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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10. 2022

순수의 집

디킨스, 황폐한 집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1852~1853)은 번역본으로 거의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이다. 이미 그의 스타일을 눈치채고 있으므로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니. 아무렴, 나는 21세기를 산다. 작가의 장황함, 중언부언, 끝없는 설명조, 화려한 문체에 반하기에는 지나치게 현대적이다. 더 큰 문제는 작가의 순수에의 열망에 어느 정도 반감을 느낀다는 거다.  


디킨스의 인물들은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는데 대부분은 권선징악을 따른다. 물론 몇몇은 이유 없이 죽기도 한다. 희생양, 순수에제의라고 생각한다. 그들 덕분인지 다른 이들은 대부분 구원을 받는다. 이 작품의 희생물은 누구였더라. 그 소년이다. 빈민가에 태어나 경멸만 당하다가 가련하게 죽은 ‘조’.     


이 아이에게는 죽어야 할 이유, 벌 받아야 할 근거란 게 없다. 고아로 태어나 빗자루 하나로 거리의 청소부가 되었다. 런던에서도 최악의 비참한 , ‘톰 올 얼론스’ 출신이다. 지역 이름 자체로도 이곳 사람들은 혼자 살다가 혼자 죽기 일쑤다. 한국의 벌집촌 정도 될까. 조는 남이 부르는 제 이름 하나만 달랑 알 뿐, 부모도, 형제도, 세상의 이치도 모르는 소년이다. 기독교 국가의 시민임에도 기도하는 법조차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부랑아로, 꼬마 도둑으로만 여긴다. 소년은 남을 해코지 하거나 괴롭힌 적이 없다.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년은 죽어야 다. 런던이 죄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화하지 않으면 악으로 오염되기 때문이다.     


디킨스 소설에서는 익숙한 구도이다. 디킨스는 어리고 맑은 영혼이 있어야 세상이 구원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바보 성자, 유로지비의 어린이 판이라고 할 법하다. 그의 어투는 블랙 코미디적 신랄함이 물씬하다. 작가는 주류로서의 악을 증오하고 파멸시키려 한다. 당시 세상에서 악의 집행자들은 귀족 잔당과 자본가, 그 끄나풀들이다. 귀족들은 그때까지도 거대 영주로써 돈과 권력을 소유한 원흉이다. 디킨스는 이들에 대해 용서가 없다.  

    

이 책에서 귀족 잔당의 역할을 맡은 이는 데드록 경, 정치계의 유명인사다. 그의 저택에서는 하는 일 없는 왕년 귀족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파티를 연다. 참석자들은 삶의 지루함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다. 생산능력이라고는 없는 인물들이 모여 얼마 남지 않은 고상함을 짜내려 골몰한다. 이 집안은 데드록 부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불모의 집안은 주변 사람들의 영락, 요란한 스캔들과 함께 바람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스몰위드는 사채업자이며 중개인이다. 디킨스가 이런 인물을 평범하게 그렸을 리 없다. 그는 스몰위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추한 인간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몸이 부자유스러운 노인은 다른 사람들이 업거나 의자에 앉혀야 이동할 수 있다. 이런 몸을 가지고서도 머리는 비상해서 갖은 음모와 협잡에는 당할 이가 없다. 그는 세상을 통찰하고 기획할 줄 아는 드문 지능의 소유자이다. 앉은자리에서도 시장과 자본의 흐름을 꿰뚫는다. 슬쩍 바라본 남의 심리, 본능, 충동까지도 파고들어 악용할 줄 안다. ‘세상의 명수’가 있다면 바로 이 악당이리라.     


스몰위드의 동생 역시 형에 못지않다. 그는 온갖 물건을 사 모은다. 겉으로는 폐지상이나 고물상, 골동품상 같은데 겉보기만 그렇다. 그의 실상은 감추어져 있다. 그는 수집한 쓰레기 더미를 해당 인물 별로 분류해서 위협하려 한 것 같다. 아쉽게도 본인 의도와 달리 일찍 죽는 바람에 뜻을 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최고의 악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 그중에서도 ‘사법제도’이다. 그것은 원래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사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제도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사회의 불치병이 된 지 오래다.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라는 소송이 있었다. 시작은 사소했다. 잔다이스 성을 가진 친척들끼리 땅을 놓고 벌인 상속 분쟁이었다. 이 소송이 몇 대를 내려가며 고소, 고발을 거듭하면서 분쟁에 얽힌 관련자들도 점점 늘어난다. 나중에는 소송이 대체 어디까지 전개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당사자들은 알 수가 없다. 사법제도의 하수인들만허점을 이용해 큰몫을 챙긴다. 디킨스는 기자/작가가 되기 전 법률 사무소 서기 근무한 적이 있다. 영국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제도 아래서 낙수를 즐기는 관계자들은 일을 간단하게 처리할 필요가 없다. 재판관, 대소서인, 변호사, 필경사, 속기사들에게는 일이 오래 걸리고 복잡할수록 이롭다.      


제도는 제도를 낳아 처음과 끝이 서로 어긋난 채로 연결되고 괴물로 봉합된다. 사건이 어찌어찌해서 해결이 된다고 해도 소송비로 액수가 들어가 남은 돈이 무일푼이 되기도 한다. 누구를 위한 소송이었나. 결국 관련 직업인과 제도를 위한 헛된 다.     


이 소설에서도 변호사, 재판관과 법률회사 직원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도적으로 사악한 대리인이 되어간다. 털킹혼은 부유층, 고위직 전담 변호사이다. 그렇다 보니 상류층의 비리, 비밀도 샅샅이 알게 되는 부작용을 덤으로 얻는다. 디킨스의 펜은 이런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변호사 자기 집 천장화에 그려진 로마인의 손가락 방향대로 살해된다. 타인의 비밀을 이용해 은근히 위협하던 자의 말로답게 단번에 처형된다.     

 

‘황폐한 집 Break House’이라는 소설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오묘하다. 스산하고 검게 느껴진다. 집은 소송에 소송을 거듭하는 사회를 빗댄 상징이다. 작가의 반어법이 놀랍다. 이 집의 주인 잔다이스는 자기 대에서 이 소송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그는 이 황폐한 집에서 눈부신 반전을 만들어낸다. 한 여자 아이, 마음씨 곱고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소녀, 희생, 책임, 순수의 결정판인 에스더가 이 황폐한 늪을 희망의 장소로 바꾸도록 선택된다.      


황폐함을 바꾸는 불빛, 제도를 만들고 또 부수는 원동력 모두 ‘순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그 악덕의 원흉인 제도를 이용하려 하고 그걸로 흉계를 꾸미려는 이가 있다면 살아남지 못한다. 순수의 힘은 부정, 부패, 사악함보다 훨씬 강하고 선명하기 때문이다. 시작은 희미하다. 그러나 이 힘은 진행이 될수록 짙어져 종국에는 악을 이긴다.     


소송에 지친 일족이 사망하고, 털킹혼이 살해되고 스몰위드가 치명적인 몸이 된다는 것, 또 데드록 경이 희망 없는 삶에 처한다는 건  악덕의 항복을 의미한다. 디킨스는 이 두꺼운 소설에서 이야기의 재미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의 개선, 혁신, 어쩌면 니힐리스틱한 결론에 방점을 다. 제도가 지배하는 세상은 감옥이고 제도 없는 세상은 무정부 상태일 테니.


디킨스 식 순수의 승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데드록 부인과 그녀의 죽은 애인과의 죽음을 극복한 사랑은 작가가 원하는 순결을 증거 한다. 에스더가 선행/사랑의  본보기인 의사와 결합되는 것 역시 그렇다. 작가의 손길은 선한 가치관으로 안내하는 푯말을 줄곧 가리킨다. 이런 면에서 디킨스는 매우 위험하다. 그는 유무를 극단적으로 선택한다. 노골적으로 선악을 판단한다. 그 사이의 무지개 스펙트럼은 무시하곤 한다.      


디킨스도 현재를 다면 순수, 순결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겠지. 그건 어찌 보면 인간 사회에서는 보존되기 어려운 이슬 결정 같은 것이다. 크리스털이나 다이아몬드라면 영구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순수는 ‘이슬’이다. 세상 공기와 만나 오염되고 심지어, 빨리 사라진다. 그것이 이슬의 운명 아닌가. 이슬 같은 순수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추상으로서만이, 개념으로서만이 존재하리라. 순수한 물, 순수한 영혼, 순수한 제도 같은 건 환영에 불과하다.     


그가 어린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는 이유는 맑고 영롱한 영혼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 먼지에 감염된 예전의 그 순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알아보리라. 그러려면 그의 미심쩍은 여성관을 들여다봐야겠지. 어린이, 여성에 초점을 둔 순수의 집은 어떤 면에서 건강하지 않다. 잘못 흘러가기 쉽다.

 

디킨스는 일생동안 어떤 환영을 향해 달려갔다. 그토록 굵직한 서사물을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나름의 순수 결정물을 스스로 짓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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