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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11. 2021

신과 함께

아그네스와 몇몇 소설


1


‘신의 아그네스’, 이 연극은 참 오래도록 인기가 있다.

연극의 극본은 작가 존 필미어의 관념 놀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실제 벌어진 일이었다고 믿기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실화가 맞았다. 1976년, 작가는 뉴욕의 한 수녀원에서 영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는다. 수녀 후보생이 피의자로 체포되었고 재판 과정은 많은 이의 주목을 끌었다. 작가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희곡을 쓰게 된다. 그는 가톨릭 신자다. 세상에 신성/신비가 있음을 믿는 사람이다. 이 작가가 정신분석 전문의 리빙스턴 박사를 내레이터 삼아 극을 전개한다. 의사는 무신론자일 뿐만 아니라 가톨릭에 대해 개인적인 증오심도 있다. 그녀는 아그네스 수녀에게 정신분석을 가하고 최면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과학과 인간 이성의 승리를 확인하려 한다. 연극은 광신을 경계하고 이성적인 믿음을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이쯤 하니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가 생각난다. 소설에서 반전을 선사하는 궁무처장은 쓸쓸하고 씁쓸한 넋두리로 과학지상주의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 인물의 말처럼 오래전 톨릭에서는 과학과 종교가 대척점에 있다고 보았다. 지상의 어둠을 그대로 내버려 둘수록 종교가 품고 있는 초월성이 유지되리라는 거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1951년 비오 12세는 빅뱅 우주론을 인정하는 연설을 했다. 요한 바오르 2세도 늦었지만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인한 과거의 과오를 인정했다. 프란치스코 현재 교황 역시 진화와 빅뱅이론이 오히려 신의 존재를 드러내 준다고 밝힌 바 있다. 교황청에는 19세기에 세워진 과학원도 있어서 후원을 받은 과학자 중 노벨상을 수상한 이가 70여 명이나 된다. 과학에 기반을 둔 현실 인식이 오히려 창조론을 객관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간주한다.

이렇게 과학이 신비를 밝혀낼수록 신을 증명하고 찬양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신의 아그네스’에 나오는 원장 수녀나 ‘천사와 악마’의 궁무처장 같은 이들은 과학, 현대 문명의 파헤치는 버릇을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과학과 이성은 인간의 영역이고 종교는 신의 영역이라는 입장이다. 우리의 인식이 유한하므로 신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을 바탕으로 판단하려는 태도 자체가 휴브리스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2

19세기 이래로 종교와 신비를 다루는 몇몇 작품을 소개해본다. 문학의 목적은 휴머니즘의 구현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궁극을 사유하다 보면 저절로 그 길로 가게 되어있는 것 아닐까.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겠만 결국은 인간의 위치가 어디쯤인가에 대한 각자의 통찰이다. 그러다 보니 신과의 관계, 인간성의 범위, 자연을 보는 관점 등에 집중한다.


<모비딕>


허먼 멜빌의 ‘모비 딕’(1851)을 앞자리에 세우고 싶다. 멜빌의 시대에는 포경업이 성행했다. 향유고래는 아주 큰 고래인데 그중에서도 모비 딕은 악마를 연상시킬 정도의 크기와 외양, 성격을 지녔다. 작품은 모비 딕이라는 초자연적 괴물에 맞서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다. 작가는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작품에 상징을 부여했다. 이스마엘, 에이허브(아합), 엘리야 등은 성경 속 이름이다. 스타벅, 스터브, 플래스크 등 항해사들의 이름 또한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비 딕은 모호한 자연성, 순수 악, 조로아스터교의 신 등을 뜻한다. 다양한 인종 집단으로서의 선원들은 퀘이커, 무속신앙, 조로아스터교 등을 신봉한다. 포경선 내부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배와 선원들의 운명은 예언적이고 또 묵시록적이다. 인간이 신비를 좇아 그 베일을 벗겨내려는 순간 자연은 공포와 악으로 보복한다. 우리는 이미 초월적인 것들을 벗기고 드러내 밝히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세상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모비 딕’은 인류의 미래를 종말론적 분위기로 몰고 간다. 멜빌이 광신적인 선장 이름으로 아합을 차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합은 구약의 거만한 이교도 왕으로 신에게도 불경스러웠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자이지만 이삭이 태어난 후에 사막으로 쫓겨났다. 그는 방랑자이자 쫓겨난 자의 원형이다. 그러나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만나 살았듯이 이 소설에서도 유일한 생존자로서 목격한 것을 전한다. 어두운 비전을 지녔던 멜빌의 ‘모비 딕’은 검고 묵직한 임파스토의 페인팅을 생각나게 한다.


<악령>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분야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문가이다. 그의 작품 ‘악령’(1872)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살펴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교 신자인데 옴스크 유형에 처 해진 후에는 더욱 독실한 신자가 된다. 작가는 장편들을 통해 자신의 종교관을 바탕으로 허무주의, 자유주의, 폭력과 무정부주의와 대결한다. 말기를 달리는 제정 러시아 정부는 반정부 조직의 뿌리를 뽑아내는데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정부와 지배층은 부패의 최상층으로 군림하며 인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데 일조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불행한 이들은 불합리와 모순에 찌든 관료 집단에 다시 좌절한다. 사람들은 점차 정부와 정교와 같은 기존 질서에 등을 돌리게 된다. 노동자, 지식인들이 연합하고 분열하며 무수히 논의를 거듭했다.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가 부딪히고 폭력과 선동이 옹호되거나 거부되었다. 1905년, 아니 1917년으로 나아가던 도정이었다. 작가는 신을 거부하고 허무에 찌든 이들을 악령에 들렸다고 진단했다.

‘악령’은 ‘악령 들린 자’들로 채워진 소설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들이 스타브로긴과 키릴로프. 두 사람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반영웅을 영웅으로 착각하게 하는 점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인물들 간의 대화로 사상을 전달하는 데에도 명수. 그 때문에 인물은 성격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러나 작가가 너무나 자세하고 간절하게 쓰는 바람에 악당으로 나와야 할 인물이 거꾸로 만인의 사랑을 얻는 부작용이 생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이반이 그렇고 ‘백치’의 로고진이 그랬던 것처럼.
‘악령’의 스타브로긴은 니힐리스트이고, 키릴로프는 무신론자에 더해 자기가 신, 즉 ‘인신’이 되려 하는 인물이다. 스타브로긴의 ‘허무의 노래’는 영원히 되풀이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젊음, 부 그리고 현세와 현재를 추구하는 한 그렇다. 이 남자는 파멸을 부르는 미를 갖추고 있다. 그는 차갑고 무심하다. 치혼의 암자에서 쓴 글을 읽어보면 세상에 대한 환상이나 인간에의 연민이라고는 없이 공허를 유영한다는 것이 무언지 알게 된다. 키릴로프는 스타브로긴에 비해 형이상학적이고 현학적이다. 자살도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하게 해낸다. 그는 자살 중독, 자살 강박에 걸려있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해내야 한다. 19세기에는 니체의 초인, 영원회귀 등을 연상시키는 사유들이 유행했던 것 같다. 키릴로프는 ‘신이 무’ 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자살을 택한다. 슬픈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자기 선택과 철학에 의해서 자발적 긍정적으로 실천한다. 특이한 사변가이자 낙천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 속 악령 들린 자들에게 철퇴를 내려 무려 14명이나 죽인다. 가히 살인의 제왕이다. 성경에 '악령이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가고 그 돼지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람대로 신을 저버린 아나키스트, 허무주의자들은 이런저런 충동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성 앙투안느의 유혹>


플로베르의 ‘성 앙투안느의 유혹’(1874). 플로베르가 프랑스 사람이니 앙투안느로 불렀고 보통은 라틴식 이름 안토니우스라고 한다. 3세기 이집트 광야의 은수사로 초기 기독교 시대 수도사의 원형이다. 플로베르는 리얼리즘 문학의 대가인데 초기에는 낭만주의적인 환상 문학에도 경도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불안한 개인을 그리고 있다는 면에서 ‘보봐리 부인’에게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플로베르는 내면으로는 성 앙투안느, 외부로는 보봐리인 셈이다. 한국어 번역본이 500여 쪽인데 사실 하룻밤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도 단지 한 명, 앙투안느이다. 나머지는 허깨비, 유령, 이단의 신들과 같은 환상이다.
소설 속 앙투안느 성자이기 전에 방황하는 인간이다. 이 책은 원래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동명의 유화 작품에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플로베르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의 시험 듦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책에는 온갖 괴물들이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소름이 끼치지만 읽다 보면 둔감해진다. 앙투안느이자, 플로베르가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지식’. 괴테의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주인공이자 작가는 세상에의 호기심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호기심, 지식에의 궁극은 어디일까. 그 허기가 공허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밤새 그를 괴롭히던 악마가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하면서 사라지는 장면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지적 호기심  역시 허영/탐욕일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성스러운 면도 있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잡아먹기도 한다.



<타이스>


1890년에 나온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는 마스네의 동명의 오페라 ‘타이스’ 중 ‘명상곡’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8~19세기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합리주의나 무신론 등이 유럽인들에게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황청은 에밀 졸라나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을 금서 목록에 추가했었는데 이들이 이미 허약해진 종교의 세속적 지위를 다시 강타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타이스’는 매우 어렵고 지루한 소설이다. 그 내용이라는 게 신성에 대한 논쟁, 초기 기독교 성인들의 금욕과 수행, 사막에 대한 끝도 없는 서술로 가득하다. ‘타이스’는 회의주의자의 작품답게 종교 혐오를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준다. 고매한 수도사가 한낱 무희에 홀려 모든 걸 포기하고 관능의 노예로 전락하는 이야기이다. 무희는 성녀가, 성인은 야수가 되는 과정을 읽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신부 세르게이>


톨스토이의 ‘신부 세르게이’라는 단편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세르게이는 순수 무결점의 신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인정과 존경을 욕망할 뿐 사실은 유혹의 대상 앞에서 무너지는 보통 사람이다. 우리를 홀리려고 드는 것들이 사방에 넘쳐흐른다. 그것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나 하면 고고한 정신세계로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우리들의 초상이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


역시 프랑스 작가인 조르주 베르나노스 ‘사탄의 태양 아래서’(1926)에서는 초현실로서가 아닌 현실 인물로서의 사탄을 만날 수 있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텔레스를 직접 조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시대 배경이 중세가 아니고 20세기라는 점. 1차 대전에 참전한 작가는 극심한 실존적 불안을 겪었으리라. 존재가 부정되는 전장에서 그의 인격이 분열된 아닐까. 베르나노스는 가톨릭 계열 작가로 분류되지만 보편 문학이 추구하는 주제를 심도 있게 전개한다.

도니상 신부는 악령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여긴다. 마을 사람들이나 가톨릭 교단도 사악한 힘 아래 움직인다. 사제 집단은 부패와 위선의 큰 축이다. 사람들은 사탄이 지배하는 태양 아래 살아간다. 도니상은 교구와 교구민으로부터 소외된 외톨이 왕따. 누가 그와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악마를 알아보는 사제는 그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신부는 악마에게 지지 않고 뻣뻣하게 서서 죽는다. 인간 영혼의 불굴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어느 군인이나 혁명가라 한들 도니상 신부의 고독과 강렬함을 따라갈 수는 없으리라. 소설은 종교의 구원에 대해 격렬하게 묻는 인물을 그린다. 로베르 브레송은 이 소설의 일부를 ‘무셰트’(1967)라는 이름으로 영화화했다.


<죽음의 한 연구>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1973)는 제목은 다들 알되,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바로 그 소설이다. 박상륭은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을까. 판소리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 대단한 만연체에 토속적 어투가 이 물씬 풍기는 글이다. 문장 부호, 특히 종결어미를 절제한다. 요즘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못해 신선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전통/토속 어휘들, 비유들이 마치 장단을 맞추어 토해내듯 쏟아진다.
주인공은 광야의 마을, 유리를 찾아간다. 이 가상공간에는 온갖 종교들이 실험되고 또 실현된다. 불교, 기독교, 밀교, 연금술, 무속신앙 등. 인물들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필요한 만큼만 등장한다. 그 두꺼운 책에서 기억할 만한 성격을 지닌 이들이 없다. 모두들 도구다. 각자 주어진 역할을 완료한 후에는 미련 없이 살해되거나 사라진다. 작가의 이념적 소산이기에 가능하다. 비평가 김현은 이 소설에서 육조 선사 혜능, 예수, 오이디푸스, 자라투스트라 등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배경은 최소화된다. 사막과 늪, 옹달샘, 읍내 정도. 나머지는 모두 삭제, 소거된다. 닫힌 공간/시간. 40일간의 판타지만 존재한다. 그곳에서의 사랑도, 삶도 사실은 죽음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다. 소설은 제목처럼 죽음 연구서. 주인공은 인간으로서 신의 경지, 즉 인신을 꿈꾼다. 인신은 살해되고 부활을 꿈꾸며 완성된다. 96년에 양윤호 감독이 박신양을 주인공으로 ‘유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도 이 계통의 걸작이다. 남형사, 민요섭, 김동욱의 이름이 생생하다. 그리고 민요섭이 쓴 액자 소설 속 인물, 아하스 페르츠도 함께. 80년대를 예고하는 소설답게 아하스 페르츠는 사람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사람의 아들은 신과 달리 지상에서 발을 붙이고 사는 자이다. 인간과 세계 구원, 사회에 대한 책임 등 해방신학의 면모가 펼쳐진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 많은 기독교 이단들의 한 갈래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민요섭은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 아하스 페르츠처럼 선악을 초월한 새로운 신을 만든다. 그러나 고뇌와 방황을 거듭하다가 다시 정통교단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작가는 교주의 이탈에 배신을 느낀 한 광신도의 살인사건을 빌어 종교, 섭리, 선과 악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 80년대를 산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고도 남을 슬프도록 아름다운 인간 예찬이 그려진다.



<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1981)은 관계를 묻는 소설이다. 에리직톤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그는 신이 신성하게 여기는 나무를 베어 저주를 받는다. 끝없는 굶주림에 빠져 딸을 팔고 돌아오면 또 팔아 허기를 달랜다. 그래도 그 주림을 그치지 못해 결국 자신을 뜯어먹으며 종말을 고한다. 작가가 에리직톤을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신과의 계층 관계 단절을 위해서다. 높은 권좌에 앉은 신을 거부한다. 많은 이들이 에리직톤과 같이 신을 수직적 위치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여기서 다른 대안적 인물을 불러내는데 그 사람이 모세. 유태인들은 수평적 관계이어야 할 이집트인들에게서 부당한 학대를 받았다. 여기서 인간들이 수평적 관계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가 바로 신이다. 이승우는 광주항쟁을 딛고 올라 선 군사정권의 와중에서 이 작품을 펴냈다. 작가는 수직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오는 폭력을 고발한다. 소설은 신의 의미를 묻는 동시에 종교인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 참여를 권고한다.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신의 개념을 생각해 보자니 에드워드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담을 다룬 ‘평행과 역설’이라는 개념이 기억난다. 신은 멜로디이자 화성이고, 평행이자 역설 아닐까.


물어도 대답 없고 기약도 없는 신비를 향해 의문을 던진 작가들의 음성을 몇몇 권 들추어 보았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은 인본주의로도 인문주의로도 번역이 된다. 작가들에 따라서 확대되고 축소되는 면은 있는데 기본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 ‘인간’을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가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그건 기성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 존재론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뇌과학, 인지과학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인간 본성의 의미는 점점 후퇴하고 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았던 심연까지도 분석하고 해명해야 할까. 만일 해야 한다면 어디까지 일지 그 마지노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



‘신의 아그네스’의 실제 수녀는 놀랍게도 무죄 판결로 석방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임신, 분만, 아기 살해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연극의 내용도 비슷한 궤적을 따라간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뜻하는 아그네스처럼 '신이 사랑한 어린양 Agnus Dei(아뉴스 데이)', 순수의 화신일까, 아니면 모두를 속인 희대의 사기꾼에, 망상증 환자인 걸까. 한마디로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연극은 밝은 곳을 향해 질문하지만 어스름한 곳에서 답한다. 과학/이성 만능주의자 리빙스턴 박사만큼이나 관객들도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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