걸 해결해 주는 건 맞다. 그렇다고 만병통치 약도 아니다. 상황마다 다를 테니까. 사람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들, 의식을 황폐하게 하고 의욕을 좌절시키는 것들은 의외로 다양하다. 삶에 그런 장애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방향감 찾기, 각자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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