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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Feb 26. 2023

하지 않은 말

이청준 '눈길', 오베라는 남자

이청준의 ‘눈길’(1977)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예전에는 틀림없이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이 단편에 나오는 부끄러움, 수치 등에 대해서도 공감했으리라. 그런데 쓸쓸하고 애틋했을 그 정서가 와닿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소설은 그 시절의 가난, 그렇지만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음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 사람들처럼 가난하지 않아서이다. 어떤 심정을 꾹꾹 눌러 담지 않아서이다.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인물이 되었다. 세상이 변했고 나도 능수능란하게 적응했다. 한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해 거의 화병에 걸린 적도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표면적으로만 사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원래 늘 변하는 게 세상 이치이고 거기에 맞춰 탈바꿈하지 못하면 살 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편안하다.


이 단편 속의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모른 체한다. 알면 알수록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미덕이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하찮은 말로는 그 심정을 표현할 수 없는 거다.       


가난한 어머니는 시골집 초가 단칸방에 산다. 작은 방에 혼자도 아니고 큰 며느리, 손자들과 살아야 한다. 큰아들은 집을 파산으로 몰아넣고 오래전 사망했다. 주인공인 둘째 아들 부부가 어머니를 뵈러 가면 형수네 가족은 하룻밤 묵을 데를 찾아 동네를 헤매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난이 원수’다. 주인공은 헤어날 길 없는 초라한 삶에서 잠시 한 발을 떼어낸 상태다. 어머니의 가난, 미래라고는 없는 무지막지한 나날은 나하고 관계없어야 한다. 어머니는 어머니고 나는 나니까. 나는 어머니에게 빚이 없다. 주인공은 그 속마음을 계속 되풀이한다. 형이 죽은 후로 집에서는 도통 그에게 해준 게 없다.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모친은 ‘아무것도 낳아 기르는 사람의 몫’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식 놈의 도리’는 엄두도 못 낼 처지다. 모자는 그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채무자일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면 받아서도 안 된다는 걸까. 주인공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도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런 분이 관청에서 추진하는 지붕 개량 사업에 동의하는 눈치다. 당연히 돈이 든다. 방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이유가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자기가 죽어 단칸방을 차지하고 누워있으면 가족들은 어디서 자며 문상객들은 또 어디서 음식을 먹느냐는 거다. 가난한 아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다.      


아내가 어머니에게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주인공으로서는 듣고 싶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이야기다. 아들은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집에 간다. 그들은 이미 빚으로 남의 집이 된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차마 입에 올리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모자새벽 눈길을 나선. . 오늘부터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집도 없이 떠돌아야 한다. 첫차에 아들을 배웅하고 어머니는 동네로 향한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 수 없다.      


‘......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 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창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져서 그럴 엄두가 안 생기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자고 그래 그리고 앉아있었더니라……’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닌 척한다.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눈이 부신 척하는 거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가 소리 내어 울었더라면 ‘눈길’이라는 단편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달랐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기댈 곳 없는 외로움을 이렇게 은밀하게 표현하다니. 이분은 눈 때문에 눈이 시린  애써 눈물을 참는 중이다. 햇살마저 어머니의 설움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들은 헤어지던 그날에 대해 물은 적이 없고 어머니도 답한 적이 없다. 그래도 그들은 안다. 수치스럽다는 것을. 의 자존심이 그 언저리 어딘가를 배회한다.


‘눈길’의 모자에게정서적 공감대가 있다. 만으도 눈치챈다. 제목이 '눈길'인건 참 멋지다. 한글이 만드는 동음이의의 묘미. 어머니가 말 너머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아들은 안다.    

  

프레드릭 베크만의 ‘오베라는 남자’에 나오는 오베는 ‘눈길’의 모자와 어쩐지 머무는 세계가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염치와 규범이 삶을 지배하던 시대를 산다. 인간 존엄성이나 품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오베의 아내 소냐가 사망했다. 오래도록 이 남자와 외부를 이어주던 인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오베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타인과의 소통이나 접점이 사라졌다. 그렇다 보니 말은 최소한이되 행동은 과잉이다.


누구든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한다. 세상은 목적이 있고 이치에 맞게 자동으로 움직인다.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고친다. 질서를 유지하려는 그의 말과 행동은 요즘 보는 ‘정치적 올바름’과 거리가 멀다. 남의 기분을 배려하는 자세라고는 없다. 사람들은 오베를 고집불통에 꼰대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삶에서 추방당할 처지에 몰렸음을 잘 안다.       


소냐는 어떻게 이런 남자를 선택했을까.     


그는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였다. 훈장이나 학위나 칭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소냐는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를 꼭 잡았다.      


오베는 상냥하지 않다. 그는 길고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질문이든 답이든 대부분 단문을 고수한다. 삶도 단순하고 실용적이다. 그는 직설법의 세계에 산다. 적재적소에서 일하고 산출하는  최고라고 배웠다. 이리저리 비유하고 슬쩍 비트는 방법은 모른다.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살아도 그의 속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대개는 '깊은 슬픔과 위로할 길 없는 분노가 뒤섞인 표정'에 익숙하다. 그러나 세상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상냥한 말과 표정이 필요한 때이다.      


이청준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모든 게 많이 변했다. 지금은 말하는 시대다. 그리움이나 애잔함도 사라진다. 매사 얇고 가볍다. 그래서 불과 수십 년 전 소설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말하지 않은 그것을 따라잡기 어렵다. 예전에는 함부로 드러내는 일이 조심스러워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웬만한 건 아예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SNS에는 말들이 홍수처럼 흘러 다닌다. 말인지 글인지 혹은 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진짜는 말하지 않는 거 아닐까. 감추고 아끼는 말들의 세계가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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