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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15. 2022

소설을 읽는다

수잔 손택, 문학은 자유다


픽션을 좋아한다. 다른 책들이야 전문 지식이 좀 필요하고 해당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설은 다른 영역에 비해 접근이 쉬운 편이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개연성과 현실감을 갖춰 그리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일상에는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 대개 비슷비슷하다고 여긴다. 소설 속 인물처럼 극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 드라마틱이나 크레이지들은 먼 곳에 있다. 내 주위에는 거의 없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일상에는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 대개 비슷비슷하다고 여긴다. 소설 속 인물처럼 극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 드라마틱이나 크레이지들은 먼 곳에 있다.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평범한 일상인과 비범하거나 특이한 인물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건 아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호환 가능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주변의 어떤 사람과 한 시절을 공유한다는 것이 소설 속 인물을 속속들이 아는 것과 같을 리 없다. 나와 마주치는 현실 인물은 소년, 청년, 중년 혹은 노년 시절을 강물처럼 흘러보내며 단번에 중층적/다층적 면모를 드러내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사과 하나에도 무수한 단면이 존재한다. 하물며 다른 사과나무들, 밭, 재배자와의 상호작용을 생각해 보면 셀 수 없는 경우의 수가 파생된다. 실물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사람들은 대개 위장 전술의 대가들이다. 무수한 서랍을 여닫으면서 보이고 싶은 면만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샤토브리앙의 말처럼 우리는 타인을 모른다.


소설 속 인물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하나로 축약한 것이다. 실제 사람에 비해 입체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평면적이다. 그 반대라고 알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소설가의 트릭이다. 칠팔십 년 걸릴 이야기를 기껏 며칠 읽을거리로 알아낸다는 것도 난센스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통해서 인간을 좀 더 진실하게, 압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도 맞다. 인물의 내부까지 죽 따라가다 보면 어떤 특별한 사람에 대해 안다기보다는 보편적인 사람을 이해하는 지점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 쓰인 소설이라면 그렇다.

옛날 소설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판소리계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개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춘향이나 심청, 흥부, 놀부에게는 구체적인 인격이 없다. 17세기 초의 돈키호테나 18세기 영국 소설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들에게서도 고뇌의 흔적을 느낄 수 없다. 이들은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성격 없는 전근대인이다.

예전 사람들이라고 해서 개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일부러 발견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았다. 개인을 인정해 준다는 건 인문주의적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개인이 집단 속에서만 그 역할을 인정받는 세포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고독, 자유, 고뇌를 드러내는 것은 집단에 대한 저항과 관련이 있다. 개인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참 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서구에서도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인간성을 드러낸 소설들이 나온다. 스탕달이나, 발자크, 에밀 졸라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은 요즈음에도 시간차 없이 읽을 수 있다. 인간 자체를 그리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위한, 플롯을 위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 시절의 인간도 지금 21세기의 독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당대의 문제, 자신과 사회와의 균열을 말한다.

러시아 소설가들도 이때 두드러지는 것을 보면 19세기는 ‘인간 발견 시대’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고골, 레스코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체홉 등을 보자. 그들의 고통, 고민은 오늘날 우리와 비교해도 덜하지 않다.

20세기의 소설가들은 길게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독자들을 고뇌하고 사색하게 하는 작가들, 작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소설이라는 걸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이미 신화 속에 원형이 다 있어 고대 사람들조차 인간, 사회 그리고 그 사이의 갈등 요소를 다 파악한 상태다.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는 건 사족이다. 단지 배경을 바꾸거나 인물 구도, 그에 따른 사건의 모양새가 달라질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야기는 흡인력이 막강하다. 오랜 세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쓰이고 또 쓰였지만 재료의 원천은 여전히 닳지 않은 채 무궁무진하다. 인간은 그만큼 미스터리 한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우주를 품고 있다. 그의 머릿속, 심장 속에서 일어나는 감성적, 지성적 물음과 대답을 완료하려면 또 한 세기가 흘러가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호기심이 넘친다. 소설을 읽는 건 인간을 읽는 것이다. 인간만큼 거대하고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은 종족은 없다. 그러나 소설을 영화, 연극, 드라마와 비교할 수는 없다. 상당히 다르다. 영상물이나 연극은 상상한 것을 눈앞에서 실현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했듯 '희곡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양식'이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많은 것들을 가로막고 방해한다.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1970)은 빔 벤더스의 영상(1971)으로 구현되었다. 소설과 영화라는 두 매체는 블로흐라는 인물의 내적/외적 궤적을 따라간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만큼 인물의 불안 강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삼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임에도 블로흐의 편집광적 강박은 독자에게 절실하게 전달된다. 반면 영상물은 이미지를 드러내어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베일로 가린다고 볼 수 있으니 이율배반적이다. 다 보여준다는 건 어느 면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 못 보는 것에 비해 양도 적고 질도 낮다. 소설은 암시이다. 그래서 진실하다. 흠, 소설은 소설이고 영상은 영상이다. 


얼마 전 알렝 로보그리예의 ‘엿보는 자’(1955)를 읽었다. 인물은 음흉하고 끔찍하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감출 줄 안다. 반대로 의도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은근히 드러낼 준비를 한다. 자기 방어에도, 노출에도 능하다. 누구나처럼 은둔자이며 관종이다. 로보그리예는 인물 저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의식/무의식의 층위들을 알려준다.


언어가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지점까지 점프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이 쓴 작품들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좋은 소설은 읽을수록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상징, 비유뿐 아니라 작가가 숨기고 있는 아이러니, 패러독스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수잔 손택의 ‘문학은 자유이다’(2003)의  구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작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 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문학은 이 세계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언어와 서사를 통해서 기준을 제시하고 깊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가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인간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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