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건 없을까
마르셀 프루스트, '게르망트 쪽'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수많은 인물이 출현한다. 워낙 긴 장편이므로 박경리의 ‘토지’,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나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혹은 윌리엄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 시리즈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소설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구현한다. 작가들도 그렇게 의도했고 독자 또한 사회학 도서를 읽듯이 그 시대를 망라할 수 있다. 시대, 인물 그리고 인생이 있다.
소설의 3부 ‘게르망트 쪽’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지닌 프랑스 상류층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귀족들은 1789년 혁명기에 피의 숙청을 겪었지만 왕정복고, 제정을 거치며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870년대 이후로는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이 없으니 왕족이나 귀족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권세를 누린다. ‘게르망트 쪽’은 드레퓌스 사건이 논쟁의 중심에 있는 걸로 보아 19세기 말기를 다룬다. ‘게르망트Ⅰ’(1920)과 ‘게르망트Ⅱ’(1921)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출간되었지만 작품 속 사람들은 여전히 벨에포크의 꿈속을 배회하는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 제목은 ‘스완 쪽으로’이다. 스완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유태인 증권 중개인이자 엘리트로 당대 지식인의 한 전형이다. 대다수 유럽인들에게 유태인은 비호감의 대상이다. 그러나 스완은 최상층 인너서클에서도 유명 인사이다. 부유할 뿐만 아니고 예리한 지성과 감식안을 갖추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화류계의 꽃이라 불리던 여자에 반해 결혼한 후 신분이 낮아질 위험에 처한다. 거기다가 유태인이니 상류층 주류와 대치되는 친드레퓌스 파다.
3부는 ‘게르망트 쪽’이다. 스완이 부르주아 계층에 속한다면 게르망트는 귀족을 대표한다. 작가는 19세기 프랑스를 좌지우지하던 두 그룹의 내부를 묘사하려 한다. 스완은 거의 상류층에 올라섰지만 결혼으로 한풀 꺾였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치유할 수 없는 가격을 당한다. 게르망트 집안은 주인공 마르셀의 환상에나 등장하던 이름이다.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도 그려진 마법의 고유명사다. 독자는 1부의 스완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3부에서는 게르망트라는 이름이 서서히 퇴락하는 것을 봐야 한다. 세계 대전으로 나아가던 이 시기 신분 질서는 흐릿해져 가는 중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허상들로 세워졌던 한 시대의 끝을 증명하는 목격자가 아닐까 한다.
귀족이라고 고난과 갈등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들이 살던 포브르생제르맹이라는 지역에는 슬픔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살롱과 살롱을 왔다 갔다 방문해 족보를 읊거나 예술과 지성을 논하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슬프거나 사무치는 일이 없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나니 Sic transit'라는 경구처럼 잠시 왔다가 스러진다.
점심은 파름 대공 부인 집에서, 저녁은 게르망트 공작부인 집에서 먹었다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유력하거나 큰일을 해냈기에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거니까. 그곳에 가서 하는 일이 무언가 하면 정확하게 말해서 남들의 옷과 화장을 평가하고 이런저런 잣대로 사람들을 험담하는 일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천하다고 경시하고 같으면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음식이나 화초가 마음에 들었다면 즉시 내 요리사나 정원사를 파견해 알아 오게 하고 다음에 써먹는다. 스캔들과 헛소리 그리고 정치, 외교와 같은 심각한 논쟁이 섞여 흐른다. 참가자들은 문학, 음악, 미술 등 당대 문화생활의 정수를 만끽한다.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예술계 인사들은 1급 살롱에 끼어보려 안간힘을 다한다. 일반인들만이 아니다. 귀족끼리도 위계가 있어 하층 귀족들은 상류층에 초대받으려고 아우성이다. 게르망트는 최상류 층이라는 타이틀을 의미한다. 게르망트 공작부인 같은 최고수는 급이 낮은 집을 가끔 방문하기는 해도 웬만해서는 제집에 초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를 자각하도록 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살롱의 장점은 근본적으로 버리는 데 있다’는 걸 안다. 공작부인이 들러만 주어도 감개무량하다. 초대받는 일은 꿈꾸기 어렵다. 그러니 게르망트 저택에 초대받는 자는 유럽 최고의 문화 인사나 왕족이라는 증거이다. 주인공인 마르셀도 이 집에 초대받으려고 갖은 술수를 다 써서 성공한다.
마르셀이 생각하던 게르망트는 모든 아름다움의 구심점이다. 몽상과 마술의 세계이다. 그곳에는 신화 속 인물들처럼 우렁찬 지식인들, 미인들 그리고 선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짐작하는 것처럼 그 집에 진선미가 있을 리 없다. 모든 게 허상과 우상일 뿐이다. 주인공은 저택을 드나들며 진정한 허영의 시장을 맛보게 된다. 그런 곳에서는 환멸을 발견하기도 쉽다. 포브르생제르맹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그를 사로잡고 있던 옛 관념도 사라진다.
생루는 게르망트 공작의 조카로 마르셀의 친구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허심탄회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도 직업이 무대인지 사창가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 진보적 지식인으로 신분보다는 사랑이라고 외친다.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사람도 기회만 되면 신분제의 옹호자가 된다. 자기가 원할 때만 친구이지 친구가 손을 내밀 때는 차가운 기계가 된다. 주변에는 환락에 물든 인물들이 많다. ‘게르망트 쪽’의 다음 4부가 ‘소돔과 고모라’이다. 세기말 병이었던 권태와 지루함, 온갖 악덕이 몰려온다.
생루의 어머니 마리상트 부인은 소박한 여인이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실상은 따로 있다. ‘귀부인이란 바로 귀부인을 연출하는 것, 다시 말해 어느 정도는 소박함을 연출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돈이 많이 드는 유희로, 당신이 소박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말해 당신이 무척 돈이 많다는 것을 남들이 아는 조건에서만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렇지만 마르셀을 속일 수는 없는 거다. ‘그날 나는 부인이 매우 작은 코와 매우 푸른 눈, 긴 목과 슬픈 표정을 가졌다’는 것만을 알게 된다. 단지 표정만 쓸쓸하고 소박하다. 연극에서 소박함을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나 다름없다.
파름 대공 부인은 누구에게나 상냥하다.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의가 그들을 네 발밑에 두는 은총을 베푸셨으니, 네 지위에서 추락하는 일 없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도록 하라. 다시 말해 돈으로 도와주고 병자도 간호해라. 그러나 절대로 그들을 저녁 파티에 초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네 품위도 떨어뜨려 네 자비로운 행동의 효과를 지워 버릴 테니까.’ 곳간에서 은혜가 나온다. 마음씨도 다림질되니까.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오래도록 마르셀을 가슴 두근거리게 했던 절세 미녀이자 예술애호가다. 얼마나 그녀를 사랑해 왔던가. 처녀 시절부터 유명한 재담가였으므로 그녀가 가난한 예술가나 자유사상가와 결혼해 ‘타락’할 거라고 믿은 사람들이 많았다. 말로는 사교계를 혐오했고 혈통이나 재산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지성이나 마음씨 재능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도 ‘연금 증서’와 ‘족보’를 택했다. 부유하지만 무지한 바람둥이 게르망트 공작을 선택한 것도 모자라 예전의 친지와 지인들과는 관계를 끊어버린다. 무시당한 보복에다가 이제는 신분상 평등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문대로 지성적이던가? ‘그녀의 이런 특별한 능력에 대한 내 기대는, 그녀가 별 의미 없는 대화 중 요리법이나 성에 있는 가구 이야기를 할 때보다, 혹은 이웃 여자들이나 친척들의 이름을 말할 때보다 나를 더욱 실망시켰다.’ 돈은 많은데 늘 심심한 여자다. 남편의 정부들도 웃음으로 대해야 하니 악의와 잔혹함이 늘 동행한다. 마르셀이 신화에 건 기대는 무너졌다.
게르망트 부부에 대한 마르셀의 비판은 꽤나 시니컬하다. '전에는 그들이 내가 생각도 할 수 없는 삶을 누린다고 상상했으나 지금은 다른 남자나 여자들과 비슷하며 단지 동시대사람들에 비해 조금 뒤처진, 그러나 불균등하게 뒤처진 모습이었다.' 많이 낙후한 인물들이라는 평이다.
죽음에 임박한 절친 스완이 게르망트 부부를 방문한다. 슬프고 비장한 스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작은 아내에게 검은 구두 대신 빨간 구두로 바꿔 신으라고 말한다. 빨간 스커트를 입었으니 빨간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교적 의무가 친구의 죽음보다 우선한다. 그러니 죽어가는 이 앞에서 자신의 소화 불량을 호소할 수 있겠지. 이들은 이런 세상에 산다. 그래서 가짜 삶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사치 그리고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마르셀네 집 하녀로 일하는 프랑수와즈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드러낸다. ‘부가 없는 미덕 또한 그녀가 원하는 이상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부는 미덕의 필요조건 같은 것이었으며, 미덕도 부가 없다면 아무 가치도, 매력도 없었다. 그녀는 이 둘을 거의 분리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는 하나에 다른 하나의 특성을 부여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미덕에서는 뭔가 안락함을, 부에서는 뭔가 교훈적인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돈에서 해방되기는 참 어려울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쩌자고 별일도 아닌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그리 길게 써 내려갔을까. ‘이 작품의 주제인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문학적 소명 이야기를 공표하기에 앞서 내가 거쳐야만 했던 수많은 불필요한 세월들’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각한 대로 마음 깊이 저장된 인상, 경험, 기억 등을 다시 표현해 독자들에게 인상을 재현시키는 일, 즉 예술을 위한 소명의식을 깨닫는다. 그것은 시간을 벗어나 헛된 삶을 초월하여 본질을 발견하는 일이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의 신도여서였는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 삶을 긍정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건 맞지 않을까. 그는 습관적, 표면적인 자아와 심층적인 자아가 만나는 짜릿한 느낌을 경험했다. 그런 점에서 허영/허세에 가득한 사람들을 만났던 일도 다 명약이었다. 무언가를 위해서는 의지적, 무의지적 경험이 필요하다. 삶에 헛된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교양을 쌓아라' nunc erudim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