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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12. 2021

그 이름을 위로한다

아우스터리츠


세르게이 로즈니차(1964~)의 다큐멘터리 ‘아우스터리츠’(2016)는 W.G. 제발트(1944~2001)가 쓴 동명의 책 ‘아우스터리츠’(2001)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동일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2차 대전기 유대인의 운명을 다룬다는 점은 같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다. 감독이 왜 이 다큐에 ‘아우스터리츠’라는 제목을 사용했을까. 문체가 닮았다. 두 작품 모두 매체가 허용하는 최대한 관찰자 시점을 밀고 나간다. 두 작가는 작품이나 캐릭터에 개입하지 않는다. 단지 바라본다.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경험을 겪은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는 존중의 표현일 테다.


소설 ‘아우스터리츠’는 소설일까.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제일의 요소는 서사이다. 이야깃거리가 시간과 더불어 제대로 묶여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서사성이 공중을 부유한다는 느낌이다. 작가가 드라마를 애써 방해하는 것같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소설이다. 낯선 스토리텔링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스토리라인을 따라갈 수 있다.  이 소설은 종래의 소설 어법과 사뭇 다르다. 소설의 다큐멘터리화라고나 할까.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인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 아우스터리츠의 지난 이야기를 아무 반응 없이 그저 듣는 청자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다고 부르기는 어렵다. 반면 액자 속 이야기는 기존 소설을 뛰어넘는 극적 효과로 감동을 안긴다. 아우스터리츠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여행한 독자라면 어떤 소설 속 이야기, 어떤 소설 속 주인공에게만큼이나 몰입하게 된다.


말없이 듣는 이, 그는 1967년 벨기에의 한 역에서 우연히 아우스터리츠를 만난다. 그때부터 독자는 청자 즉 내레이터를 매개로 1997년까지 아우스터리츠의 이야기를 듣는다. 청자에게는 본인의 이야기가 없다. 독자는 듣는 이가 독일인이며 까닭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나중에는 한쪽 눈을 실명할 위험에 처한다는 것 정도를 안다. 아마도 작가 제발트 본인이 아닐까 추측한다. 내레이터는 처음에는 우연히,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아우스터리츠를 만나 그의 역사를 독자에게 알린다. 내레이터는 멘트 없는 실시간 중계 방송인이다.


내레이터와 독자는 이야기 재구성의 여지가 없다. 아우스터리츠가 보고하는 말만이 독자가 얻는 정보이다. 말과 행동은 타인을 짐작하게 하는 표지이다. 현실 세계라면 마땅한 말이지만 소설에서는 반쯤만 참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소설 주인공들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조리 공개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편안하게도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볼 수 있다. 기성 소설의 독자는 주인공에 이입하기 쉬웠다. 제발트의 주인공은 그런 면에서 독립적이다. 그는 우리에게 타인이다. 그의 말만이 그의 과거, 현재를 드러낸다. 소설 속 청자는 아우스터리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메아리다. 판단하지 않고 의견도 부연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찰자 시점의 작품임에도 독자는 청자를 건너뛴 채로 아우스터리츠를 만난다. 이런 점만 익숙해진다면 이 소설이 어떤 작품 못지않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드라마로 보이기 시작한다.


제발트가 아우스터리츠를 주인공으로 삼아 말하게 하지 않고 굳이 듣는 이를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액자 속 이야기의 주인공과 듣는 이를 애써 따로 두었다. 아우스터리츠가 일인칭 시점으로 직접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방법을 피했다. 그것이 저자가 이 소설에서 취한 특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기존 소설과는 다른 의미에서 극적 효과를 취하는 셈이다. 독자들은 일인칭 고백에 익숙하다. 전통 소설의 주인공들은 나신을 드러내고 읽는 이들은 어느 정도는 관음증에 익숙하다. 독자는 타인을 잘 아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제발트는 이런 오류를 거부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엄밀히 말해서 타인은 감추어져 있다. 그가 말하는 것만을 알뿐이다. 그 외에는 암흑 속에 묻힌다. 그 묻힌 영역은 그대로 두거나 각자 짐작할 따름이다. 더군다나 아우스터리츠 같은 인물의 어둠은 쉽게 들출 수 없다. 작가는 잠겨있는 검은 부분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비극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독자는 오히려 아우스터리츠의 말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일목요연하게 정서한다면 빠져나갈 사고의 단편들이 구어체로 인해 머뭇거리고 맴돌다가, 그러나 생동감 있게 날 것 그대로 그려진다. 그는 흥분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이미 완료된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달한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인 듯이. 다음을 읽어본다면 아우스터리츠의 말하는 방식을 짐작하게 된다. 긴 인용구지만 사실 단 두 문장이다. 독자는 아우스터리츠가 입을 열 때만 서사적 흐름을 인식한다.


실제로 나는 한 번도 시계를 가진 적이 없는데, 벽시계나 자명종, 주머니 시계, 손목시계도 가져 본 적이 없어요,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시계가 내게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근본적으로 뭔가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서 시간의 권위에 항상 저항하고,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흘러가지 않아서 내가 그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과거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정확히 말해 모든 시간의 순간들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하거나 혹은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았으면, 일어난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순간에 비로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른바 시대적 사건에서 나를 배제시킨 때문일 테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계속되는 비참함과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절망적인 미래를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라고 아우스터리츠를 말했다.


아우스터리츠는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믿지 않는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 그가 바라보고 기술하는 곳, 예를 들어 안트페르펜 중앙역이나 티롤의 선제후 페르디난도가 건축한 여름별장, 프랑스 국립도서관 절대적인 위정자가 공을 들여 가꾼 곳이다. 브뤼셀법원,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도 같다. 그러나 같은 정신이 만들어낸 브렌동크요새나 러시아 요새, 테레지엔슈타트 등의 당대 기술의 최고 결정판은 고작 인류파괴로 쓰일 수용소나 고문 장소에 적합한 운명을 겪었다. 인류만의 자랑이었던 시계나 시간, 영원성, 질서/위생 강박도 나아가 생명을 파괴하고 운명을 폐허로 만드는 정신을 위해 활용된다. 아우스터리츠의 문명관은 비관적이며 허무하다.    


아우스터리츠는 체코 출신 유태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이 겪은 참혹한 일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작가들은 희생된 유태인의 운명을 테마로 다루어왔다. 유태작가들은 그들의 부모, 지인들 무엇보다 본인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왔다. 아이작 싱어, 프리모 레비, 임레 케르테즈, 조르주 페렉, 파울 첼란, 패트릭 모디아노 등은 본인이나 지인들의 경험에 근거해 작업을 해왔다. 반면 W.G. 제발트는 독일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 군인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전후 세대인 제발트는 부모 세대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기억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독일을 떠나 스위스나 영국을 떠돈 이유도 죄의식에 근거했으리라. 작가는 집단 망각에 빠지고 싶은 이들에게 아우스터리츠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이 작품처럼 독일인이 유대인을 인터뷰하듯 쓴 소설은 드물지 않을까. 독일인 작가는 유대인 관련 다양하고 희귀한 자료들을 한데 모았다. 그 자료를 아우스터리츠의 여행과 기억에 녹여냈다. 그래서 작품은 소설인 동시에 다큐멘터리로서 기능한다. 픽션과 팩트의 경계선에 서 있으나 어느 쪽이든 풍요롭다. 아름다우면서도 신비하고 고통스럽도록 사실적이다.


두 사람은 처음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만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우스터리츠는 그 후로도 프라하, 테레지엔스타트, 리버풀, 파리를 거치며 자신과 부모의 잃어버린 인생을 보고해가며 완성한다. 아우스터리츠는 건축을 전공한 학자다. 그의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어느 순간 시간을 해체한다. 아우스터리츠처럼 과거가 없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대신 공간이 지워진 시간을 기억한다. 중앙역 대합실, 건축물, 수집품들, 도서관, 무덤들은 사람들의 집단 기억, 부모의 추억, 소년의 과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이 건축 전공 학자인 이유이다. 그는 공간을 탐색한다. 시간을 담고 누적해온 오래된 장소, 누군가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오랜 터전.


아우스터리츠는 희미한 기록을 추적해 자신이 킨더트랜스포트 조치, 즉 유대인 어린이 구조 프로그램으로 프라하에서 영국으로 보내진 1만 명 중 하나임을 알게 된다.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들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이 계획에 동의했고 기차에 태워진 아이들은 영국인 부모들에게 강제 입양된다. 그는 어린 시절의 보모로부터 자신이 프라하 출신이며 모친은 오페라 가수, 부친은 정치가 후보생이었음을 듣는다. 이 도시, 저 도시 헤매던 아우스터리츠는 드디어 자기 부모의 운명을 알게 된다. 어떤 공간에서 딱 멈추어 선 그들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다. 모친은 테레지엔스타트 게토에서 머물다가 수용소로 보내져 사망했다는 것, 아버지는 발터 벤야민처럼 파리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피하던 중 실종되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이야기들은 증명서로, 신문, 잡지, 사진 등의 역사적 기록으로 제시된다.


소설 ‘아우스터리츠’에는 특이하게도 작가가 고른 여러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텍스트에 대한 보충일까, 아니면 이 사진들 자체가 글로는 다하지 못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걸까. 사진들은 정서적인 울림을 준다. 어린 아우스터리츠의 사진이 특히 인상적이다. 팔에 깁스를 한 채 가장무도회 복장을 한 아이가 풀밭을 배경으로 섰다. 가상공간에 홀로 머무는 어린 왕자 같은 쓸쓸한 분위기는 아이의 앞날을 예고한다. 옛 테레지엔스타트 수용소 부근의 황폐한 덤불, 관목, 버려진 건물 사진들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 그들의 운명이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글의 앞머리에서 소개한 로즈니차 감독의 영화는 소설 ‘아우스터리츠’를 영화화한 건 아니다. 이 감독의 다큐는 대부분 설명을 제한한다고 한다. 관객 스스로 감독이 이끄는 대로 느껴야 한다. 이 면에서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식 서술 방식을 닮았다. 로즈니차 감독이 영화 제목을 ‘아우스터리츠’라고 붙인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그의 카메라는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관광객들이 들어서는 입구로부터 다시 그 자리 출구까지 한 바퀴를 돌아본다. 굳이 꼽자면 카메라의 시선을 주인공으로 봐도 되겠다. 카메라는 복잡한 앵글로 관광객들의 행위를 논하고 평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수용소의 어느 부분에서도 관객을 심리적으로 꿈틀거리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2차 대전기의 수용소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한 바퀴 돌면서 취하는 행위를 관찰할 뿐이다. 소설 화자가 아우스터리츠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나 비슷한 기법이다. 소설은 말을, 영화는 카메라라는 본질에 충실하다. 이런 면에서 로즈니차 감독은 제발트와 비슷하다.


영화는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수용소 입구의 독일어 문구를 오래 비춘다. 여름날 가족들, 친구들과 관광에 나선 사람들은 웃고, 이야기하거나 무언가를 먹는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단체 사진, 셀카를 찍고 음료를 마시거나 끊임없이 전화를 해댄다. 사람들이 넘친다. 지나치게 많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여름을 택했을 것이다. 경건은커녕 불경의 계절이므로. 감독은 희생자들의 장소에서도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일단의 관광객을 관찰한다. 그들은 노동과 관계없이 소비한다. 시간이 넘쳐나고 마음껏 무위를 발산한다. 노출의 계절에 몸도 편하게 드러낸다. 이런 장소에서라면 드러나야 할 엄숙한 태도, 표정은 없다. 사람들은 무질서하고 시끄러우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오래된 수용소를 관광하고 소비한다.


로즈니차 감독의 다큐 ‘아우스터리츠’는 제발트식 어법이다. 제발트는 전통적 소설의 서술법과는 다르지만 인물이나 사건을 빈틈없이 풍부하게 드러낸다.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스토리를 작품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을 확인한다. 작가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제발트의 작품은 허구이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들’처럼 진실을 드러낸다. 목소리는 글보다 1차적이고 직설적이다. 전략이 덜하고 즉흥에 가깝다. 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2차대전 유대인 포로수용소의 생존자, 증인들의 인터뷰만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쇼아'(1985)가 그 어떤 기록물, 창작물보다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말과 글 그리고 그들이 품은 진정성/진실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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