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본다면
윤이형 '피의일요일', 우나모노 '안개'
윤이형의 단편 ‘피의 일요일’(2006)은 제목만큼이나 살벌한 SF다. 오래전 읽었지만 전투 장면, 액션이 또렷이 기억난다. 왠지 쓰라린 아픔도 느껴진다. 주인공은 온라인 가상공간의 게임 캐릭터, 언데드 종족의 ‘피의일요일’이다. 100년 전 러시아 혁명을 떠올리는 이름을 사용했으니 어떤 인물인지 알만 한다. 쓰다가 버려진 혁명가. 그녀는 골렘을 죽이고 인간도 먹어 치우는 무지막지한 괴력의 소유자다. 주어진 업무를 완성하면 높은 신분의 마법사로 신분이 상승한다.
‘피의일요일’은 겁이 없다. 적진을 향해 돌진할 뿐이다. 잡념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도 없다. 당장 눈앞에서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해치워야 한다. 그녀는 죽지 않는다. 미완의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전원이 내려갈 때까지만.
일단 게임 아웃이 되면 실존은 사라진다. 그녀는 예전 기억을 얼핏 가지고 있지만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지능과 감정은 삽시간에 제로 상태로 돌아간다. 새로 시작된 환경과 그에 적응해 달려드는 괴물들을 현재 사용자의 능력에 맞추어 쳐부순다. 그녀의 살육 기능은 꾸준히 업데이트된다. 이런 일은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진행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데에 익숙하다. 그날 새로운 생각이 주입되기 전까지 ‘피의 일요일’은 앞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어느 날 그녀가 변했다. ‘마지막마린’이라는 인간 종족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 캐릭터에게 불온한 사상을 집어넣었다. 마지막마린은 서버에 은밀히 끼어든 해커 정도겠지. ‘피의일요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위 마법사가 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게임 사용자의 변덕과 흥미를 북돋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가상 캐릭터로 수없이 죽었다가 또 다시 사는 존재다. 마지막마린은 그녀에게 충고한다. ‘뒤를 돌아. 뒤로 돌아야 해’라고.
'피의일요일'은 이제 사용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행위다. 그녀는 돌아서서 게임 플레이어들을 직시찬다. 자신이 누구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중학생들이 웃고 소리 지르는 시끄러운 게임룸을 응시하겠지. 말을 듣지 않는 캐릭터에 사용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처리해야 할 괴물들을 등 뒤에 둔 채로 앞을 쳐다보는 그녀의 운명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피조물이라니. 제어되지 않는 게임캐릭터, 혁명에 의문을 갖는 반동은 소멸되리라. 넌 아웃이야.
인간 먹기를 멈춘 마법사. 상황을 깨달은 혁명가. 그녀는 자신이 누구 손에 놀아나는가를 지켜본다. 늘 자긍심에 차 있던 그녀는 자유 의지도 없는 초라한 존재아닌가.
'피의일요일'과 비슷한 이야기를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우나무노(1964~1936)의 ‘안개’(1914)에서 발견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아우구스토이다. 그에게 캐릭터라는 것이 있는지 감이 오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내가 누구인가?’를 고뇌한 것뿐이니.
부유한 상속인 아우구스토는 길을 걷다가 에우헤니아라는 미녀와 마주친다. 그녀는 부친의 빚 때문에 피아노 교사로 일하고 있다. 수많은 구혼자가 그녀 주위를 맴돌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마우리치오이다. 마우리치오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결혼하고 정착하는 일이 두렵기만 하다. 직업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의 빚을 갚아주지만 보답은 바라지 않는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한 이후로 문제 많은 세상도 아름답게만 보인다. 주변이 빛으로 찬란하다.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와 결혼할 것이다. 마우리치오는 먼 곳으로 떠나보낼 것이다. 그는 에우헤니아의 사랑과 정직함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결혼 전날 에우헤니아가 마우리치오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치와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는다. 죽을까? 차라리 죽자.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만든 작가, 우나무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 피조물이 감히 창조자를 만나다니 대단한 메타픽션이다. 우나무노는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진 걸까. 아우구스토는 자유 의지대로 죽든가 살든가 결정하고 싶다. 자신이 소설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주위는 혼돈으로 어지럽다. 안개만이 자욱하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다. 우나무노와 대화하면서 아우구스토는 자신이 스스로는 자살도 부활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허구로서만이 존재해 왔다.
아우구스토는 우나무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렇다. 이 작품의 저자도 인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릴 수는 없다. 이야기는 내적 논리에 의해 스스로도 움직이니 저자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테지. 인물이 단지 저자의 수고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이야기 안에서 스스로 진화해 나가기도 한다. 작가도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나 나나 죽는 건 마찬가지다. 언젠가 신은 당신이 꿈꾸는 것을 중단할 것이다. 심지어 독자, 그대도 죽는다. 모두 무의 세계로 돌아간다. ‘창조한 자는 창조되고 창조된 자는 결국 죽는다’. 존재는 자신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토는 죽었다. 작가를 만나 사망 선고를 받자마자 그날로 사망했다. 그는 무나무노의 꿈에 나타난다. 우나무노는 존재론적 고뇌에 휩싸인다. 자기 자신을 아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창조된 인물을 잘 아는 일이다. 저자 역시 도구이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알리기 위한 수단이다. 부활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다시 살아난다 해도 다른 사람으로 돌아올 것이다. 똑같은 꿈을 두 번 꿀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창조자여, 생명을 부여하기는 쉽다. 죽이기도 쉽다. 그러나 부활은 불가능하리라.
미겔 데 우나무노는 인간의 지성과 신 사이에 늘 있어 온 긴장 관계를 소설로 그렸다. 스페인은 오래도록 종교국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거기다가 당시는 파시즘이 세력을 키우던 때이다. 작가는 해직과 추방과 같은 힘겨운 생애를 보냈다. 이런 고통스러운 세계를 사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인물들은 뒤를 돌아본다. 두려운 일이다. 아우구스토가 작가에게 물었듯이 우나무노도 신을 향해 질문한다. ‘내 실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메타픽션의 인물이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처럼 작가 역시 몸을 더듬어본다. 초기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를 만났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담았다.
고독해도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