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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26. 2021

단 한 사람

커슨 매컬러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언더스터디

 


삶을 길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길은 화창하지만은 않다. 심지어 완주해봐야 도착하는 곳은 심연의 세계이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곳을 향해 걸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동무가 그나마 위안이 된다. 단지 한 사람이라도 동행할 이가 있다면 잠시나마 기쁘다. 아니, 존재의 이유가 될 때도 있다. 그 한 사람을 못 찾아서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 한 사람’을 다룬 영화/소설 중에는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 늘 앞자리에 있었다. 오래전 로버트 밀러 감독의 영화(1968)로 먼저 보았다. 흑백 TV 시절의 검고 흰 화면이었다. 흑백 필름인 걸로 알고 보았기에 등장인물 존 싱어, 안토나포올로스, 믹 등에게 내 나름의 시적인 무드를 부여했다. 그들의 표정, 목소리, 옷차림은 흑백 톤 특유의 쓸쓸함, 아쉬움, 은근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영화는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어린 마음에도 원작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나중에야 커슨 매컬러스(1917~1967)의 동명의 소설(1940)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마나 깊은 고독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이런 소설을 썼을까. 나 역시 그때 누군가 필요하다는 자각, 갈망 상태였기에 이 영화와 소설에 깊이 공감했다.


커슨 매컬러스는 미국 남부 고딕 계열 작가로 분류된다. 고딕 소설은 19세기에 영국이나 독일 문학에서 인기 있던 장르다. 공포와 이국적인 정서, 특이한 인물들을 주로 다룬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시타인’,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등이 이 분야의 고전이다.


그런데 미국 남부 고딕이라니? 미국 남부, 그중에서도 소위 딥 사우스 Deep South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고 특이한 일도 자주 일어났다는 이야기일까. 적어도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여겨졌을 수 있다. 아예 남부 고딕 장르가 있는 걸로 봐서 20세기 초/중반 이곳 분위기는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그곳만의 특유 정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들 작품은 자기 파괴 성향이나 좌절감이 짙다. 작가들은 그로테스크한 인물을 설정하고 초현실적 상상력을 더해 어두운 로맨티시즘을 드러낸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맹에 가입한 주들은 1865년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 심리적 빈곤이나 소외에 노출된다. 이 지역 사람들이 품고 있던 지난 시대의 윤리의식이 가치관 무너지면서 극단적인 절망감이 엄습한다. 윌리암 포크너, 플래너리 오코너, 테네시 윌리암스, 트루먼 카포티, 유도라 웰티 그리고 커슨 매컬러스 등을 읽을 때 느껴지는 끔찍함을 기억한다. 희망 없는 현실에 휘청이는 사람들은 범죄, 폭력 등의 먹이가 되곤 한다. 그러나 사용이 폐기된 과거의 시스템은 이들을 구원하기는커녕 부조리한 현실에 일조할 뿐이다. 게다가 백인 우월주의, 흑인 차별과 같은 구시대적 관습이 아직도 힘을 발휘해 외부 세력의 유입을 방해하곤 한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불건전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도 두렵다. 작가들은 탈출구 없이 공황 상태에 휩싸인 인물들에게서 집단 광기를 발견한다.


커슨 매컬리스는 조지아 출신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다. 평생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글쓰기에 헌신했으나 류머티즘으로 인한 마비, 심장질환,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다. 남편과는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으그의 자살도 겪는다. 본인 역시 성적 정체성이 모호했고 레즈비언으로서의 기질도 다분했다.


매컬러스의 또 다른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1951)에는 고딕적인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카페 주인 여자, 그녀의 전 남편 그리고 그들 공동의 애인. 셋은 치열한 삼각관계를 펼친다. 어떤 남자가 매력도 없고 거칠기만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여자는 사촌이라고 주장하는 꼽추만을 바라본다. 한편 곱사등이 사촌은 잘생긴 그녀의 남편을 갈망한다. 결국 사촌과 남편은 귀중품을 챙겨 야반도주한다. 소설은 ‘이 생명 다하도록’ 몰두하는 치명적인 사랑을 그린다. 여자는 전 인생을 걸어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격렬하게 집착한다. 왜 그 대상이 혐오스러운 사기꾼 녀석이어야 했을까. 왜 그래야 하냐며 어리석게 묻고 싶다. 그녀에게는 그가 의미 있는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지만.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에도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무도 말하는 이를 봐주지 않는다. 마침내 그들은 싱어를 발견했고 자신들의 외로움을 싱어라는 빈 부대에 쏟아냈다. 느닷없는 종말이 다가올 때까지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두 외로운 사냥꾼이다.


소설은 1930년대 미국 남부 어느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장애인, 정신병자, 가난한 소녀, 흑인, 알코올 중독 사회주의자, 고독한 카페 주인 등이 등장한다. 인물들의 면면만으로도 주류로서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회의 뜨내기, 소수자들이다. 귀도 안 들리고 말도 하지 못하는 농아, 존 싱어가 중심인물이다. 그는 금속 세공사로 일하는데 같은 농아인 안토나폴리스와 절친하다. 그러나 저능에 정신이상까지 앓게 된 안토나폴리스는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싱어는 친구를 위해 그 부근으로 이사한다.


싱어는 새로 이사 온 곳에서 여러 사람을 사귄다. 엄밀하게 말해 친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싱어를 자주 방문한다. 흑인 의사 코플랜드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흑인은 대체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낮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호소 한 번 정당하게 하지 못하고 업신 여김만 받기 일쑤다. 사회주의자 제이크는 세상의 부조리한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잘못 돌아가는 일은 많은데 제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이 시절 남부는 문제 투성이로 희망이 사라진 곳이다. 한 때 그는 개혁가,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좌절에 지친 알코올 중독자요, 난동자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싱어를 방문할 때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열변을 토한다. 주인집 딸, 믹도 할 말이 많다. 그녀는 가난한 집의 장녀로서 병에 걸린 아버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본인의 꿈은 점점 요원해진다.


그들 각자는 싱어가 자신알아준다여겼다. 싱어는 남의 입술을 대강 읽는 백인이다. 흑인들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코플랜드 박사가 아무리 자신들의 현실을 이해시키려 해도 싱어에게는 강 건너 이야기다. 혼자만의 세계에 사는 이에게는 공상적 사회주의도 낯설다. 급진 사상보다는 오히려 제이크의 알코올 중독에 대한 우려가 크다. 믹의 음악에의 열정은 또 얼마나 낯설고 접근 불가능한 영역인가. 농아에게 음악과 같은 궁극의 타자가 또 있을까. 알지 못하기에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가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면 방문객들은 그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한 사람씩 싱어의 방에 와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벙어리는 언제나 사려 깊고 침착했다. 다양한 색채를 띤 그의 부드러운 두 눈은 마법사의 눈 같았다. 믹 켈리, 제이크 블런트, 코플랜드 박사는 그 조용한 방에 와서 그에게 말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벙어리는 언제나 이해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싱어가 선의로 가득한 인물이어서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고 여겼다. 심리상담가요, 성자와 같은 사람 아닌가. 자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남의 아픔만 듣고 동정하는 이라니.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구나.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내 병이 심하다, 늘 아프다’ 하는 사람은 있어도 ‘여기 와서 불평, 불만, 슬픔, 고통을 다 털어놓으시오, 내가 다 들어주겠소’ 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데 싱어가 그런 일을 해 낸다. 아니, 그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건 사람들의 오해. 싱어는 성자가 아니다. 신과 같은 인내심이나 자비를 갖추고 있을 리 없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소음과 소란의 시대에 자신과 통하는 이는 같은 장애를 가진 안토나폴리스 뿐이라고 생각한다. 안토나폴리스는 그의 친구인가? 아니다. 그는 자기 먹을 것만 밝히는 어린애 같은 정신박약자이다. 싱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럼에도 싱어는 안토나폴리스를 ‘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여겼을 수도 있다. 그라도 없다면 세상이 너무 고독하기 때문이겠지. 그 친구를 위해 거주지도 옮겨가며 병문안을 간다. 단지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안토나폴리스가 죽었다고 한다.


싱어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 다음 재떨이와 커피잔까지 닦고나서 자살한다. . 그  총소리. 영화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바로 싱어의 느닷없는 죽음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죽었을까? 나도 믹처럼 묻고 싶었다. 그토록 관대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싱어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버리고 죽어버리다니. 오래도록 의문스러웠다. 남들에게는 포근한 친구였으나 그에게는 자신만의 ‘그 한 사람’이 없었다. ‘그 한 사람’이 없는 세상은 절망이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커슨 매컬러스의 데뷔작이다. 그녀는 이 소설의 믹에게 자신의 십대 시절을 투영했다. 그녀의 고향 조지아주 작은 소읍은 낙후했고 예전의 관습과 편견이 잔존하던 곳이다. 사람들은 방향감을 잃었으며 무엇보다 상호 의사소통에의 갈증에 시달렸다. 매컬러스가 그후로도 인간관계 맺기에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기인한다. 이 소설의 싱어나 '슬픈 카페의 노래'에 등장하는 기괴한 인물들은 관계 부재에 허덕이던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고딕 경향은 출구없는 공황상태를 살던 이들의 분노, 우울, 공포를 대변한다.


‘언더스터디’라는 연극을 보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만 있어도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같은 암흑세계의 수인조차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 그저 들어주는 친구. 누구든 ‘그 한 사람’을 원한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을 오리지널 컬러영화로 다시 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차분하게 톤 다운된 색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존 싱어로 출연한 앨런 아킨의 쓸쓸한 눈빛, 데이브 그루신의 ost에 새삼 마음이 아려왔다. 싱어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음악처럼 우수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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