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림 Dec 05. 2021

메멘토 모리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1984)를 보면 전염병이 돌 때는 집단 매장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모차르트가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병에 걸렸던 사체는 모아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 산 자들에게 좀 더 안전하다. 카뮈의 '페스트 La Peste'(1947)에서도 유행병 초기와 후기의 매장 방식이 다르다. 초기 희생자들은 전통 관습대로 묻힌다. 사망자가 많아지자 두 개의 큰 구덩이를 파서 남/녀를 나누어 매장한다. 감당 못할 지경이 되자 남녀노소 구별 없이 나체 상태로 던져 매립한다. 최후 단계는 집단 화장이다. 그래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집단 학살을 당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조나탕 리텔의 ‘착한 여신들 Les Bienveillantes’(2006)은 무더기로 쌓아 올린, 꽁꽁 언 시체들을 장작더미 같다고 표현한다. 유명, 무명 인사가 한 덩어리로 처리된다. 


미국도 팬데믹으로 인한 사후처리에 있어서는 동물 매립이나 다르지 않다. 2020년 가을, 뉴욕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무연고자들을 하트섬으로 옮겼다. 멀리 맨해튼의 마천루가 보이는 섬의 한쪽에서 사자들이 허름한 나무관에 담겨 땅속으로 집단 매장되고 있었다. 그들은 산 자를 위해 조용히 사라진다.


한 브라질 영화의 묘지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 키보다 약간 높은 정도의 시멘트 구조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부유층은 단독으로 매장될 것이다. 영화 장면은 대도시 일반인들을 위한 공동묘지인 셈이다. 서랍형 건조물에는 5~6기 정도의 관이 층마다 들어차 있다. 빈 층에 관을 가로로 밀어 넣은 후, 빈 부분을 석고로 세밀하게 막으면 장례가 끝난다. 다시 열리는 일은 없다. 그다음 도착한 주검은 그 위층 서랍을 차지하고 눕는다. 우리와 달리 매장이 아니고 층층이 방식이 이채로웠다.


코로나 사태 초기, 사망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브라질 광경을 TV로 보았다. 카메라는 엄청난 규모의 사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한 겹 천에 감싸인 채 빈터에 쏟아진다. 그리고 거대한 구덩이로 사체들을 던지듯 묻는다. 어떤 이들은 트레일러형 대규모 서랍장 속에 안치되었다. 심지어 바닷가 모래 속에 매장되는 이들도 있었다.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 주검들은 옛 방식으로 누워있을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전염병 사태로 죽은 이들은 급하게 격리되어 땅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사체를 땅속에 온전한 형태로 묻었다. 전신을 썩기 쉬운 삼베, 마 종류의 식물성 로 꼭꼭 묶어 나무관 속에 넣고 땅속에 묻는다.


최근에는 사회 분위기가 화장을 권한다. 사람들도 따르려 한다. 사람들 살 곳도, 생산활동을 할 곳도 부족한 판에 무덤만 늘어나서는 안 되겠지. 미관으로도, 정서에도 좋을 건 없다 한다. 보기 싫은 건 최소화하는 게 상책이라는 듯.


무덤의 최소화, 그게 납골당이다. 납골당은 브라질처럼 아파트형이기는 하되 관이 들어가는 서랍이 아니고 재 항아리가 들어가는 작은 함이다. 층층이 서랍이 쌓여있고 그 사람의 이름이 있어 헷갈리지는 않는다. 내 자식들은 제 부모의 흔적을 이곳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원치 않는다 해도 죽음 이후는 누구나 큰 소리 칠 영역이 아니다.


아름다운 주검이 있을까? 박물관의 투탕카멘이 부러운 사람이 있을지. 고대 절대자들은 자신들이 무덤으로부터 꺼내어져 대중에 전시되리라는 걸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진시황이나 칭기즈칸 같은 이는 이런 운명을 짐작했으려나. 진시황 무덤 안에는 수은이 흐르는 강이 있고 도굴꾼을 향해 자동 발사되는 화살 무기들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그의 묘는 아직 무사하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무덤을 부근의 지형처럼 만들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그의 부대가 남의 나라나 부족을 약탈하고 학살을 일삼았으니 자기 묘의 안위 역시 걱정스러웠으리라.


레닌이나 모택동, 제레미 벤덤 등의 시신은 영구 보존 중이다. 이미 독재자들의 미라는 원하든 원치 않든 관광상품으로 전락했다. 오래전 요금을 얼마인지 내고 붉은 광장의 레닌묘를 줄지어 들어갔다. 레닌이 검은 정장 차림으로 누워있었다. 그의 시신 앞에서 안쓰러움과 역겨움으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벤덤은 자기 철학의 집착증 환자다. 그가 추구하는 ‘공익’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만 사라져도 되지 않을까. 그만하면 인류에의 기여가 적지 않으니.


야생의 동물들은 제 죽을 걸 알고 슬쩍 사라진다고 한다. 그들 나름의 본능으로 안식할 곳을 찾았겠지. 그들은 자연이 명하는 대로 움직이고 복종한다.


동물들처럼 세상으로부터 감쪽같이 사라질 방법이 있을까. 어떤 지역  사람들은 수장을 택한다. 또 어떤 곳은 조장을 사후 처리 방식으로 택한다. 옛 티베트 사람들은 독수리, 매 등 육식 조류들에게 죽은 이들을 처분하게 한다. 그들 나름의 생태계 순환을 고려한 방식이리라. 화장이나 풍장도 있다. 지역적, 기후적 특색을 고려해서 토착화했다가 종교에 의해 강화되기도 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이승을 끝내고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화장을 택했다. 대부분 종교가 육신을 온전히 유지한 채로 장례를 치른 것과 다르다. 영혼이 돌아올까 봐 두려웠을까. 아예 기거할 곳이 없도록 존재를 소거한다.

엔도 슈샤큐의 ‘깊은 강’(1993)에는 갠지스 강의 화장터가 잘 묘사되어 있다. 한쪽에서는 빨래를 하고 목욕을 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사자를 화장한다. 죽음, 삶, 갈망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강가에 모였다. 이들은 모든 것을 포용한 채로 유유히 흘러가는 위대한 강을 바라본다. 동물들이 죽음의 부름을 받는 것과 닮았다. 작품은 범신론적이며 자연신관적 사유를 드러낸다.


누군가는 뒤처리를 해야 한다. 그 육체를 소유했던 자의 기호와는 다르게 타인들의 의도대로 처리되는 경우도 많다. 인도 영화 ‘런치 박스 The Lunchbox’(2013)를 보면 인도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화장을 원하지는 않는다. 혼자 사는 주인공 남자는 죽음 이후에 대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가로로 눕혀 매장된다. 인도 대도시에서도 매장을 원하는 이들은 많고 묘지로 쓸 땅은 부족한가 보다. 계약 사원은 주인공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 관을 세워 묻히는 방법을 추천한다. 당연히 가격이 훨씬 싸다. 가로보다는 세로가 더 효율적이겠지. 한국 무덤 한 구당 셋은 들어갈 테니. 그런데 주인공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생 고생했으니 죽어서는 누워있고 싶다.

죽은 다음에는 눕든 서든 모른다. 자기가 화장을 당하는지 수장, 조장, 풍장을 당하는지도 모른다. 홀로 품위 있게 있을지, 옆에 낯 모르는 이들과 함께 뒤섞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은 죽음 이후도 궁금하다. 되도록 기품 있고 우아하게 잠들길 바란다. 그러니 각국의 왕릉들이 그토록 호화롭고 웅장하다. 순전히 착각이다. 권력자들의 욕망이고 사치다.


그렇다고 삶과 죽음이 테드 창의 ‘숨 Exhalation’(2008)이나 짐 크레이스의 ‘그리고 죽음 Being Dead’(1999)에서 그려지듯 물리적/화학적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죽음'의 주인공 부부는 그  갑작스럽고도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어느 누구보다 생생한 현실을 살았다. 형형색색의 감정/감성/감동이 인생을 수놓았다. 그런 느낌과 경험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기억을 '나'라고 여기며 '여기/이곳에 존재한다'라고 여겼다.

삶은 순간에 불과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한 오래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 오히려 덧없는 세상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테드 창의 '숨'에 의하면 죽음이란 엔트로피의 증가로 몸의 외부/내부의 압력이 평형에 이르는 상태다.  그때가 되면 신체는 움직임을 그치리라. 누구나 그 길을 걷는다. 그전까지만 '명랑한 허무'를 신봉한다.

그러나 미래는 명료하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작가의 이전글 기억과 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