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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9. 2021

망설이는 마음

발자크, 잃어버린 걸작


휴대폰 출현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표적인 게 그리움이 낯설어지고 신비가 걷히는 경험이다.

그리움은 기다림이다. 가슴을 울려주던 시, 가곡이나 가요 가사는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황진이의 시 ‘상사몽相思夢’은 한시보다는 김억이 번역하고 김성태가 곡을 붙인 ‘꿈’이라는 가곡으로  유명하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에는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서로 연락할 길이 없어 애태우다 꿈길에서나 만나려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아 항상 어긋난다. 휴대폰으로 연락하면 되지 무슨 걱정인가. 노상 카톡, 라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으로 실시간 중계하기에 궁금한 것도 없긴 하지.

그리움을 탐한다. 그 감정이 있어서 사람이 더 아름답다. 아름답기에 취해보고 싶다. 그런데 휴대폰이 이 감성을 점점 희미하게 한다. 아무리 황진이라도 요즘 사람이라면 이런 시를 생각해내기  어렵겠지. 기다림이 황폐한 터처럼 버려진다. ‘그립다’라는 그 말마저 아련해서 눈물겨울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소환되어 사용한 말이지만 앞으로 사라질 낱말 1순위가 되지 않을까.

예전에는 친구들과 서점 앞, 극장 앞에서 만나곤 했다. 문제가 생겨도 연락이 안 되니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집으로 오는 전화, 이메일, 휴대폰 등으로 바뀌면서 기다리는 시간도 날로 짧아졌다. 지금은 기다리지 않는다. 바로 확인한다.

이수인 곡의 ‘내 마음의 강물’, ‘별’, ‘그리움’ 등의 가사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 그리운 사람이 있었다. 만질 수도, 재현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생각을 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서운하다. 마치 그리움의 대상인 그 사람들, 동네 풍경들, 어떤 시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

그리움은 보거나 만지기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이제는 그 접촉이 신속하고 간단하다 보니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종료된다. 누구든 휴대폰으로 불러내거나 검색하면 웬만한 동향은 알게 되니 특별히 그리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 사진, 동영상, 수많은 저장 파일들이 참 흔하다. 기억을 돌려놓을 수도 없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나은데도 불구하고.

흐음, 나는 그립다고 해도 그쪽에서 관심이 없다면 애써 그리움을 지워야겠지. 모멸감이 커지면 감정도 위축되니까. 머지않아 홀로그램이 본격화되면 나만의 프로그램으로 상대를 불러낼 수 있을 테니 그때를 기대해 본다. 돌아가신 분들, 괜찮았던 시간도 리플레이해본다. 사랑을 모욕으로 갚은 이들에게는 착한 마음을 입력시킨 후 불러낼 테다.

스마트폰이 빼앗아 간 또 하나는 '신비' 아닐까. 예전에는 유명인들을 하늘의  알았다. 그들을 미주알고주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2015)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보면 신들도 환승하려고 지하철역을 바삐 오르내리는 장면이 있다. 그들 역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아무도 신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 승객보다도 더 작고 초라하다. 옷차림은 남루하고 구두는 찢어져 너덜너덜하다. 이 시대의 신비란 비밀주의, 불편함과 동의어이므로 적폐 대상이다.

무엇이든 다 보여주지는 않은 채 약간은 어두운 상태로 머무는 것이 좋다. 본다/안다는 건 사실 두려운 다. 그렇다고 검게 차단하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될 수만 있다면 반투명, 모호한 것들이 마음에 든다. 볼 수 있으되 다 볼 수는 없는 그 상태. 베일에 싸여.

아직까지 낭만주의자였던 발자크는 세상의 어둠과 신비를 보호하고 싶었다. 기괴한 인물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궁금하지만 소문만 무성하다. ‘전보’와 '마차'의 시절이니 그럴법하다. 모든 일에 아우라가 덧씌워지기 마련이다. 과장된 위대함과 위악적인 괴기스러움. 대부분 신비는 거짓말, 허풍, 과장, 헛소문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다 보면 역시 다른 층위가 있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품는다.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1831)은 작가의 미학론이라 할 법하다. 주인공 프렌호퍼는 걸작을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다. 이 단편은 피렌체 파와 베네치아 파, 선과 색, 그리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의 대립을 다룬다. 프렌호퍼는 베네치아 파의 회화 세계를 꿈꾼다. 형태보다는 색채의 세계. 과학보다는 신비의 세계. 그는 장차 프랑스 고전주의의 선봉이 되는 니콜라 푸생을 상대로 그 비밀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프렌호퍼는 자신의 그림이 진실과 멀어지는 순간 차라리 삶을 마감한다. 신비는 알려지길 거부한다. 인간은 그 힘을 표현할 수 없다.





< 파블로 피카소, 발자크 '알려지지 않은 걸작' 삽화>




산길을 간다 말없이
홀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이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없이
밤에 홀로 산길을
홀로 산길을 간다
                       산길(양주동 시, 박태준 곡)

이제 산길은 점점 넓어지고 반듯해졌다. 웬만한 산은 자동차, 버스, 전철이 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산길은 건강을 위해서 심심풀이로 하는 취미로만 간다. GPS 포인트가 있어 비상 상황에는 헬리콥터도 부를 수 있다. 짐승 소리는 멀리서도 들리지 않는다. 야산의 동물들이라고 해봐야 청설모나 들고양이, 꿩, 까치 정도다. 구글은 바닷속 깊은 곳까지 지도를 구동시킬 기세다. 동서남북뿐 아니고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곳까지 샅샅이 다 보여주겠지. 신선이나 선녀는 산꼭대기도, 산골짜기도 갈 데가 없다. 샹그릴라나 도원경도 머지않아 드론이 드나들면 그곳 사람들이 몇 백 살인지, 그 세계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조리 공개되겠지. 


이 시대는 뇌에 칩을 심어 조종할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 별걸 다 해킹당하는 시대에 진입했다. 모두 투명하게 가자는 건가. 머리부터 빌끝까지. 크로에서 마이크로까지. 그래도 이래서는 곤란하다. 아, 정말 그렇다.


나를 공개하는 건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위해서도 필요하. SNS 시대에 자연스럽동참하면서 자신도 향상한다. 그런데 인적 물적 정보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음에도 그 앞에서 멈추는 이들이 있다. 망설이고 주저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안개 같은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로 볼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침묵한다. 함부로 다가가지 않고 둑 저쪽에서 머물며 바라본다. 그게 예의라고 여긴다. 상대가 알려주는 것만 끄덕인다.

 AI 시대에 고작, 그리움이니 은밀, 신비나 중얼거리다니 시대에 실례다. Left behind. 뒤쳐진다는 말. ‘그립다’, ‘외롭다’, ‘기다린다’, ‘미지’, ‘신비’, ‘미스터리’, ‘베일’ 등 이런 낱말에 기대는 이들은 멈춘 세상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니, 하루에도 몇 km씩 뒤로 후퇴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전진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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