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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24. 2021

데우스 엑스 마키나

오이디푸스, 엘르


성공한 사람들은 자긍심에 차 있을지 궁금하다. 삶이 지나치게 짧다는 점을 제외하고 비극 요소가 없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자신감 넘치는 이들이 많지는 않으리라. 대부분은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There is a skeleton in every closet.’이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감추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 있는 그것. 치명적인 것. 자의든, 타의든 주어진 것. 이것들을 극복해보고 싶어서 우리는 안간힘을 쓴다. 이겨낼 수 있을까?

그리스 비극을 읽어보면 예전 사람들도 각자의 결함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흠, 뭐가 하나 짚이는 게 있는데 그게 뭘까?’ 애를 써 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신탁을 받아본다. ‘너는 오만하다. 벌을 받아서 씻어야 한다.’ 이런 점괘가 나오면 인정해야 한다. 그래, 내 탓이요,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네 조상이 갚지 못한 죄가 아직 남아있다’ 거나 ‘너는 일부러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실수를 지지른 적이 있다.’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아닌 조상의 죄, 고의로 저지르지 않은 실수 이런 일로도 무참하게 벌을 받아야 할까. 고대 그리스 비극은 그렇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사람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를 저질러야만 했을까. 우리는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했음을 안다. 오이디푸스가 끝내 그 일을 밝혀내자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했고 본인도 바늘로 눈을 찔러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었다. 그뿐이랴. 그의 아들들은 권력을 다투다가 공멸했고 딸 안티고네는 지하 감옥에서 죽었다. 그녀의 애인과 애인의 모친 역시 절망으로 자살했다.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이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걸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AD 8) 오이디푸스의 가계도가 나온다. 그의 고조부는 카드모스인데 페니키아의 출신으로 테베의 왕이 된 인물이다. 그는 신성한 물을 얻기 위해 샘을 지키는 용을 죽인다. 그게 죄였던 걸까. 그의 자식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미치게 된다. 슬픔에 지친 카드모스 부부는 차라리 땅을 마주보고 기는 뱀이 되길 자청한다. 그러나 그 씻김도 부족했는지 저주는 몇 대를 이어 오이디푸스네 가족까지 도륙한 후에야 멈춘다.

폴 버호벤의 ‘엘르’(2016)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의 냄새가 물씬한 영화다. 이 감독은 내면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들추는데 일가견이 있다. 탐닉과 집착을 꿰뚫어 보려 하기에  불편하고 힘이 든다. 어둠을 어둠으로 남겨두면 좋겠지만 감독은 그것을 꺼내 공개하려 한다. 흠, 그게 인간이다. 우리는 호기심이 있다. 해결도 하고 싶다.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 같은 고대 비극 작가나 우리의 막장 드라마 작가들은 굳이 ‘깊이 감춰진 해골’을 꺼내 흔들어 댄다.

‘엘르’는 한 여성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는 캐릭터 중심 영화다. 미셸은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어린 시절이 있다. 그 과거가 현재의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덕분에 미셸의 세계관은 밝지 않다. 냉소적이면서 뒤틀어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이다. 그는 자기 동네 사람들 27명을 연쇄 살인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죽인 다음 자기 집까지 방화하려 기도했다. 어린 딸은 아빠가 시키는 대로 집을 불 지르는 데에 일조했다. 덕분에 미셸은 ‘애쉬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39년째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미셸의 주위 사람들은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보기 어렵다. ‘정상적이란 건 뭐지?’라고 묻는다면 답변하기 어렵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도덕과 관습을 익히고 부르주아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거칠게 말해보련다.

물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렇게 공식적이지 못하다. 미셸의 아버지처럼 머릿속을 끔찍한 상상으로 가득 채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이도 있긴 하니까. 그녀의 모친은 남편이 그 일로 수감된 후, 40여 년을 홀로 지내는 슬픈 아내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녀는 여러 차례 젊은 애인들을 바꿔 대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도 수 십 년 연하의 남자와 결혼까지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미셸에게는 리처드라는 전 남편이 있다. 그와는 구타 문제로 이혼했다고 한다. 리처드도 장모와 마찬가지로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는 여성 편력으로 불안한 삶을 산다. 그들의 아들 벵상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먹고 살길이 요원하다.미셸은 단짝 안나의 남편인 로버트와 불륜 행각을 벌인다. 관계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었지만 이 남자를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그녀와 그 주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세상은 단정하고 말끔하지 않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없다. 고개를 들고 자유롭게 살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의 행동, 사고방식, 욕망 등이 미로처럼 엉켜 헤쳐 나가기 어렵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한 사람이 하나 더 남았으니 미셸의 앞집에 사는 유부남 패트릭이다. 겉으로는 멀쩡한 은행가이다. 아름답고 신앙심 돈독한 아내가 엄연히 있지만 남편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패트릭의 머릿속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 어쩌면 의학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사디즘 환자일 것이다. 학대하지 않으면 성적으로 흥분하지 못한다. 여자가 거칠게 저항하다 죽어갈 듯이 울부짖어야 흥분한다. 그에게도 어떤 이유, 어떤 어두운 사연이 있을까. 그는 누구의, 무엇의 결론일까?





미셸은 강간을 당한다. 그녀는 그 강간범이 친절한 앞집 남자 패트릭이란 걸 알게 된다. 그런데도 그 남자를 고발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범인과 공유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범인 vs 피해자’가 아니고 ‘사디스트 vs 마조히스트’로서 파트너십을 유지한다. 왜? 아마도 그녀의 과거가 지금을 계획하고 지배하기 때문이다. 애쉬걸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가치를 배우지 못했다. 현재는 과거의 답일 테다.

영화는 이 특이한 캐릭터 엘르의 삶이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No. 천우신조여야만 한다. 일단 연하남과 살던 미셸의 엄마가 죽는다. 그다음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목을 매달아 죽는다. 전 남편, 리처드는 시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아들은 동거녀와 잘해보려 노력한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 로버트는 차 버렸일이 잘 되려는지 패트릭까지 죽는다. 패트릭이 미셸을 또 한 차례 성폭행하려는 순간 아들 뱅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제 그녀 주위에는 괴롭히는 이들이 없다. 모두 사라졌다.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시계는 수 십 년 만에 제 시간을 찾았다. 제 자리에서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셸을 둘러싸고 있던 그 복잡다단한 실 꾸러미는 툭툭 끊어졌다. 그 끊어진 실을 연결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이제 명료하게, 뚜렷하게 보인다. 그녀는 똑바로 걸어갈 수 있다. 미셸 앞에 펼쳐질 나날은 평화롭다.

한 인생이 제자리를 잡는데 길고 긴 세월이 필요했다. 들추어보니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단정하거나 단순하지는 않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 욕구, 탐욕, 갈망이 뭉치고 뭉치면 때로 혼탁해진다. 심지어 부모, 부모의 부모가 저지른 일도 몇 대를 거쳐 와서 일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든다. 실타래가 엉켜서 풀어낼 길이 없다. 과감하게 가위로 자른다. 풀기보다는 뭉텅뭉텅 잘라내니 그 답이 보인다.

누가 자를 수 있나. 사람의 힘으로는 실을 풀거나 끊어낼 수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신의 힘으로 사태를 일단락 짓고자 했다. 메데이아는 남편 이아손에게 헌신해왔다. 그런데 그 남편이 코린토스의 공주와 바람이 나 결혼까지 하려 한다. 그녀는 이아손을 단죄하기 위해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살해한다. 코린토스의 위정자들이 살인마 여인을 조용히 놓아줄 리 없다. 그러나 일을 마친 메데이아는 새 애인이 사는 아테네로 무사히 날아간다. 할아버지 헬리오스 신에게서 빌린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탈출한 것이다. 이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라고 한다. 신이 아니면 풀기 어려운 국면이다. 연극에서 신의 힘을 나타내기 위해 크레인 같은 기계장치로 인물을 구하는 방법이다. 문제를 차례차례 해결할 수 없으므로 주인공만 단번에 구해 상황을 정리하는 방식이다. 고대 작가는 인간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기에 신이든, 기계이든 초월적인 힘을 빌었다.

자극적인 본능에의 추구, 음침한 상상력으로 시작한 영화는 신비적 색채를 띠며 마무리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비합리, 무논리적 전개다. 감독은 세상 사람들의 도덕이나 윤리관을 뒤엎으려는 지하세계의 마수를 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교훈적이다. 우리의 삶이 당대로 끝나지 않는다한다. 내가 과거를 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결과이듯이 나는 또 후배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오류 없이, 교만함 없이 산다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 아주 어려운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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