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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13. 2021

상대성이라는 거


세상은 꾸준히 상대성을 얻어간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갑옷을 하나하나 벗어왔다. 그 무겁고 답답하고 또 장엄한 의상을.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져 왔으나 이탈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면서 점차 가속화한다. 이제 몸은 아주 가볍다. 속옷 한 장 걸친 사람들. 나비같이 얇은 의상을 걸친 사람들이 자유롭다. 어떤 이들은 그마저 벗어 보인다. 벌거벗었다.

벌거벗은 자들에게는 규범이 없다. 자유롭다. 거칠 것이 없다. 벌거벗은 곳. 명령도 질서도 없는 곳. 자유, 어쩌면 방종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명령으로 살게 되었다. 자율적 입법자들이다. 수 십억의 사람들이 각자의 의회에서 자신의 법을 스스로 입안, 제출하고 통과시킨다. 각자의 법만이 자신을 제어한다.

절대주의, 전체주의 세계에서 살고 싶은 이는 없다. 그곳에서는 권력자도 체제의 한 구성원이다. 그는 그 세계에서 필요한 인물이고 역할이 있으며 맡겨진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그에게도 마음대로 생각할 권리, 행위할 권리가 없다. 자기 뜻대로 하는 순간 체제는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황금가지'에 의하면 고대 로마의 늙고 무능한 왕은 제도적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균열은 전체를 조각낼 수 있다.

최고 권력자도 이런데 그곳에 사는 일반인들은 어떠할까. 개미 나라의 일개미, 병정개미는 인식이나 없지,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고 각자의 선호, 가치관, 세계관이 있다. 아무리 빈틈없는 사회의 미미한 존재라고 해도 견디기 힘들다.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나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처럼 세뇌되어 기계 수준에 이른다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는 인간에게 ‘한 사람’ 특유의 의식이 있음을 최초로 드러낸다. 아르카익 스마일이 출현한다. 경직된 온몸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한 은근한 미소. 인간에게는 얼굴이 있고 그 얼굴들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 다른 고대 제국에게서는 안 보였던 그 웃음. 완고한 결정 같은 고요와 평안을 깨는 얼굴.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감정은 그/그녀를 그/그녀답게 한다. 남과 나를 구별한다.

이 시대는 ‘왜’라고 질문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하늘, 땅, 별을 바라보며 환원주의적 설명을 요구했다. 이들은 물질의 기본이 물이다. 불이다. 수이다, 수풍화토다, 원자다 라며 제각기 다른 주장을 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이 늘 변화한다고 한다.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이 전혀 움직이지 않은데 감각의 속임수 탓으로 그렇게 느낀다는 해괴한 의견을 내세우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 대 파르메니데스, 진보 대 보수. 개발 대 보전 그리 상대 대 절대.

대표적인 상대주의자들인 소피스트들은 절대 가치를 믿지 않았다. 가변적인 인간의 감각/경험으로 판단한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고르기아스는 ‘진리는 없다. 있다 해도 알 수 없다. 안다 해도 전할 수 없다’고 했다. 생성-소멸-변화-다수의 논리가 시작된다. 지금/여기에 데려다 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주관주의의 총화라 할 만하다.

상대적 가치관은 헬레니즘 시대에 융성한다. 그리스 본토는 수많은 회의주의의 아성이 된다. 그러나 곧이어 등장한 로마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에 길을 내주면서 정신세계는 확산에서 수렴으로 역 진행한다. 무려 천 년이나!

회의주의, 상대주의 등은 중세 말기에 이르면서 당시의 사회적, 미적 세계관과 결합하여 다시 등장한다. 르네상스 초기에 등장한 원근법은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상징이다. 관점/가치관의 존재를 승인한 것이다. 중세 그림에는 관객의 눈이 없다. 회화 속 주인공들은 좌표 없는 공중을 유영한다. 그들이 관객을 바라본다. 반면 원근법은 한 화면에 하나의 관점을 부여한다. 관객이 시점이다. 그림의 인물들은 관객에 의해 대상화되고 변모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시간이 가면서 철석같이 믿어 마지않았던 유일무이한 그 진리도 다초점적 가치에 길을 내주리라는 걸.

상대주의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미 유명론에 익숙한 데다가 과학/기술/산업의 발달을 경험한 중산층에게는 시민의식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는 귀족 나리에게 ‘다양한 특권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나? 태어나는 수고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비꼰다.  ‘시민’은 타고나지 않았다. 스스로 만들어간다. 빈 서판에 늘 무언가를 쓰고 고치는 이들이다. 본유 관념을 부정한다. 해석하는 신인류가 집단적으로 출현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스티어포스

사람들은 족쇄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지만 어느 순간에는 마리오네트가 되고도 싶다. 디킨스의 걸작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나오는 매혹적인 바람둥이 스티어포스를 소개한다. 그는 회의주의자의 전형이다. 귀족 집안의 부유한 상속인이지만 허무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는 우수에 차서 불꽃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대로 불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이다. 세상이 끝없이 바뀐다는 건 지켜야 할 본체가 없다는 뜻이다. 불꽃은 에너지, 운동, 생성을 상징한다. 이것이 세상이고 시간이고 결국 허무 그리고 꿈이다. 스티어포스는 이런 점을 직시한다. 아무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다면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한다. 19 세기 다른 작가들처럼 디킨스도 부르주아의 상대주의, 회의주의, 허무를 읽는다.


자기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이들은 악마가 되기 쉽다. 도를 닦은 철인들은 신과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그 안에서 자족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교만함을 휘두르면서도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 그들은 자유롭고 또 불안하다. 실존과 관계와의 저울질이 어렵다. 아르카익 스마일 이전 시대의 원리가 지금도 통용된다면 끝없이 선택하는 삶은 주어지지 않으리라. 불안은 특이한 인물들의 희귀병으로만 남았을 터인데.


<콜래트럴>의 빈센트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 Collatraral’(2004)에서는 톰 크루즈가 오랜만에 악역 빈센트를 맡았다. 살인청부업자, 그에게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먼지 같아서 언제 어떻게 사라지든 우주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의 소유자다. 누구든, 아무든 해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에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누구의 죽음이든 그럴 법한 일이고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다들 하찮은 존재이므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 자기에게만은 특수한 가치를 부여하지만 이 악마는 자신에게조차 객관적 대상이다.



<착한 여신들>의 아우에


‘착한 여신들’(2006)은 조나탕 리텔의 소설이다. 겉으로는 규율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주인공 막시밀리언 아우에. 이 인물은 독일•프랑스 혼혈에다가 알자스 지역 출신이어서 프랑스인이 될 수 있었음에도 독일인, 나치 당원 그리고 친위 대원의 길을 선택한다. 선택의 결과, 부모, 절친, 저항하지 못하는 포로들도 함부로 죽이는 광인이 된다. 순간순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택하고 편리하게 판단한다. 이 남자는 논변가이자 뛰어난 학자다. 사색적인 낭만주의자이며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아우에로 하여금 어느 쪽에 서야 한다고 지시하는 손은 없었다. 모든 만행은 그의 자아, 자기의식의 결과이다. 이 인물의 행동 방향을 보고 있자면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고작 여기까지인가 의심하게 된다. 우리의 판단이라는 건 한낱 자기중심적이고 불합리하며 모순적이다. 그리스 신화의 ‘착한 여신들’은 본래 ‘분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이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는 역을 맡았다. 오레스테스 신화 이후로 운명의 여신들은 ‘분노’보다는 ‘자비’의 가치를 택한 것 같다. 아우에 같은 자가 천수를 누리는 걸 보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역할은 휴브리스 hubris에 대한 상기라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오만에는 처벌이 뒤따른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은 찰나적 존재다. 큰 그림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걸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재앙이 뒤따른다. 에리직톤, 니오베, 아라크네, 카시오페이아, 마르시아스, 파이톤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인물들은 모두 불경을 범한 죄로 비참하게 추락한다. 인간 인식 범위는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넓지만 이를 막는 손이 필요하다는 걸 신화로 경고한다.

오만 덩어리로 에리직톤를 꼽고 싶다. 그는 신이 금하는 금기를 범한 후, 갈구병에 시달리게 된다. 먹고 먹고 또 먹어 자기 몸까지 잡아먹었다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갈구병이란 건 끝없이 알려고 하는 인간의 탐구욕을 의미한다. 에리직톤은 세상 이치를 다 알아야겠다며 헤매고 다닌 파우스트와 비슷하다. 갈증은 끝이 없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텔레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알려고 애쓰고 끝없이 노력하고 배우는 그는 불행하다. ‘노력하는 자는 끝없이 헤맨다’고 했던가. 에리직톤과 파우스트는 갈증과 갈망의 상징이다. 그것은 휴브리스이며 대가는 파멸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반항아이다. 안티고네이다. 그렇게 태어났다. 사람들이 변화, 성장 그리고 진보를 당연시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함, 순진함은 의무이기도 하다. 삶을 사는 건 하루하루 모험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쉽지 않다. 결국 과거의 우리가 살았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비슷한 길을 가겠지. 그리고 후대의 또 다른 우리도 비슷한 길을 가겠지. 그들도 우리처럼 복종과 휴브리스를 거듭하며 인생극장을 지나갈 것이다. 반복이 아닌 ‘처음’ 있는 사건인 양. 자신의 행위가 자유이고 선택인 양.

‘깨달은 이’는 번잡한 사바세계에 다시 출현하지 않을 ‘도’를 안다고 한다. 적멸에 이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거대한 영혼 풀의 재원이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재출현할 배우들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뽑혀 나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 소울 Soul>의 영혼22


픽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소울 Soul’(2020)의 영혼 22라는 인물. 살아봐야 뻔하다며 지상으로의 환생을 수 천 년 동안이나 유예했던 그 녀석. 이제 그 인력 풀을 벗어나 지구에 던져졌다. 다른 이들처럼 피투자로.


영혼 번호 22, 바위로 환생하는 건 어떨까? 감정도 인식도 없이 그저 공간에 있는 존재로. 설령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한들 어떠하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강철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돌덩이는 상대주의 따위 거부한다. 그 존재 그대로 거기 꼼짝없이 앉아 있으니.


체포당할 것인가, 방면될 것인가. 니체식 '명랑한 허무주의'에 마음이 끌린다. ‘삶의 목적’이라는 거창한 말은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형이상학적 궤변이 아닐까. 거대 담론은 희미해졌다. 대신 우리는 음악을 듣고 피자나 커피도 즐긴다. 봄밤에 핀 흰 꽃에 감탄하고 청명한 가을날에는 너울너울 춤추는 낙엽에 눈물짓는다. 작은 것들을 소중하게 사랑한다. 그것만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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