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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3. 2021

나 안의 '나'들

도플갱어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 정현종 역)

사람들은 늘 살아보지 못한 삶을 그리워한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Robert Frost는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1916)이라는 시를 남겨 회한을 상기시킨다. 내가 가지 않은 그 길을 계속 가는 ‘다른 나’가 있다면 어떨까? 어린 시절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브라질 영화 ‘인비저블 라이프 The Invisible Life of Euridice Gusmao’(2019)는 여성영화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자아를 탐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1950년대 초반의 브라질,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언니는 귀다, 동생은 에우리디스. 자매는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 비밀도 없다. 그들의 아버지는 집안의 신이나 다름없다. 그는 딸들을 자기 입맛에 맞게 키워 결혼시킬 궁리만 한다. 그런 아버지가 분노하고 절망할 일이 벌어졌으니 가출한 귀다가 산달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귀다와 의절하면서 두 자매의 영원한 이별이 시작되었다.

자매는 한 사람의 양면이다. 귀다는 자기가 선택한 남자를 사랑했고 또 단호하게 끝냈다. 여성과의 우정, 연대로 가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했다. 그녀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에우리디스는 타인의 기대에 순응했으나 내면으로는 불안, 공허에 시달린다. 그녀는 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이상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잃어버린 자아, 진짜 자신. 영화는 페미니즘의 틀을 입고 있지만 실상은 세상과의 부조화로 자기 분열에 이른 한 인간의 내면을 그린다. 겉으로는 에우리디스이지만 속으로는 귀다인 경우가 이들뿐이랴.

도플갱어 doppelgänger는 자기 분신을 뜻하는 독일어이다.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욕망이 사람의 탈을 쓰고 대신 돌아다닌다. 만일 자기 복제물인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면 원본은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어쩌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에 빠진 이들이 비몽사몽 하는 사이에 유체 이탈을 겪는 건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2002)는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을 꼭 닮은 남자는 만나기 직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고전 소설 ‘옹고집전’도 이와 비슷하게 전개된다. 지푸라기로 만든 가짜가 진짜를 내쫓는다는 이야기다. 가짜는 옹고집이 개과천선을 한 후에야 허수아비로 돌아간다. 둘은 만나서는 안될 운명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 프로타고니스트와 적대자 안타고니스트가 일치되면을 자주 발견한. 둘 모두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는 두 사람을 대립시켜 변증법적 성장 혹은 파멸을 가져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 나름의 논리적 귀결이다. 한 사람의 내부에는 무수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그 캐릭터들을 제어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내면의 갈등을 겪나 보다. 가려는 길을 모두 갈 수는 없다. 몸이 하나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못 간 길에 미련을 가지곤 한다. 또 다른 자아가 대신 갈 수도 있는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억울하지도 서운하지도 않을 텐데.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1869)에는 미슈킨 백작과 로고진이라는 대조적인 한 쌍이 등장한다. 미슈킨은 한없이 베풀려는 사람이다. 순수 사랑의 증거와도 같다. 그는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내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여자도 사랑해야 하고 저 여자에게도 청혼해야 한다. 다들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로고진은 한 여자만을 미친 듯이 소유하고 독점하려 한다. 무소유와 탐욕이라는 두 화신이 만나고 부딪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극단적인 두 인물 사이에 한 여자를 끼워 넣음으로써 사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걸 암시한다. 결국 로고진은 살인범이, 미슈킨은 백치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답게 두 주인공의 파멸을 택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면에는 양립 불가능하고 타협 불가한 자아들이 난립하고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SF소설에는 평행우주 이론에 걸맞도록 다차원을 사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윤이형의 단편 ‘완전한 항해’(2011)에 나오는 창연이라는 인물은 완벽한 자아를 갖고 싶다. 그녀는 외모, 취향, 젊음, 신분 상승을 위해 49개나 되는 다른 시스템의 자아들을 자신에게 통합시켰다. 장점만 있는 인물, 최고의 나. 그러나 ‘완전’에는 역부족하다. 하나 남은 그것. 5.6mm에 불과한 창이라는 인물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하루살이처럼 작은 창에게는 자신만의 꿈이 있다. 그건 창연과의 튜닝으로는 보상받을 수 없다. 보잘것없고 불완전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목표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창의 이상이다. 창연과 창은 같은 인물의 다른 버전이다. 세속적인 나와 숭고한 나의 대결은 인간 내부의 영원한 갈등이다.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현재의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한 다른 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90년대의 하루끼는 차원 이동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로맨스를 부활시켰다. 완전한 구조를 꿈꾸었던 근대는 무수한 생채기만 남기고 좌절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벗어난 다른 세계를 꿈꾼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층과 층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우물 깊숙이, 혹은 고속도로 어딘가 지하 공간으로 사라진다. ‘이곳’과 다른 ‘그곳’은 이곳에서는 멈춘 것들이 움직이며 변화하길 기다린다. 인물들이 ‘그곳’으로 들어갈 때 시/공은 활기를 얻는다. ‘이곳’에서의 삶에 피로하고 지친 영혼들은 ‘그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도플갱어 스토리, 다중우주가 등장하는 SF소설 등은 ‘로맨틱’하다. 등장인물들은 현재의 나보다는 나은 자아를 찾으려는 갈망을 지녔으나 패배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고전적 이상을 지닌 작가라면 갈등을 이겨내는 성장이나 조화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개체 시대로 접어들었다. 로맨스는 부조리한 세계를 사는 개인의 투쟁에 관심이 많다.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897)는 실존인물이었던 베르주라크(1653~1662)의 연애담을 가공한 것이다. 베르주라크는 자신의 외모를 비관한 나머지 록산느에게 구애하지 못한다. 그는 록산느를 사랑하는 미남 크리스티앙을 대필해 주는 척하며 구구절절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두 남자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다른 쪽에게서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완전한 자아로의 결합은 불가능하다. 크리스티앙이 베르주라크의 진심을 눈치채는 순간 죽는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베르주라크가 불행하지만 특별한 희곡의 주인공으로 거듭난 것은 그의 유별난 낭만성 덕분이다. 이 인물은 자유분방과 반항의 상징으로 프랑스 사회에서 오래도록 악명을 얻었던 것 같다. 17세기는 유물론이나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인물이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리라. 만일 베르주라크가 열등감이나 자괴감을 심하게 격지 않은 인물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개인은 평온했겠지만 세상은 격렬한 내적 갈등을 증거 한 인물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SF라 할만한 ‘달나라 여행기’(1657)와 ‘해 나라 여행기’(1662)도 출간해 자신의 실패를 강요하는 세상의 모순을 비웃을 수 있었다. 그는 성격 탓에 적이 많아 요절했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을 글로 써서 영원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럴까, 저럴까 우왕좌왕한 적이 많았다. 그때 그대로 직진했더라면 그런 일을 안 당했지. 그때 우회로를 택했더라면 이런 일을 만났을 텐데. 지나간 일이다. 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다. 다중우주가 있건 없건, 평행우주론이 맞건 그르건 상관하지 않는다. 다른 자아들은 자기 시공간에서 잘 살면 된다. 난 여기서 부족한 대로 꾸역꾸역 살면 되고. 서로 만나지 말자. 만나면 죽는다고 하니.

산길을 갈 때 프로스트와 달리 주로 익숙한 길을 가곤 한다. 가지 않은 저쪽 길은 다음에 가보리라 남겨 둔다. 두 갈래 길 앞에서 다음에 가자며 아는 쪽으로 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쉬운 길을 가려고 할 것이다. 익숙하고 친밀한 게 좋은 거라고 위안하기도 한다. 궁리할 필요도 없이 편하기 때문이다. 도플갱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삶, 행복한지 자문해본다. 하루하루 익숙하게 산다고 해서 원숙한 삶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처럼 머릿속에는 해와 달을 넣고 산다. 그것만은 나와 또 다른 ‘나들’의 공유점으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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