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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8. 2021

어느 낭만에 대하여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어렸을 때 시라노 베르주라크라는 남자의 이야기에 슬펐던 기억이 있다. 먼 옛날 프랑스 루이 13,4세 시절을 살았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619~1655)의 이야기는 가슴을 흔드는 면이 있다.

시라노라는 인물이 진짜 이런 삶을 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897년에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라는 희곡으로 그려냈기에 생생하게 느껴질 뿐이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실존했다고 하는데 주인공이나 조역들 모두 작품을 위해 많은 부분 가공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시라노 베르주라크는 400여 년 전 프랑스 절대군주 시대를 살았다. 그는 종교/왕정 시대를 살았지만 유물론자에 무신론자다. 사회의 규범과 시대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은 아웃사이더이며 세상과 불협화음을 겪은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에드몽 로스탕이 만든 이야기를 완전한 픽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실제 베르주라크는 군인, 동성애, 매독, 결투, 음모, 암살 등의 낱말과 관련된 격렬한 삶을 살았다. 이 외롭고 침울한 이는 그라면 했을 법한 일을 벌이며 살았고 또 그렇게 죽었다. 그는 때 이른 SF물의 저자, 과감한 개혁가, 풍자가로서의 면모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재능과 열정이 끓어 넘치는 남자가 시대와 조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낭만계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나타나려면 백 년을 기다려야 하는 때다. 불꽃같은 사나이, 시라노 베르주라크는 고작 36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정치권력의 힘겨루기에 연루암살 사건의 후유증으로 추정한다.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이 정도이기에 240여 년 만에 연극의 주인공으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옛날 옛적에 추남 기사 베르주라크는 예쁜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문학 작품 속의 미남/미녀들은 그들만큼이나 멋진 남녀를 애인으로 사귀고 싶어 한다. 상대를 사랑에 빠뜨리려면 무엇보다 본인의 아름다운 외모가 필수적이다. 시라노 정도의 용모로는 미녀 록산느의 상대가 되기 어렵다. 그가 아무리 재기 넘치는 문사이며 검객,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미남/미녀의 비극적 사랑에 관심이 많았다. 외모가 덜한 사람들의 사랑은 코미디물에서나 가능했다. 진지한 무대에 오를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외모는 당연한 조건이다. 관객들은 ‘영혼’보다는 ‘포장’에 관심이 많다.

재미있는 점은 록산느라는 여자가 영혼과 외모 모두에 관심이 많다는 거다. 그러므로 그녀는 시라노만 사랑할 수도 크리스티앙만을 사랑할 수도 없다. 록산느는 두 사람의 우월한 면을 모아 완전 구동체를 만든 후에야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을까? 크리스티앙과 같은 외모, 사랑스러움, 부드러움을 누가 싫다 하랴. 또 시라노의 고독, 자기 세계, 낭만, 시정 넘치는 글, 서정적 감수성도 거부할 수 없다. 외모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시라노는 세상 누구의 사랑이라도 받을 만하지만. 

그러나 다 갖춘다는 건 신이 허락하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다. 소설 작품에는속이 텅 비어도  아름답기만 하면 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경우가 많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도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오데트, '인생의 베일'의 키티,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가 그렇다. 미남 미녀도 아니면서 경박한 이들은 작가들의 주목거리가 되기 어려웠다. 외모는 보잘것없으나 영혼은 고상한 사람들 역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고상함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는 빠르게 반응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는 반응 속도가 더디다.

시라노 베르주라크도 사랑을 증명하는 데에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동안 연적이었던 크리스티앙도 죽었고 록산느는 수녀원에서 외로운 날을 보내는 중이다. 는 그동안에도 록산느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왔다. 물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춘 채. 남자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수줍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빠른 시간 내에 사랑의 주인공이 된 것에 비하면 평생의 노력으로 겨우 빛을 본 셈이다. 물론 빛을 보자마자 다시 죽음과 어둠으로 사라졌으니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세상은 당연히 공평하지 않다. 완전한 공평이나 평등은 로봇들끼리나 가능하다. 유기체라면 물리적, 화학적 변화에 반응하고 적응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각각 처한 환경 또한 다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열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각자 고유하다는 걸 알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희곡의 시라노는 외롭고 비참했을 것이다. 열등감, 소외, 분노, 고독 등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의 갈등을 해결할 하나의 단어는 바로 ‘미남’이다. 이 해법이 주어졌더라면 삶은 훨씬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는 좀 더 편안하게 사랑을 찾았을 것이고 느긋하게 생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대신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라는 갈구하는 영혼은 없었을 것이다. 가질 수 없어야 맹렬하게 갖고 싶다. 우리는 300여 년 후, 이 남자와 흡사한 캐릭터를 만나게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창조한 '위대한 개츠비'(1925)의 개츠비이다.


개츠비에게 치명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돈이다. 사람들은 욕망, 신기루, 환상을 좇지만 성취하기는 어렵다. 그것들은 실체가 없다. 보여주되 잡히지는 않는다. 낭만주의자는 고통스럽고 힘든 삶에도 '자기만의 록산느'를 찾는다.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록산느나 데이지가 그럴 만한 이들이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여인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영혼 상태를 투사하는) 그 상태의 깊이'이다. 그곳에 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닿을 수 없기에  욕망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취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컷 글라스'에서 남자는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에게 '당신을 꼭 닮은 딱딱하고 차갑지만 아름다운 것'으로 컷 글라스 그릇을 선물한다. 욕망의 화신들도 대부분 자신이 공허를 좇는다는 것쯤은 안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보자. 각고의 노력으로 유명작가가 된 남자는 어떤 노력도 없이 저절로 잘생긴 미소년에게 반한다. 애정 분야 관한 한 대부분은 비합리적이니까.    

   

람들은 무언가 갈망하는 것이 있기에 베르주라크나 개츠비 등에게 공감하고 심지어 동일시하는 감정까지 갖는다. 단지 그 대상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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