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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10. 2021

검은 상처

장 미셸 마스키아와 흑인 문학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는 길거리 화가로 출발했다. 가출청소년이었던 그는 십 대 후반에 친구와 SAMO라는 팀을 만들어 권위와 제도에 대한 반항을 그라피티로 남겨 유명세를 얻었다. 함께 했던 친구가 계속 그라피티 화가로 남은 반면, 바스키아는 '제도와 권위'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경멸했던, 어쩌면 갈망했을 'Same Old Shit'의 뻔하고도 뻔뻔한 세상으로.


당시는 50년대까지 예술계를 장악했던 모더니즘이 이미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윌렘 드 쿠닝의 시대가 지나갔. 60년대부터는 다다이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방가르드의 세계가 문을 활짝 연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퍼포먼스 등이  6~70년대의 예술계에 진입한다. 이때 바스키아는 80년대 새 시대의 총아로 등장한다.

바스키아의 멘토였던 앤디 와홀은 여러 가지 명언을 남겼다. 그는 '미래에는 누구든 15분쯤은 유명해질 수 있다'라고 했다. 바로 자신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바스키아를 향한 예언이 아니었을까. 세상 사람들은 갑자기 유명해지고 부유해진 소년에 주목한다.



 

 <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Skull), 1981 >




바스키아는 더 이상 거친 거리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익명의 화가가 아니다. 그는 화랑과 고객들 손에 움직이는 자본시장의 총아가 된다. 도시를 화폭삼아 그리던 그의 캔버스는 축소되고 작업은 압축되어 상징성을 띤다. 자유 대신 돈과 명성을 얻게 된 소년은 처음에는 탐닉하나 차츰 자아를 탐구하게 된다. 자신은 일반적인 예술가가 아니고 그 드문 '흑인' 예술가였으니까. 자부심에 불타오르다가도 열등감에 무너지곤 했지만 흑인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다.


바스키아는 아이티계 아버지와 푸에토리코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는 흑인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흑인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몇 권 읽어보았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암흑의 핵심>

폴란드 태생의 영국 작가 조셉 콘래드. 자기 자신이 피압박민족의 하층계급이어서였는지, 식민지 무역에 종사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인지 그는 제국주의+노예무역에 대해 예리한 시각을 품고 있었다.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 '(1899)은 천인 공로할 백인 제국의 착취를 그린다. 제목 자체가 중의적이다.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를 다룸과 동시에 인간 만행의 극한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관객들은 과거 유럽인들의 만행을 그대로 베트남에서 답습하며 미쳐간 미국인 커츠 대령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이 이 소설의 번안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에 의해 아프리카인들의 가치와 미덕이 무너지고 있음을 날카롭게 인지하고 있었던 '미개인' 이야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Things Fall Apart'(1958)는 나이지리아 출신 치누아 아체베의 영문소설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백인들이 흑인 원주민의 주인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그린다. 백인 도둑들은 처음에는 물질을, 나중에는 종교와 정신까지 빼앗는다. 원주민들은 눈뜨고 코, 심장 그리고 뇌가 사라지는 걸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자살로 식민에 대한 분노/항의를 표하며 막을 내린다.


<미국의 아들>


1940년에 나온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Native Son'은 본격 흑인 문학의 시작을 알린다. 흑인이 생각하는 자기들 세계가 출현한다. 소설에는 아주 슬픈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동경은 할 수 있지만 입장은 허용되지 않는 세상으로 들어간 청년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흑인 아이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한다. 비행사/배우/사업가 이런 멋진 직업은 선 너머에 위치한다. 그 세계는 이 청년에게 금기이다. 강간, 살인이 뒤를 잇고 결국 처단된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흑인들은 스스로를 미국인으로 간주하겠지만 백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백한 반어법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 Invisible Man'(1952)은 랄프 앨리슨의 소설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투명하다는 의미다. 이렇게 투명인간 같은 존재로 결론이 나기까지 주인공은 열릴 듯 말 듯한 문을 무수히 두드렸다. 그러나 그 문은 애교많고 사랑스럽고 말 잘듣는 유색인종에게만 조금 열릴 뿐이다. 약간의 사회의식을 갖추고 진실을 인식하려는 사람에게 문은 거칠게 닫혀 열리지 않는다.  아무도 주인공 남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소수자들이나 노동계층마저도 그렇다. 소리 지르고 화를 내도 못 본 체한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초현실적이지만 실존적인 외침을 담고 있다.


<비러비드>


1993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의 '비 러비드 Beloved'(1987)를 읽고 가슴아픈 독자들이 많다. 작가는 '재즈',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다정다감한 할머니가 말 못 할 과거를 품고 있다. 다른 나라의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은 예외이다. 언어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순수성와 본능적 사랑이라는 게 뭔지 알려준다. '빌러비드'는 대를 이어 노예를 출산하길 거부하여 딸을 살해한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마음 속으로 물어보았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공중곡예사>


노예 해방이 있고 나서도 미국의 흑인들은 여전히 평등의 벽 너머에 존재했다. 심지어 아무 이유도 없이 납치, 살해당하는 일도 버젓이 행해졌다. 아직도 악명 높은 KKK단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일부 백인들의 타인종에 대한 우월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들 단체에 논리나 합리적 근거가 있을 리  없다. 포스트모던 작가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폴 오스터는 '공중곡예사 Mr. Vertigo '(1994)에서 미국 사회에 드리워진 타인종 혐오의 검은 그림자를 잠시 들추어 보여준다. 흑인과 인디언이라는 이유로 참혹하게 살해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빌리 할러데이의 '이상한 열매'라는 노래가 있다. 그 이상한 열매가 바로 나무에 매달려 죽어간 이들이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가 그들의 죄라면 죄였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의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1986)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티투바 역시 노예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태아를 유산한다. 소설은 17세기 세일럼이라는 지역의 마녀사냥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아서 밀러의 '시련'(1953)을 읽어보면 아이들의 마녀행위를 촉발시킨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중남미 출신으로 특유의 민간신앙,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완고한 백인 목사의 가정부가 되었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마녀로 몰려 사형 당한 백인들은 사후에라도 명예를 회복했지만 티투바는 아예 연구나 조사 대상에도 오른 적이 없다고 한다. 최하층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으니 당연한 건가. 작가는 그녀를 위해 픽션이나마 자그마한 기념비를 세워준다. 덕분에 마녀로 불린 여인이 수백 년 만에 주역으로 부활, 복권된다.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고독과 분노가 느껴진다. 한 개인이 아닌 집단적 공허의 폭과 깊이가 전해진다. 그는 평소에 윌리암 버로스(1914~1997)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버로스의 '정키', '퀴어', '네이키드 런치'등에는 마약중독자, 양성애자 등 소수자들이 등장한다. 바스키아가 이 작가를 탐독한 까닭은 아마도 좌절에 대한 연대감이 때문일 것이다.


바스키아는 현실에서 단단한 자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당대 예술계의 슈퍼스타 히어로로서 외면적으로는 화려했으나 실상은 전근대적인 인종 차별의 희생양이었다. 결국에는 그가 즐겨 읽던 버로스의 주인공들처럼 헤로인에 중독되어 2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아방가르드는 전위대라는 뜻이다. 선두에 선 이들은 상처입기 쉽다. 그런 면에서도 그는 참다운 선봉대이다. 예술에서, 또 인종차별에 맞선 투사로서 그렇다. 아직도 세상에는 차별의 벽이 두텁다.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며 짧은 생을 소진해간 외로운 영혼을 기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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