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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7. 2021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에이젠슈타인 '전함포템킨', '10월'


존 르 카레는 냉전시대 스파이 소설의 대가이다. 그럼에도 작품은 액션물 특유의 박진감, 흥분보다는 쓸쓸함으로 자욱하다. 스파이들은 이데올로기 혹은 소속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투쟁한다. 적어도 철의 장막이 존재하던 무렵까지는 자기 삶의 존재 근거가 명료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부터가 문제. 세상은 그 근거가 어제까지 맞았지만 오늘부터 오류라고 한다. 소련과 자본 진영 양측 스파이들은 고뇌한다. 새로운 시대는 그들의 과거를 하찮다고 치부한다.

한 시대의 진지함도 세월이 흐르면 희미해질까.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의 두 영화를 보면서 100여 년 전 사람들의 고난과 희망을 돌아보았다.

1917년은 10월 혁명이 성공한 기념비적인 해이다. 러시아 혁명은 별안간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고, 1917년 2월에는 케렌스키의 자유주의적 정권이 수립되어 로마노프 왕조가 복귀한다. 그 후, 1917년 10월에 가서야 공산정권을 수립되면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게 된다. 에이젠슈타인은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7개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중 ‘전함 포템킨’(1925)과 ‘10월’(1927)은 각각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을 소재로 한다.  나름의 인민의 희생에 대한 답이다.

전함 포템킨 선상 반란은 1905년 1월 22일의 '피의 일요일'에 뒤이어 같은 해 6월 22일에 일어났다. 가뜩이나 들끓고 있는 성난 민심에 불과 기름을 퍼부은 사건이다. 영화를 선전/선동의 도구로 바라봤던 레닌 시대에 포템킨 반란 20주년은 프로파간다를 위한 좋은 기회다.


포템킨호의 고위간부들은 썩은 고기 배급에 항의하는 하급자들을 반란자로 취급한다. 비인도적 행위를 강제하는 함장 및 선상 의사, 신부에 대항하는 수병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수병들은 비참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의로운 이들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들 편이다. 혁명은 정당하고, 영화는 목표에 성공한다.






오데사 사람들이 죽은 수병을 추모하는 집회는 정부를 자극한다. 정부군의 오데사 사람들에 대한 학살 장면은 이 영화를 기억할 만한 명화로 만든다. 하도 유명하다길래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오데사 항구 계단 학살 장면 6분 동안에는 그 유명한 몽타주 기법이 줄을 잇는다. 정부군의 기계 같은 움직임, 군인들의 총칼, 맞은편에 선 평범한 사람들의 무질서, 혼잡함 등이 교차 편집된다. 민중을 향한 군인들의 총살 장면은 지금 봐도 심장을 울컥하게 만든다. 총에 맞은 아이, 아기 엄마, 노인이 계단에서 죽어간다. 아비규환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유모차에 탄 아기다. 엄마의 손을 놓친 유모차는 아기를 싣고 한 계단, 한 계단 굴러간다. 계단이 매우 길게 느껴지는데 끝부분에는 가속도가 붙어 좌우로 마구 흔들리면서 떨어진다. 아기를 이용한 긴장이라니. 선동을 위해서는 잔인한 효과도 상관없다. 이런 끔찍한 일을 목격하는 한 남자의 입은 분노와 절규로 오래 기억된. 그렇지만 피에 물든 안경을 마지막으로 이 인텔리겐챠도 그 계단에서 쓰러진다.

관객은 이런 비참한 사건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한다. 에이전슈테인은 우리를 증언자로 삼는다. 그는 은유적, 표현주의적 효과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리라. 무성영화 맞던가? 왠지 울부짖음과 격정으로 영화를 기억하게 된다. 에이젠슈타인은 편집이 변증법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쇼트 사이의 갈등은 정과 반으로 드러나고 새로운 관념이 합을 드러낸다고 했다. 충돌, 폭력의 연결이 거칠게 이루어질수록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포템킨을 향해 돌진하는 정부 측 함대의 발포 장면도 마찬가지다. 긴장 촉발 장면은 모터나 거센 파도 등을 교차하면서 격렬한 움직임을 연상하게 한다. 관객들은 정부 측 함대가 포템킨을 향해 불을 뿜을까 봐 가슴을 두근거리게 된다. 편집팀은 빠른 화면 전환으로 사람들의 심리, 두려움, 긴장도를 마음껏 조절할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1920년대의 러시아 영화인들은 이미 영화 기법에 통달한 것처럼 보인다. 화면을 조작하면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분노하게 하거나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리게 만들 줄 알았다. 서사적인 내용 전개가 아니라 영화문법으로 만든 효과가 사람의 심리를 장악해 쥐고 흔든다. 당대인들은 더 감동했을 것이다.

괴벨스는 이 영화의 선동 효과에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나치들은 ‘위대함’을 선전하는 데에 영화를 톡톡히 이용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파시즘을 ‘정치의 미화’라고 불렀다. 예술의 숭배, 제의, 아우라 효과를 알고 있는 벤야민은 당시 영화의 지향 방향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군중의 통제력을 예언한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물질적 토대인 하부구조가 사상, 이념 등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이지만 벤야민은 문화와 같은 상부가 하부구조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영화라는 매체는 ‘충격을 근간으로 삼는 새로운 통각’을 기르는 도구로써 관객의 심리를 강렬하게 움직일 수 있다. 관객은 화면을 의도적으로 보고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벤야민의 말대로 ‘시지각적 무의식’을 거니는 것이리라. 우리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영화의 손아귀에 잡혀 허공을 배회하는 몽유병자 신세다. 특정한 정치 의도를 지닌 영화는 인식이 마비된 환자들을 이끌어 제의에 참여하게 하는 힘이 있다.

‘10월:세상을 뒤흔든 10일’은 1917년 10월 혁명의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꾸민 영화다. 이 104분짜리 무성영화를 시종일관 제대로 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했고 당국으로부터는 과도한 형식주의로 비난받았다. 1966년에 쇼스타코비치가 이 영화 음악을 작곡해서 덧입혔다고 하는데 내가 본 영화는 초기 필름이었는지 피아니스트가 화면을 보며 직접 사운드트랙을 연주했다. 쇼스타코비치의 호전적인 음악은 부수고 무너뜨리기로 작정한 듯 그 긴 시간을 울고 소리 지르고 절규했다. 어쩌면 중간중간 졸다가 굉음에 놀라 깼기에 더 요란스럽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1917년 4월부터 10월까지 혁명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린다. 사건이 주인공이고 캐릭터는 부수적이다.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누구든 평등하다. 십만 명이나 되는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1966)만큼이나 대형 서사시다. 이런 영화는 엑스트라들 자체의 자발적 동기에 의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그들은 과거에 피지배, 피압박 계층이었다. 스스로를 거대한 수레바퀴에 무너지는 미약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규정지었기에 가능한 영화들이다. 그러므로 ‘10월’에 주인공다운 인물이 있을 리 없다. 레닌조차도 언뜻언뜻 비췄다가 사라지는 민중의 한 명이다. 물론 특유의 선동적인 제스처로 인해 주목을 끌긴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짧은 장면일 뿐이다. 그래도 잠시나마 레닌이나 트로츠키 역 배우의 외모에 놀라 이게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10월'의 내러티브는 극적 효과보다는 에피소드가 나열되는 방식이다. 빠른 화면 fast motion으로 촬영된 인물들, 그것도 부감 쇼트 high-angle shot로 저 아래 보이는 사람들이 아무런 소음도 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는 모습은 기괴하고 또 아름답다. 이 영화도 에이젠슈테인답게 사실과 상징이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범한 인물들은 다큐식으로 보이려는 의도인지 카메라 워크가 간단하다. 음모가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순박하고 우직하다. 그들을 통해 혁명은 정당성을 얻는다. 반면, 감독이 의도하는 상징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다분히 표현적이다.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일수록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그린다.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스타일의 표현주의 영화같다. 이런 면에서 에이젠슈타인은 혁명의 보고자라기보다는 낭만적 시인에 가깝다.

영화에 의하면 혁명에는 숭고한 희생양이 필요하다. 모든 혁명은 제의이고 제의에는 희생양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사회적 위기가 닥치면 갈등도 증폭된다. 그 갈등을 해결하려면 죄 없는 순교자의 속죄의식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인류로서는 고대로부터 전달받은 익숙한 액막이이다. 영화 전반부에 케렌스키 정부가 민중 소요를 막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려 통로를 가로막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으로 인해 무심해 보이는 영화가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감수성을 품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다리 연결 틈 사이에는 이제 막 죽은 듯한 처녀가 엎드려있다. 괴물 같은 귀족 부인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순결한 아가씨. 그녀와 함께 흰 말이 도개교 밑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아래로 사라진다. 모든 이의 죄를 대신하여.

러시아 혁명 100주년 후로도 또 여러 해가 흘렀다. 100여 년 전 사람들도 열렬하게 삶에 참여했다. 모든 시대마다 당대의 숙제와 해결책이 있다. 그 숙제들은 대부분 풀기 어려운 갈등으로 매여 있다. 어떤 이들은 묶인 끈을 차례차례 풀어 나가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매듭을 두 동강 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동시대인으로서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다.

비록 새로운 체제가 미래의 어느 날, 불합리와 모순으로 자멸할지언정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당대의 절박함과 필연성으로 움직인다. 존 르 카레의 주인공들은 체제 변화의 현장을 목격하는 전사들이다. 스파이들에게 세상의 변화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으랴. 철의 장막, 죽의 장막으로 가로막혀야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운신 폭이나 존재감이 커진다.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태양이 드러나자 그들은 지향점을 잃고 갈팡질팡한다. 우리 시대 역시 100여 년 후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되지 못할 면들이 있을 것이다. 순박하고 우직하게 걷는 이들이 기념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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