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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03. 2022

활착하라

위화, 인생

아버지의 기일을 맞이하여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까 생각하다가 사진을 보고 드로잉을 해보았다. 솜씨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아버지를 닮은 인물이 나타났다. 눈/코/입/얼굴선/주름/머리카락 그리고 익숙한 와이셔츠와 양복 하나하나 내 손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신기한 일이다. 그러면서 내가 의도했던 일, 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보내셨나에 집중했다.

그 시대 대부분의 한국 사람처럼 우리 아버지도 고단한 삶을 보내셨다. 자기 가족, 특히 부모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다른 이들은 그럴지언정 자식만은 그럴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작은 통계 숫자일 테지만 가족에게만은 아니다. 그분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위화의 ‘인생’, 원제, ‘활착活着’(살아간다는 것)을 읽어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에도 많이 울었던 것 같은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어 제목인 '활착'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단어이다. 국어사전에는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또는 그런 일.'이라고 나와 있다. 영화 '미나리'처럼 어디에서든 살아보려는 집념이 느껴진다. 어딘가에 딱 붙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일까?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 삶이란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기에 이런 용어가 쓰인 것 같다. 산다는 건 어딘가에 착지해야 하는 일이다. 맘에 들든, 들지 않든 살아있으면 그냥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어떤 배우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미 80대 후반으로 거동이 어려워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다. 기자는 곡절 많은 이분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었다. 그녀는 태어났기에, 살아있기에 산다고 말했다. 삶이란 그런 거라고 했다.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능동’, ‘선택’이라는 낱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운명인가, 우연인가, 선택인가. 혈기 왕성하고 다재다능해 스스로 개척하는 모험가들이라면 선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 혹은 운명이라는 말도 사실 여반장이다. 변수가 하도 많아 내가 마음대로 해나갈 부분은 많지 않다. 지나고 나면 운명, 우연, 선택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도 같다. 운명의 여신이 있어서 씨실과 날실을 짜고 우리들 하나하나는 그 패턴대로 산다고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 모두 환경/역사/지역적 큰 틀을 부정할 수 다.

중국 땅은 넓고 야욕에 불타는 이들도 많았. 전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수 천년 세월 크고 작은 나라의 흥망성쇠에 민초들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상류층이야 자신들의 이권, 권력, 명예, 돈을 위해 목을 걸었으니 이름이라도 남았다. 그런데 그들의 ‘하찮은’ 백성들, 병졸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이들에게도 이름이 있었을까. 그 이름이 필요하기나 한 거였을까.

‘인생’에 나오는 푸구이가 바로 그 민초를 대표한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거대한 거인들이 가지고 노는 공처럼 이리저리 던져진다. 높이 올랐다가는 떨어지고 다시 던져지고 또 누군가 받고 또 던져지기를 계속한다. 끝없는 부침의 연속이다.

90년대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를 친 중국의 상흔 소설 계열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특히 수동적 경향이 심하다. 그들은 선한 피해자이다. 대신 국공합작부터 문화혁명까지의 국가는 이들을 마음대로 짓밟는 악당, 폭력배들이다. 중국 정부에서도 상흔 문학이 전달하는 비판/비난조의 울분, 고통에 당황했을 것이다. 민중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작은 돛단배에 매달려 떠밀려가는 하루살이로 묘사하는 것은 그들 체제의 지향점과 정면 배치되는 일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체제 아닌가.

중국은 건국 초기부터 사회의 암흑이나 비극을 쓸 수 없음을 잠정 규약으로 삼아왔다. 문학은 국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상흔 문학은 70년대 후반 문혁이 종결된 즈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상처가 오죽 깊었으면 ‘상흔’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그렇게 줄줄이 출간되었을까. 한국에서도 90년대에 문혁 시절의 트라우마에 고통스러워 하는 중국 작가들의 소설이 많이 읽혔다. 처음에는 오랜 세월 동안 고립된 옆 동네에서 벌어졌던 일이 궁금해서였지만 곧이어 인간적인 동정, 애잔함, 슬픔에 공감했다. 그러나 곧 단순 재현에 식상하게 된다. 상흔 문학은 과거를 교조적으로 보여주는 감상적, 폭로적 서사물로 취급하는 시각이 자라고 있었다.








위화나 거훼이, 쑤퉁 같은 이는 1960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다. 위화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문혁을 겪었다. 부친은 의사로서 당권파로 몰려 자식들에게까지 비판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의 문학 코드는 ‘폭력’과 ‘욕망’다. 문화 대혁명, 개혁개방과 같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변화를 겪은 이들이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리 없다. 사람들은 기존 이데올로기의 가해자나 희생자였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새 시대의 가치관, 사회 시스템에 맞춰가며 삶을 이어 가야한다. 작가는 급변하는 시대를 목격한다. 80년대 후반에 위화를 대표로 하는 그룹은 사회적 리얼리즘을 떠나 새시대를 아우르는 문학 실험과 스타일에 대해 고민한다.  근대적인 ‘의미’와 ‘필연’ 대신 ‘무의미’와 ‘우연’을 강조하는 아방가르드 유파, ‘선봉파’인 것이다. 덕분에 서사에 소재가 되는 부모나 선배들의 삶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단순 재현의 아포리아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가령 ‘인생’을 위화의 부모 세대 작가들이 썼다면 훨씬 자극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똑같은 푸구이가 주인공이라 해도 여기서는 액자소설 속의 화자이다 보니 간접적으로 충격을 완화한다. 들은 것을 한참 지난 후 되새기는 것과 여기/지금을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정서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위화 세대 사람들이나 후배들은 직접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객관적이고 냉철하다. 한 꺼풀 닫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낼 만큼 이성적이다. 직접 당한 사람들은 감정의 진폭이 당연히 크다.


반면 글 속 화자는 푸구이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는다. 푸구이 역시 노인이 된 지 오래다. 현재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죽은 지 오래되어 더 이상 눈물도 없다. 푸구이는 일제의 투쟁 시기부터 문화 대혁명까지 60여 년을 회고한다. 마지막으로 손자가 죽은 지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푸구이가 부모, 아내, 아들, 딸, 사위, 손자가 죽어가는 현장에서 내레이션을 펼쳤더라면 충격과 울분의 강도가 매우 컸을 것이다. 지금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마저도 사라졌다. 거의 정돈된 자세로 과거를 돌아보는 중이다.

그래서 ‘인생’, ‘살아가는 것은’ 혹은 ‘활착’ 이런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 살아보니까 이것이 삶이었다는 걸 관조하는 것이다. 작가도 예전에는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마음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들자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즉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산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고 한다. 작가는 사람들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삶에의 초연함을 보여주는 글을 완성한다.

푸구이는 이야기를 하면서 울거나 분노에 젖지 않고 고즈넉하게 과거를 회상하고 글 속 화자 또한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는 깨닫는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러나 위화가 아무리 관조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해도, 푸구이가 아무리 지난 일을 별 감정 없이 읊조린다고 해도 최종 단계인 독자들마저 맹숭맹숭한 것은 아니다. 푸구이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휴지 몇 장은 써야 한다.

작가는 푸구이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어떻게 한 인간에게 이렇게 큰 형벌을 내릴 수 있을까. 박절하다. 그것이 인생이라면 어느 누가 삶을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겠나. 작가는 국공합작, 중국 정부 수립, 고난의 행군 시절, 일제와의 투쟁,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문화 대혁명 같은 거대한 사건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지속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한 인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충격파가 너무 세고 잔인해서 오히려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여러 사람 중 한 명만이라도 살리는 일이 그리 어려웠을까.

인생에는 쓴맛도 있지만 달고 향긋한 맛도 섞여 있을 텐데. 소설 ‘인생’에는 단맛은 너무 적고 신산한 맛만 가득하다. 아마 작가도 중국 근대사를 산 이들의 어지럽고 괴로운 이야기들을 중도적으로 넘겨보는 것이 불가능했으리라.


사람이 사회를 만든다지만 대다수는 세상이 사람을 만든다는데 더 많은 표를 던질 것이다. 주위의 현실은 추악하고 위선 투성이다. 과거는 어떤가, 사람들은 지난 시간을 꾸미는 경향이 있다. 그걸 추억이나 회한이라고 부를지는 모르지만 초현실, 비현실로 바꾸어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생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 것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푸구이의 이야기가 모두 진실인 것만은 아니다. 약간의 다른 것들이 그의 이야기에 녹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후회, 희망, 좌절, 가상 그리고 주관 같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히스토리를 만드는 건 아닐까 한다.

인간의 삶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다. 거인이나 신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우리 하찮은 민초들은 우습지도 우스꽝스럽지도 않다. 한 명 한 명 참 애쓴다. 여기 푸구이의 이야기는 보고 또 봐도 비극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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