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림 Dec 17. 2021

노는 여자

‘오하루의 일생’(1952), ‘비브르 사 비’(1962) ‘세브린느’(1967), ‘별들의 고향’(1974), '파리,텍사스'(1984),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1989), ‘엑조티카’(1994),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1995), ‘노는 계집 창'(1997),  '나쁜 남자’(2002), ‘무뢰한’(2014), ‘죽여주는 여자’(2016) 등을 감명 깊게 보았다. 모두 노는 여자들이 나온다. 원래 ‘논다’는 건 '재미있는 일로 즐겁게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길을 잘못 들었다는 의미로 써 보았다. 위의 영화들은 정상 노선이 아닌 탈선한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적어도 즐거워서 노는 여자들은 아니다.

 

지배계층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이용한다. 그 이념 안에서만 한 축 끼고 챙길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런 추상적인 울타리들이 없다면 자기들도 한낱 장삼이사로 전락할 테다. 전심전력해서 자기들의 철학을 보급하고 유지해야 한다. 과거의 지배 이념들은 여자들을 이류 혹은 아류에 위치시켰다. 남자와 거의 동수의 여자들이 살아왔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가 아는 여자들의 이름은 많지 않다. 유명한 사람들은 죄다 남자다. 똑똑한 여자들이 분명 많았을 텐데 이상도 하다. 1971년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라는 에세이에서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질문을 던졌다. 적어도 표면적인 역사에서 여자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도 여성 예술가들이라면 생각나는 이들이 적다. 기상이 높고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했던 이들이 자신의 시대와 잘 맞았을 리 없다. 사대부 집안이라면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이 떠오른다. 신사임당은 예나 지금이나 현모양처의 스타급 모델이다.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먼저이고 학문이나 작품은 그 다음이다. 만일 예술 활동을 앞에 두었더라면 후대는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들도 매장되었거나 작가 미상으로 흘러 다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도 들여다보면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친정이 부유하고 힘이 있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돈도 있고 집안도 있는 알파우먼이라 할까.


반면 허난설헌은 시댁이나 남편과의 불화, 친정의 몰락 등을 겪으며 27세에 생을 마감한다. 당시에도 이름난 시인이었다고 하는데 뜻을 제대로 못 편 불우한 여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진이, 홍랑, 매창, 추향 등은 기생들이다. 만일 그녀들이 여염집 출신이었다면 예술가로서 영원한 이름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탈적인 사랑, 이별과 관련된 감성을 표현한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로는 어려웠고 특히 보통 여자들에게는 금기였을 테다. 근대 작가들인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 강경애 등도 예술가라기보다는 여자라는 멍에에 짓눌렸다. 그녀들은 참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한 여인이 여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기소당한다.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본명보다는 ‘두꺼비’라는 뜻의 프리네로 알려진 여성이다. 두꺼비 같은 미녀라니 어불성설이다. 여자들의 지위는 보잘것없어서 우리가 아는 시민이란 남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법안의 평등’을 의미하는 이소노미아isonomia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여자들은 시민이 아니었으므로 법의 평등정신을 누릴 수 없었다. 헤타이라는 보통 수준 이상의 창녀 그룹이다. 이들은 교양 있는 남자들과 정신적 교류를 다고 한다. 미모를 겸한 여성 지식인인 셈이다. 프리네가 기소되었다고 해서 배심원들이 모였다. 그동안 그녀는 예술가들을 위한 여신의 모델이 되어 왔으니 감히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워야 여신을 가시화시킬 수 있을까. 프리네는 대단한 미모와 아름다운 몸을 갖추었음은  분명하다. 배심원들이 그녀를 무죄 방면시켰음이 증거다. 화가들은 배심원들 앞에 벌거벗은 프리네를 세움으로써 관객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켰음은 물론이다.      




          < José Frappa, Phryne(1904) >



19세기 소설에는 프리네와 같은 고급 창부들이 자주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헤타이라는 코르티잔이라는 프랑스 여자들로 대체된다. 우리로 말하자면 일패 기생 정도. 20세기 초까지도 세상은 신분 질서가 확고해 계층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다. 부유층, 상류층이 뚜렷하게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부류의 여성들이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아내들이나 딸들과는 연애 놀음에는 한계가 있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은 상류층 여자들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의 비련을 다룬다. 작품 속의 줄리앙 소렐은 처형을 당하고 프레데릭 모로는 무기력에 빠져 스스로 고사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백치’에는 이와 반대로 여자가 좌절한다. 상류층 남자의 정부였던 나스타샤는 그와의 결혼을 꿈꾸자마자 철저하게 버려진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 그래서 일부 남자들은 공공연하고 노골적이며 쉽게 교체/제거 가능한 관계를 꿈꾼다. 그게 편리하고 또 편안하다. 코르티잔은 이런 시대의 유물이다. 교양과 미모를 돈과 맞바꿔 남자의 정부가 되는 여자들. 그런 신분이 가능했던 사회라니.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원작 ‘동백꽃 아가씨 The Lady with the Camellias’(1852)를 원작으로 한다. 오페라로 보면 지고지순한 사랑에의 찬가로 보인다. 이 오페라가 아직 인기를 얻는 이유는 순애보적 사랑에의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동백꽃 아가씨(오페라의 비올레타/소설의 마르그리트)는 상류층 고객을 위한 매춘부 마리 듀플레시스를 모델로 한다. 동백꽃 아가씨라는 별칭은 그녀가 꽂았다는 흰 동백꽃/붉은 동백꽃에서 유래하는데 잠자리가 가능한 날과 불가능한 날을 알려주는 의미라 한다. 참 노골적인 데다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는 영어로 The Fallen Woman 즉, 타락한 여성을 의미한다. 오페라의 1막, 2막의 2장은 당시 프랑스 상류계급의 파티 장면이 화려하게 묘사되는데 노름, 결투, 음주, 애인, 포주 등이 등장해 난잡하고 타락한 사교계를 짐작하게 한다. 작품은 뒤마 피스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 이름난 화류계 여성을 사랑했는데 그녀의 병과 죽음을 겪으면서 개인적 고통과 사회적 편견 등을 소설에 표현하려 했다.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1837~1843)에 나온 코랄리는 허황된 미남자를 만나 인생을 소비한 케이스이다. 그녀는 기둥서방 격인 그 남자, 루시앙에게 자신의 장례비까지도 다 털린 채로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이 소설의 2부격인 ‘창녀의 영광과 비참’(1838~1847)에서도 에스터라는 코르티잔이 등장해 루시앙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자살하는 역을 맡는다.


일본 근대소설에도 게이샤가 자주 나온다. 시카 나오야의 ‘암야행로’(1921)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1948),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는 까칠하고 예민한 지식인 남자들이 이 여인들과 벌이는 일탈이 그려진다. 남성 작가들이 쓴 소설에 등장하는 '노는 여자’는 젊은 시절 잠시 꽃이 되었다가 버려지는 애잔한 인생들이다.       

           

에밀 졸라의 ‘나나’(1880)는 프랑스 제2제정 시기를 살았던 한 창부에 관한 기록이다. ‘나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1877)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생긴 여자인데 이렇게도 많은 남자들을 몰고 다닐까 궁금했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중년의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금발의 여자가 화면 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그림 속 남자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었으리라. 속옷  차림의 나나는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한다. 붉은 입술, 귀고리와 팔찌, 집안 장식까지 나나이기에 가능한 관능을 발산한다. 마네와 졸라가 마음먹고 그려낸 최고의 팜 파탈이다. 남자들을 잡아먹고 자신까지도 파멸시키는 독소. 나나는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딸이다. 제르베즈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그녀 역시 가난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알코올 중독자로 사망한 여인이다.   


   


       < Édouard Manet, Nana(1877) >



이 집안의 유전 계보를 통해 추적해 본 나나의 인생 역시 잘 풀릴 리 없다. 어린 시절부터 매춘부 기질이 다분했던 그녀는 성장하여 세상 남자들이 꿈꾸는 비너스가 된다. 그녀의 스트립쇼를 본 남자들은 장인과 사위, 형과 아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욕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나는 동성애, 사도 마조히즘 등에도 탐닉하는 무한대 성욕자다. 그녀에게 남자들이란 돈이나 보석, 온갖 선물을 보내는 수단이다. 집착의 늪에 빠진 남자들에게 남은 건 투옥, 파산, 자살 등이다. 물론 나나 자신도 천벌을 받아 죽는다. 사생아 아들에 이어 본인도 천연두에 걸려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그녀의 사체를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만큼 생생하다. 가짜 비너스의 말로다.   

 

화류계 여성이 모두 비참하게 몰락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질투와 애욕의 소용돌이 속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린 이들도 있으니까. 상황을 자기편으로 이끌 줄 아는 책략가들은 여기에서도 빛을 발휘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남자 머리 위에 앉아 그들의 에로틱한 환상을 이용하고 스스로의 욕망도 제어하는 사람들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는 자기 욕구에도 충실하고 상황도 저울질할 줄 아는 영리한 여성이 등장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 중 ‘스완의 사랑’을 보면 남녀간 감정 줄다리기의 결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스완은 상층 부르주아로서 대단한 교양을 갖춘 사교계의 총아이다. 그는 귀족이나 명망가들이 모이는 핵심 사교 서클에서도 권위있는 딜레탕트의 역할을 해왔다. 이 고상하고 진지한 남자가 오데트라는 고급 창부에 빠진다. 그녀가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인을 닮았다고 느낀다. 만일 그녀와 이루어진다면 인너 서클로부터 추방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 중독된 남자는 그 외의 일을 용의주도하게 고려할 수 없다. 그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오직 한 여자만 바라본다. 에로스가 그의 감각을 채워 일상이 불가능하다. 심리적인 면에서 스완은 오데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녀는 결혼을 통한 상류층에의 입성이 애초에 불가능한 신분이다. 그런 그녀가 상대를 이용하고 악용해 진을 빼고 녹다운을 시킨 후에야 결혼을 허락한다. 오데트는 신분 세탁 후 세련된 상류층 부인으로서 파리 사교계를 리드한다. 계산에 능한 여자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계층을 이동하는 이는 드물다. 전략을 세워 움직이는 이와 그저 감성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는 삶의 궤적이 다르다.          


보통 여자들이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접근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상속을 받지 못했기에 돈은 생존권이나 마찬가지다. 자와의 결혼 외에는 신분 상승의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옛 소설에 사랑보다는 타산적인 계산이 많은 것이다.     


이 와중에도 사랑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기하나보다. 현진건의 ‘그리운 흘긴 눈’(1924)을 읽어 보았다. 채선이라는 기생은 팜 파탈이 아니다. 돈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한 철부지 소녀일 뿐. 그녀는 십여 년 전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사랑이 뭔지, 인간성이란 게 뭔지 알아채기 시작한다.      


‘그리운 흘긴 눈’채선은 19세에 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한다. 당분간 편안하게 살 수 있기에 응한 거지 대단한 의미를 두어서도 아니다. 스스로를 노는 여자로 규정하고 있으니 동거 방식은 자연 흥청망청이다. 남자는 돈이 떨어지면 부모에게 청하거나 빚을 진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면초가에 빠진다. 그는 죽기로 작정하고 채선과 아편을 한 알씩 나눠 먹는다. 동반자살에 감동한 남자는 죽기 직전 그녀나마 살리려고 억지로 약을 뱉게 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약을 삼키지 않고 혀 밑에 감춘 걸 알게 된다. 남자는 죽어가면서 가장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과거를 상기한다. 자살방조가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남자의 흘기는 눈만은 아직 그립다. 인생에서 가장 진실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의 백화를 기억한다. 뜨내기 남자와 각자의 삼포로 향하던 그녀, 겨우 스물 둘에 과잉 자기방어로 겉늙어 가던 백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남자들과 헤어져 고향행 기차를 탔었지. '삼포 가는 길'은 이만희 감독이 1975년 만든 동명의 영화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 속 백화로는 문숙이 출연했었다. 장률 감독의 ‘군산:거위를 노래하다’(2018)에서 늙은 백화를 다시 만났다. 백화는 삼포 같은 곳 어딘가에 정착했으리라. 이제는 나이 들어 더 이상 욕망할 것도 다칠 것도 없는 초연한 노인이다. 한 세상 살아 늙수그레한 할머니가 되었다.       


매춘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한다. 인류가 그만큼 본능에 충실했음을 증거 한다. 그 와중에 삶에 지친 남자들이 때로는 심심풀이로 때로는 예술 동지로 이 여인들을 상대해왔다. 아무리 재능이 풍부하더라도 힘과 본능이 주류인 곳에서는 뜻을 펼치기 어렵다. 누구든 시혜의 대상일 필요는 없다. 단지 존재하기에 인정받아야 한다. 약육강식 시대에먹고살기 위해 이런 일을 택한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충실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삶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지속된다.  

작가의 이전글 상대성이라는 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