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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Mar 20. 2023

낙원으로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빅슬립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살 때 안락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자신이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큰 힘이 작용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빼앗기기도 한다. 20세기 초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     

                             

대실 해밋(1894~1961)은 1920~3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미국의 추리소설의 대가, ‘말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를 만든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장성이 있다. 샘 스페이드가 일하는 콘티넨탈 탐정회사는 작가의 전직장을 모델로 한다. 그래서인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인 부패자본주의, 배금주의, 금주법, 이민자 등에 정통하다. 이 작가의 작품 중 ‘투피냘 섬의 약탈’과 ‘중국 여인들의 죽음’을 인상깊게 보았다. 전자는 러시아, 후자는 중국 이민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투피날 섬은 부유하면서도 세상과 충분히 동떨어진’ 작은 섬이다. 탐정은 이곳에 결혼식 예물을 지켜주기로 하고 고용되었다. 결혼식 날, 섬으로 들어오는 다리가 폭파되더니 지역 전체가 정전된다. 곧이어 은행, 보석상 등의 약탈당하고 예물을 지키던 사람들이 피살된다. 누가 이런 일을 벌였을까. 범인을 잡고 보니 러시아 공주, 장군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이다. ‘한때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지겨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러시아 제국을 떠난 이후로는 왕후장상도 먹고사는 데에 온 힘을 바쳐야 다. 공주는 청소부가 되고 공작은 집사가 되었다. 한꺼번에 떠난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먹고살려고 궁리한 수단도 똑같아 러시아 식당, 음악, 언어 교습 같은 일은 과도한 경쟁으로 포화 상태가 된다. 유럽보다 나을까 싶어 선택한 미국은 진정한 몰락의 길을 안내한다. 왕년의 대단한 사람들은 추레한 차림새로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범죄자의 길을 걷는다.     


러시아는 1차 대전을 겪는 동안 대변혁을 겪는다. 1917년 혁명으로 정치 구조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관계도 철저하게 바뀌게 된다. 과거의 지배계급은 사라진다. 질서도 허물어졌다. 곧 차르가 퇴위하고 1918년에는 온 가족이 총살당한다. 계급의 적은 무자비하게 테러를 당한다. 자칭 ‘모순 없는 무계급 사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1917년부터 2년 동안은 내전이 있었고 1921년 경에는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노동자들의 봉기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1년부터 1922년에는 극심한 기아로 인한 농민 봉기도 터졌다. 그러나 1924년 레닌의 죽음 이후로는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더 끔찍한 일이 뒤따른다. 이렇게 내부에서 저질러지는 만행으로 100만 명 이상이 유럽 어딘가망명했다.


‘중국 여인들의 죽음’은 청이 몰락한 1912년 이후 중국을 탈출해 온 사람들을 다룬다. 고위관료로 대대손손 축재한 막대한 부를 유출부패한 자들도 있었지만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된 조국을 살리고자 잠시 빠져나온 들도 있었다.


이 단편의 시대적 배경은 1931년 만주사변 즈음으로 보인다. 만주족 한족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다. 애국자들은 중국에서의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는 일본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쑨원의 사망 이후로 상황이 더 어려워진 일부 항일 투사들이 미국으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독립을 위해 자금을 고 무기를 구입해 중국으로 보낸다. 물론 대부분이 밀수와 마약, 인신매매, 금주법 위반 등 불법 행위를 통해서이다. 이상은 숭고하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외세에 맞서기 위해서 이들 투사들이 하는 일은 하찮고 혐오스럽다. 목표는 원대하나 사는 방식은 그런저런 차이나타운 깡패들이나 다름없다. 고국을 떠난 후 자리 잡은 새 나라는 고상한 정신을 유지할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다.     


레이몬드 챈들러(1888~1959)는 대실 해밋과 같은 시대 하드보일드계의 거장이다. 둘은 당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끈 장르 문학의 선봉 ‘블랙 마스크’ 매거진에서 필진으로 활동했다. 레이몬드 챈들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빅슬립’(1939)에는 자기 나라를 떠나 짧은 생을 마감한 한 인물이 등장한다. 챈들러는 모계가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 때문일까. 이 작품 속의 신비한 인물 러스티 리건을 아일랜드인으로 출연시킨다. 미국인들의 정서로 볼 때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처사는 잔인하도록 잘못된 것이었다. 영국은 악한 거인 골리앗이요, 아일랜드는 순결한 다비드처럼 보였다. 그런데 러스키의 한심한 마지막이라니.  죽음은 영웅의 마지막을 비참하다 못해 처참하게 만든다,      

 

탐정 필립 말로는 부유한 퇴역 장군의 요청으로 사라진 사위 러스티 리건의 행방을 찾는다. 러스티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공화국군 장교 출신이다. 영국은 약탈, 고문, 살인을 불사했고 IRA(The Irish Republican Army)는 게릴라 전쟁으로 맞대응했다. 그러나 북부를 제외한 아일랜드 대부분은 현실과 타협해 1922년 영국 자치령 아일랜드 자유국 The Irish Free State 을 탄생시킨다. 그후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IRA와 IFS는 입장이 달라지면서 나라는 내전으로 치닫는다. 러스티는 이 즈음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것 같다. 거듭되는 전쟁에 환멸을 느꼈을까. 어쩌면 미국으로 이민한 아일랜드인들을 대상으로 애국 공채를 얻어내려 온 걸 수도 있다. 정확한 내막이 드러난 건 아니니까.   


예전에는 영국과의 전쟁이나 내전에 관한 IRA에 관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었다. ‘크라잉게임’(1992),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 ‘마이클 콜린스’(1996),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등을 감동적으로 보았다. 작품의 인물들은 박해받았으나 비장미가 넘쳤다. 그들의 고통에 깊은 슬픔으로 공감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러스티의 죽음은 그런 게 아니다. 그건 희생도 숭고함도 아니었다. 레이몬드  챈들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괜찮은 남자 한 명 쯤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지게 할 만큼 타락했다고 말한.          


한 권이 끝나도록 러스티는 행방이 묘연하다. 이 두툼한 소설은 인물들로 복잡하지만 독자들은 러스티의 한치 그림자도 잡을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으니까. 그는 한 때 위대한 군인이었으나 미국에 온 후로는 금주법 시대의 밀주업자가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뭔가 범접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주위의 악당들이 갖은 범법과 탈선으로 인간성의 최악을 가는 반면 이 남자는 어딘가 은밀한 곳에서 고상한 향기를 발산한다.     







그는 깊은 계곡과 산을 호령하던 최고의 총잡이였다. 그런 남자가 뼛속까지 방종한 미국의 십 대 여자애한테 당했다. 완벽한 블랙코미디. 제목부터 빅슬립이다. 긴 잠 혹은 깊은 잠이랄까. 삶이 피곤했던 이 남자는 썩어가는 기름통 안에서 수년째 잠들어 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챈들러는 소설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맺는다.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그의 과거는 웅장했다. 그러나 비천한 이유와 방식으로 그를 기다리는 죽음이 있었다. 러스티가 아일랜드를 떠난 이유는 알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압박이 그를 내몰았을 것이다. 그러나 떠난 이에게 평화로운 삶은 허용되지 않았다. 죽음만이 그를 잠들게 했다.     


20세기 초반, 굶주림, 혁명, 반혁명, 반동 등 고난의 시기였다. 정치폭력과 테러가 일상화가 된 곳이 많았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은 그 후로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의 서배스천은 러시아로부터,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추방자’의 귀작은 폴란드로부터 왔다. 그들은 낙원으로 보이던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 편이 아니다. 그들 각자에게 책임이 있었던가? 인류는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왔다. 종도 번성한다. 그러나 각 개인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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