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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4. 2021

기억과 망각

파묻힌 거인, 부서진 사월


‘과잉기억 증후군’이라는 것도 있나보다. 보통 전두엽 우측에 기억을 저장하는데 이런 증후군을 가진 이들은 좌우 전두엽 양쪽에 저장한다. 이들은 십 년 전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옷차림, 기온, 사건과 같은 사실 정보만이 아니고 경험한 순간에 느꼈던 기쁨, 슬픔, 외로움 같은 감정도 온전하게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과잉’이라는 말이 붙었을까. 필요 없는 것까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상기하자 6∙25’, ‘온 가족 대중교통 IMF 이기는 길’, ‘월드컵은 16강 보훈은 세계 최강‘ 이런 표어가 여태껏 기억나는 것 보면 학교나 사회에서 어떤 사건을 암시하고 집단 기억을 유지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던 것 같다. 나치나 파시스트들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국가도 특정 이념을 위한 국민교육에 안간힘을 기울인다.

집단 기억은 한 국가나 민족의 과거에서 고난 극복이라는 경험을 끄집어내 정당성을 부여하고 미래를 기약하게 한다. 역사는 오래도록 지배층이 설정하고 강화하는 이념, 의도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다면 왜곡 내지 실책이 된다.

이시구로 가즈오의 ‘파묻힌 거인 The Buried Giant’(2015)’은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다. 아침마다 자욱한 안개로 덮이는 마을이 있다. 안개는 과거를 잊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들의 비통함,  심지어 기쁨마저 몇 시간이 지나면 망각의 바다로 흘러간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런 곳에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떤 상황의 결과인지도 잊은 채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 하루를 맞는다.


사람들은 기억이 있어서 문화를 계승 전승하고 문명을 창출해왔다. 나를 나로서 인식하는 일도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람들이 치매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 병이 자아 정체성을 서서히 갉아먹는 데에 기인한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을 꿈꾸는가’를 읽다 보면 인조인간들을 동정하게 된다. 이들은 이식된 기억을 진짜라고 여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자신이 가짜 기억에 매달리는 기계일 뿐임을 자각하는 이도 있다. ‘불행한 기계’라니, 어불성설이다. 기억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거이다. 그런데 ‘파묻힌 거인’에서는 그 반대로 망각이 바로 사람을 살게 하는 힘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치욕, 절망, 증오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잊는다, 잊어야 살 수 있다.

이시구로는 영국 고대사에서 원주민 브리튼 족과 침략자 색슨족을 불러낸다. 그는 두 종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프리퀄로 깔아 두었다. 브리튼족은 아서왕의 지휘 하에 색슨족을 잔인하게 격퇴한다. 가해자이자 지배자가 된 브리튼족의 주술사는 잔혹한 과거가 기억되길 원치 않는다. 용이 내뿜는 숨결은 마법의 안개가 되어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두 부족은 강요된 망각 속에서 휴전과 평화를 맞게 된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브리튼족의 영광이었던 아서왕의 기사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사망했다. 이제 색슨족은 용을 죽이고 모두의 기억을 일깨우고자 한다. 증오에의 기억은 집단을 한마음으로 묶는다. 승자가 되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브리튼 족의 용사였다는 것, 사랑하는 아들도 어떤 연유로인지 죽었다는 것을 잊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는 자기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색슨족의 용사를 도와 용을 죽인다. 안개가 걷힌다. 그리고 나타난 진실. 그건 가혹하다. 자신은 끔찍한 전쟁광이고 아들은 아내의 외도 탓에 사망했다. 더구나 뚜렷한 기억을 갖게 된 브리튼 족과 색슨 족은 새삼 상대를 적으로 인식한다. 양쪽은 최후의 내전으로 돌입할 준비태세를 갖춘다. 두 부족 간에는 화해도 타협도 있을 수 없다. 한쪽이 다른 쪽을 섬멸한 후에야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역사가 환멸을 딛고 서 왔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망각에 잠기고 나면 평범한 이웃이지만 깨어나는 순간 저 사람과 나는 원수지간이 된다. '절대도, 영원도 없는 모순 그리고 오류'. 이런 자각으로는 역사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 상대를 향한 분노도 없고 동료들과 결집하는 힘도 없으며 목표도 없는 무기력한 세상이니. 대신 평온한 삶이 끝없이 이어진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스페인에서는 내전(1936~1939) 동안 수십 만 명이 죽었다 한다. 전쟁 후에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는 1975년까지 내전 관련 사형과 암살이 줄을 이었으니 그 희생자는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스페인 전쟁은 공화파 인민전선 정부를 향한 프랑코 측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코는 수구세력인 왕당파, 자본가, 군부를 등에 업고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이후 40여 년 스페인을 통치하다 82세에 사망했다.

프랑코의 죽음은 나라를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는 혈전으로 몰아넣지 않았을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치인들은 ‘타협에 의한 과거와의 단절’ 즉, ‘침묵 협약’으로 당분간 과거사를 덮었다고 한다. 과거 청산보다는 미래 지향을 택만 걸까. 집단기억상실을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점진적인 체제 변화가 나라를 연착륙시킬 거라고 믿고 싶었으리라. 

기억은 책임을 지게 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야만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된다. 더 잘할 수 있을까? 과거대로만 하지 않으면 된다. 과거에 잘못한 이는 단죄받아야 하고, 잘못된 것들은 바꾸어 놓아야 한다. 끊임없이 과거사에 대해 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오랜 논리이다. 그런데 ‘엄격한 처벌’, ‘철저한 단죄’ 그런 건 쉽지 않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올 게 뻔 하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2003)에서 이 문제로 딜레마에 빠졌음을 고백다. 기억은 윤리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이 보복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망각은 모든 것을 가볍게 하고 역사의식을 부재하게 다. 그런데도 망각은 삶을 삶답게 한다지 않나. 작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부서진 4월’(1978) 을 보자. 알바니아에서도 외진 어느 산골 마을에 두 집안이 있었다. 두 집안은 원수, 그 원한을 잊지 않는다. 이들은 명예 법 ‘카눈’에 의거, 복수는 꼭 해내야 한다. 가족 중 누군가는 스나이퍼가 되어 상대를 죽이고 그 후에는 자신 역시 표적이 된다. 아이들은 그것이 의무이자 운명이라고 배운다. 주인공 소년은 상대 집안의 남자를 죽인 후 한 달간 죽음의 유예기간을 갖는다. 그리고 4월, 상대의 총에 꽃처럼 떨어진다. 햇빛이 부서진다.


잊어야 하는 이유, 잊혀야 하는 이유. 생각할수록 내가 살고 우리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것. 그건 ‘망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망각’을 경계한다. 심지어 영원히 잊지 말자고까지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결국 ‘원수들’과 ‘나’ 두 개로 범주화될지도 모른다. 타인의 한점 과오 조차 소홀히 하지 않고 간직한다면 삶은 분노의 횃불로 타오르기 쉽다. 가족, 이웃, 사회, 국가 모든 공동체가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리바이아던이니까. 행복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선명한 어떤 곳. 분명한 곳. 눈처럼 희고 칠흙처럼 까만 곳. 이런 곳에서는 희끄무레하고 거무칙칙한 회색 톤이 인정받지 못한다. 회색분자는 이중인격자, 이중간첩, 정체성 없는 자, 소신 없는 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여기에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이따금 숨과 함께 강력한 마취제를 내뿜으어떻게 될까. 좀 전까지도 뭔가에 분노하고 싸우던 일을 잊어버리겠지. 사람들은 바보가 되겠지만 적어도 싸울 일, 슬플 일은 없다. 개운하지는 않은데 그리 나쁜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찾는 이유가 이런 거 아닐까. 그곳에서는 애초부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가당키나 할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 사람들은 덕성스러워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실 쉽지 않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인간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헉슬리의 ‘놀라운 신세계'(1932)에서는 대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평화를 구한다. 유사 마약 ‘소마’ 몇 알만 먹게 되면 근심, 걱정, 분노, 질투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무한한 행복감만이 주위를 감싼다.

망각은 어렵다. 소마 같은 것에 의지해야만 겨우 잊은 척할 수 있다. 기억하기는 쉽고 잊기는 어렵다. 소마 없이도 용서하고 화해한다면 그는 참 ‘성인聖人’이다. 그래서 잊는 건 고맙다. 인류는 자주 잊었기에 그럭저럭 살아온 것일 테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은둔형 외톨이나 대인기피증자, 분노조절 장애자 그리고 공황 장애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다 망각 덕분이다.

눈은 폭력을 바라보고 뇌에 아로새긴다. 우리 눈의 눈꺼풀은 본 것을 의심하게 하는 이중장치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으면 그 시간만큼 인식할 수 없는 ‘무’의 시간이 얻게 된다. 그 ‘무’가 더 큰 ‘안녕’을 약속하기도 한다. 명상의 효과란 것도 이런 거 아닐까 한다. 기억과 망각, 그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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