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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6. 2021

가난한 사람들

잭 런던과 자연주의


'마틴 에덴 Martin Eden'(2019)이라는 영화는 잭 런던(1876~1916)이 쓴 동명의 소설을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바꿔서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설 '마틴 에덴'(1909)은 작가의 자서전적 스토리를 시대 배경에 녹여 담아낸 걸작이다. 작가로서의 정체성,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뇌가 담겨있다.


계층갈등, 소외, 불평등은 사유재산이 발생한 이래로 인류사의 유구한 논쟁거리다. 18세기 후반 즈음해서는 공상적, 이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해 소셜리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그후 본격적인 사회주의의 신기원이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출발함은 물론이다.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체제가 완성되고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정치, 사회 혁명에 대한  보편적인 논의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지식인들이라면 누구든 사회주의, 노동운동, 평등 논의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C후반에 이르면 다윈이나 스펜서의 이론이 우생학, 사회적 다윈주의 등으로 확대되면서 무신론자들도 급증하게 된다. 기존 체제, 종교, 가치관 등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맞았다.

잭 런던은 미국 작가이다. 극심한 가난과 가정적 불우를 20대 이전에 겪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야성의 부름'(1903), '흰 어금니'(1906), '강철군화'(1908)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주제면에서 상당히 거칠고 선명한 편이다. 욕망, 이념, 원시에의 희구 등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 문명 거부, 윤리적 혼란과 모호함,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 등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은 이렇듯 강렬하지만 작가의 삶은 기대만큼 일관적이지 않다. 한 개인에게 통일적 가치관을 요구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마틴 에덴'에서  보이듯 그에게 집필 동기를 부여한 건 화려함, 우아함을 소유한 상류층에 대한 갈망으로 보인다. 모순과 욕망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허약한 인물이 보인다.

소설에서 예언한 것처럼 잭 런던은 때 이른 죽음을 맞는다. 사인은 약물로 인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한다. 장 미셸 바스키아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반 세기의 격차를 두고 살았지만 어느 면에서 참 닮았다. 누군가의 지원 없이 시작했다는 점,  평생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 점, 그 증명 방식이 돈과 명성이었다는 점, 좌절과 연대한 점, 그리고 약물로 인한 사망 등이 그렇다.

19C후반~20C초반의 미국 자연주의 경향의 소설을 몇 권 소개하려 한다. 유럽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미국도 대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업화, 공업화의 성공으로 전체적으로 부의 크기는 커졌으나  정부는 부패 자본가와 결탁해 비리를 방조했으니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부유한 이들과 노동자들 간의 소득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이들의 문화적, 사회적 경험도 현격해지던 때이다. 사람들이 기존에 가졌던 가치관이 지진처럼 흔들린다.

이 시대를 살았던 마크 트웨인은 소설 제목에 '도금 시대'(1873)라는 용어를 썼다. 내부는 어찌 되었건 겉은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하게 금칠을 한 시대라는 뜻이다. 남북전쟁 후의 1870년부터 1890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이 시대 부자들을 '날강도 귀족'이라고 불렀다. 부자들의 위선적이고도 물욕에 사로잡힌 모습을 베블런은 '유한계급론'(1899)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블런 효과'도 나온다. 이들에게 가성비는 상관없는 용어이다. 오히려 비쌀수록 과시적으로 소비한다. 베블런은 원래 경제학자인데 당대 부유층에 상당한 혐오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학 계열 교양도서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도금 시대라는 말은 소설가가 만들어냈지만 경제학자들도 이 용어를 차용한다. 폴 크루그만은 '미래를 말하다'(2007)에서 도금 시대를 1929년 대공항 시기로까지 연장한다. 그에 의하면 도금 시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 압착 시대'를 맞이해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도금 시대의 JP모건, 벤더빌트, 카네기, 록펠러, 듀퐁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부자들이 이렇게 태양으로 빛날 때 지상의 보통사람들은 비참함을 무릅쓰고 고군분투 중이었다. 바로 자연주의 문학이 집중하는 풍경이다. 이 문학 경향은 과학적, 결정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을 환경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은 무공훈장>


먼저 스티븐 크레인의 '붉은 무공훈장'(1895)을 소개한다. 이 소설은 이전까지 있던 전장에 대한 환상을 일소한다. 전쟁은 냉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지옥 아닌가. 거기에는 피아간 구별이 없는 무지막지한 약육강식만이 존재한다. 소설에는 어설픈 낭만을 품고 있던 소년이 그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The Red Badge of Courage라는 원제 자체가 아이러니, 상징, 메타포를 드러낸다. 전장의 끔찍한 백병전, 부상, 탈주, 죽음, 배신과 기만 등이 건조하게 들춰진다. 누구를 위한 살육인가. 크레인은 남북전쟁에 참전하지도 않고 상상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반전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암살주식회사>


잭 런던의 '암살 주식회사'(사후 출판 1963)도 기억에 남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선악 문제, 윤리관, 가치관에 있어서 카오스에 빠졌던 것 같다. 작가는 정의에 대해 묻는다. 시대, 장소에 따라 변하는 덕목이다 보니 밑바탕에 무엇을 깔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지식인들이 모여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들을 죽이는 회사를 운영한다. 이들은 우두머리가 공정하다고 믿기에 그의 명령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살인을 저지른다. 만일 사장이 자신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런던은 작품을 미완으로 남겼다. 논리적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철학적 위기에 스스로 봉착한 것이다. 결말은 다른 작가가 사후에 완결, 출간했다고 한다.


<아메리카의 비극>


미국 소설에서 자연주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테오도르 드라이저 아닐까? 그의 '아메리카의 비극'(1925)은 '젊은이의 양지'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더욱 친숙하다. 임신한 애인을 버리고 부잣집 딸과 결혼하려는 가난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그는 애인 살해혐의로 체포된다. 소설은 신문기사에 기초했는데 실제 이 남자는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했다고 한다. 그 애인이 죽지 않았더라면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신파가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드라이저는 이미 '시스터 캐리'(1900)에서 몸을 밑천으로 세상에 뛰어든 부나비 같은 소녀를 그리면서 데뷔했다. 이 작품들은 아메리칸드림이라기보다는 아메리칸 비극을 다루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1939)도 이 부류의 명작이다. 대공 항기를 무대로 한다. 농업기반 산업이 무너지면서 고향에서는 버틸 수 없는 이들이 남부여대하여 서부로 떠난다. 그런데 그곳도 같은 형편이다. 가치 있던 것들이 휴지조각처럼 초라하게 구겨진다. 뿌리 뽑힌 자들의 심리적, 물리적 상흔이 느껴져 눈물 없이 읽기가 힘들다. 제목처럼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을 향한 분노가 느껴지는 위대한 작품이다.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는 1925년에 '위대한 개츠비'를 펴냈다. 그의 작품들이 다른 자연주의 계열 소설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유한 상류층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돈은 있으되 마음은 몹시 가난한 이들이다. 이 시대는 누리는 자들도 공황의 늪에 빠지게 한다. 우리 시대에도 자연주의 소설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면 그의 소설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인물들은 상대적 부와 빈곤, 각자 욕망의 크기에 따라 행•불행을 나누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한 아내, 젤다는 1920년대 오렌지족 Flapper. 그들 부부의 소비적, 향락적 행태는 두고두고 가십거리로 전해질 정도이다. 젤다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불이 나서 죽고 피츠제럴드는 능력을 소진한 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다. 독자들은 막대한 부를 가진 개츠비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고 있다. 마틴 에덴처럼 그의 출세 동기도 헛되다.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것들을 애써 잡으려 했던 개츠비의 생애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맨다'는 '파우스트'의 주제를 생각나게 한다. 피츠제럴드의 자연주의적 면모는 특히 단편집으로 잘 드러난다. 독자들은 청춘, 상실, 허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인 감독은 왜 미국 소설을 번안했을까. 이탈리아로 배경을 바꾸어도 모든 것이 척척 들어맞기 때문이다. 이 나라도 계층 간의 벽이 두터웠고 대다수 민중은 너무도 가난했다. 이탈리아에서 19C말~20C초에 작곡된 오페라를 '베리스모'라고 부른다. 진실주의라는 뜻이다. 당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진실이란 고난, 고통과 동의어였을 것이. 비관적인 사회에서는 자연주의 작품들이 강성하다. 이탈리아에서 베리스모 오페라나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영화가 한 시대를 풍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연주의 문학이 발흥한 지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동안 절대빈곤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세상에는 개인이, 집단이 외치고 보듬어야 할 새로운 이슈가 많다. 수많은 인물들이 애써 일어서 달려가고 또 비틀거리다 쓰러져갔다. 오늘을 사는 우리 또한 욕망에 허우적거리곤 한다. '마틴 에덴'이라는 잭 런던의 페르소나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와 우리에게 향해 묻는다. '당신을 추동하는 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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