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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05. 2022

사랑은 변하지 않아

고령가소년살인사건

한 때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은 전설 속에서 회자되던 영화였다. 처음 영화가 개봉이 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러닝타임 때문일 것이다. 디지털로 복각된 영화는 네 시간이 다 된다. 그동안 거의 10 시간 가까이 되는 고바야시 마시키의 ‘인간의 조건’(1959)을 본 이후로는 ‘사탄 탱고’(1994) 같이 긴 영화도 그럭저럭 참고 다.

이 영화를 보려 했던 이유는 감독 때문이기는 했다. ‘하나 그리고 둘’(2000), ‘타이베이 스토리’(1985)를 보고 작품에 흐르는 정서에 깊이 공감했다. 이 영화 역시 같은 맥락을 갖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타이베이 고령가, 한 소녀가 살해된다. 범인은 같은 학교 남학생. 여자아이는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사건은 흔히 치정 살인이라고 불린다.


1960년대 초, 장제스가 대륙에서 패배해 대만에 중화민국을 세운 지 십 수 년에 불과하다. 한 나라가 고작 십여 살 되었다는 건 이제 걸음마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직은 미숙한 단계다. 외부의 시선으로 멀리 보면 철권 정치가 부침 없이 직진한 것 같지만 가까이 클로즈업해 보면 크고 작은 굴곡들, 독재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눈에 띌 것이다. 1947년에는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에서 그려진 2.28 사건이 있었다. 현지 타이완 본성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강권으로 탄압한 정권이 평화로울 리 없다. 더구나 1949년에는 중국 본토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이 이곳에 중화민국 정부를 세우게 된다. 타이완은 외성인 수백만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시기 타이완에 정착한 본토 출신 도래인들은 아직도 대륙에 살던 시기의 인맥, 고향 풍경, 문화를 잊지 못한다. 그들의 자식 세대도 이에 걸맞게 흔들리는 사춘기를 맞이한다. 어디서든 아이들은 부모 세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장제스 정권은 타이베이 정부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사상 총국적인 정국 운영에 안간힘을 쓴다. 대륙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모종의 음모를 꾀하려는 불온 세력은 없을까. 정권의 뿌리를 흔드는 세력이 알게 모르게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경계의 눈을 늦추지 않는다. 반면 지식인들, 정치, 문화 인사들은 작은 의심이라도 받아 블랙리스트에 오를까 봐 늘 초조하다.

주인공 샤오쓰의 부모도 상하이로부터 이주한 도래인들이다. 그들은 스파이나 내통자로 의심을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지만 가정과 직업에 책임을 다한다. 이 집에는 아이들이 자그마치 다섯 명이다. 모두 착실한 아이들이다. 이들은 부지런하고 사이도 좋아 부모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단지 네 번째 아이 샤오쓰(小四)가 문제다. 그는 성적이 부진해 야간 중학교에 배정된다.

야간 학교는 풍기가 문란했다.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다른 일에 관심이 많았고 어디에서 인가는 늘 폭력 사건이 일어난다. 무법천지나 다름없다. 공부할 아이들이 진학할 만한 곳은 아니다. 여기에 건실한 가정의 14세 소년 샤오쓰가 입학한다.








샤오쓰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소녀를 사랑한다. 밍은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남자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녀는 자신을 한낱 연애 놀음 상대로 여기는 남자들에게 환멸을 느끼지만 굳이 벗어나려고도, 바꿔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잠시나마 그녀의 초라한 현실을 잊게 한다. 소녀는 여기에 안주한다. 이곳에서만은 숭배받는 여왕 아닌가.

불안한 사회 탓인가. 소년들은 이리저리 휩쓸린다. 그들의 선배들처럼 국가나 가족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단지 동네 양아치들끼리 치사한 주도권을 잡으려 싸운다. 사소하고도 졸렬한 명분만이 난무한다. 크고 작은 갱단들은 사기, 폭행, 강도 행각뿐 아니고 목숨을 건 집단 패싸움이나 살인까지도 불사한다. 어린 까까머리들도 가세해 청춘을 바치려 든다.

갱스터가 두 부류의 사람이 무섭다고 중얼거린다. ‘하나는 자신의 목숨을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 두 번 째는 파렴치한’. 대개는 파렴치한이 이긴다. 아마 타이완의 당시 상황도 이랬을 것이다. 체면이나 예의를 무시하는 파렴치범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에드워드 양 역시 그런 현실에 역겨움을 느꼈으리라.

샤오쓰는 아버지에게서 강직함을 배운다. 아버지는 세상이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이라 할지라도 반듯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딜레마에 빠졌을 때도 용기/덕을 좇아 인생의 행로를 선택했노라고.

소년은 밍도 남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밍이 자신의 힘으로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소녀는 세상과 같이 파도를 타고 싶다. 가만히 있어도 그녀를 원하는 남자들이 줄을 선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뀔 수 있고 당연히 사랑의 상대도 바뀌어야 한다. 샤오쓰는 그런 삶의 방식, 가짜 사랑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

어떤 세상은 사람에게 자괴감을 강요한다. 독재, 철권, 강권의 나라는 도덕군자인 척 하지만 한 꺼풀만 파헤치면 부패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곳의 삶은 어렵다.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갖춘 이일수록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제임스 앙소르가 그린 가면에 둘러싸인 불행한 사람의 모습과 같다. 가면들은 끔찍하게 웃고 까불고 비웃는다. 마귀, 괴물 떼들에 둘러싸인 정상인이라니.



     <Ensor with Masks, self-portrait,1899>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편리한 대로 사랑의 줄타기를 하려 한다. 믿을 수 없는 악몽이다. 어린 작부에 다름 아니다. 밍은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도 좋다’, ‘그게 뭐 그리 잘못되었니? 그는 돈과 이 있고 나는 수혜자가 될 수 있으니.’라는 생각이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2001)의 명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에 대해 ‘당연히 변하지’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아이다.

영화는 그 시절 우리 사회와도 상당히 닮았다. 전시행정, 탁상공론에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이들이 넘쳤던 시절. 과거 아날로그 시절이 낭만적이고 인간적이었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그때는 그때대로 가시적/비가시적 무자비한 폭력에 상처입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던.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 Brighter Summer Day'이다. 그래도 작은 캣이 부르던 'Why'나 'Angel Baby'을 듣다 보면 화창한 어떤 날이 슬쩍 지나간다. 과거는 아름답게 색되기 쉽다. 그래서일까. 어떤 시간인가는 꼭 잡고 싶긴 하다.

어느 때이고 세상은 쉽지 않았다. 스페인-네덜란드-일본-중화민국으로 지배층이 바뀌어간 타이완  사회의 특수성, 원주민과 도래인 간의 갈등은 여전하다. 외부의 적을 이용한 파시즘적 위압 통치는 지나갔어도 돈/권력이 약자를 지배하는 건 변함이 없다. 이런 곳에도 고뇌하는 젊음이 있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몹시 화가 난다. 영화가 선연하고 처절하다.

영화 말미에 라디오 방송은 최우수 대학의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다. 일등부터 등수대로 줄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곳의 지배자는 통치 행위가 쉬울 것이다. 모두가 일등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옆 사람을 밀어낸다. 체제에 충성하면서도 자기 것만은 잃지 않으려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많을 터이니 지배자들은 즐거울 것이다. 끝없이 ‘을’들의 싸움을 부추기는 곳. 이런 곳에서는 파렴치한이 승리하기 쉽다. 에드워드 양은 순수한 소년으로 하여금 부끄러움 없는 사회를 단죄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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