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작가인 마크로스코(1903~1970)의 한 시절을 극화한 ‘레드’라는 연극을 보았다. 로스코는 1958년 시그램 사옥의 지하층 식당 포시즌에 걸릴 회화 작품을 주문받는다. 그는 35,0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벽면을 채울 작품들을 그리기로 수락한다. 연극은 자본주의와 부유층을 혐오한 이 작가가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그리고 2년여 만에 계약을 해지하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로스코의 회화는 하인리히 뵐플린이 바로크 미술의 특징으로 제시한 ‘회화적인 것’의 추상적 변용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전후 추상표현주의 계열 작품들을 뵐플린의 용어를 빌어 ‘회화적 추상’이라고 명명했다.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클리포드 스틸, 마크 로스코 같은 이들의 작품이 그 예다.
로스코 역시 뵐플린이 말하는 ‘회화적인 것’, 즉 ‘깊이감, 운동감, 개방성, 통일성, 불명료함’을 추구한다. 그의 색채와 윤곽은 시간성이나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혼돈이드러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작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질서에의 파괴가 시작된다. 작품은 예술가 혹은 예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에게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의미와 존재 이유가 있어야 한다.
로스코의 본명은 마르쿠스 로스코비츠. 라트비아 출신 유대인이다. 어린 시절에 포그롬 현장을 직접 간접으로 겪었다. 1913년 박해를 피해 도착한 미국은 어린 소년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언어와 가치관이 딴 판인 곳에 상륙하자마자 부친은 사망하고 가족은 빈곤에 시달린다. 가족은 오레곤의 포틀랜드에 정착한다. 로스코가 고난의 십 대를 보낸 이곳은 미국 최초의 노동조합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결성된 곳이다. 젊은 로스코는 사회주의에 경도된다. 그는 조합원으로서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그런 로스코가 주류 회사의 호화로운 식당 내부를 장식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나중에 한 인터뷰 기사를 보면 그곳에서 식사하는 ‘every son-of-a-bitch’의 입맛을 떨어뜨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그곳을 방문한 로스코는 계약을 취소하기로 한다. 그 정도로 비싼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쳐다볼 리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계약을 해지한 그 그림들은 지금 영국 테이트 모던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어둠과 고요의 사원에 머문다. 식당이 아닌 성소에서숭배를 기다린다.
1970년 로스코는 슬럼프, 우울증 등으로 자살했다. 희망을 보려 했지만 삶은 쉽지 않았다. 연극 대사처럼 ‘레드’를 압도하는 ‘블랙’에게 그도 삼켜진 것일지 모르겠다.
최근에 로스코와 비슷하면서도 극단적으로 다른 인물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스타비스키'(1974). 알랭 레네가 감독하고 장 폴 벨몽드가 출연했다. 주인공은 S.A. 스타비스키(1888~1934)이다. 1930년대 프랑스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사기꾼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으로 프랑스 주류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사방천지가 벽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영화는 스타비스키의 옷차림, 씀씀이, 사기 행적을 추적한다. 그러나 마음도 황량하고 배경도 가난한 이민자에게 따뜻한 나라는 없다.
그의 노력은 합법적이지도 정상적이지도 않다.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의 여파는 프랑스라고 비켜가지 않는다.스타비스키는 나이트클럽, 카페, 도박장 등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점차 사채업자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정계의 중요한 인사들과 어울리는데 스타비스키는 그들도 늘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곧 공공 금융 사기 사건의 핵심에 선다. 채권을 마구 발행하고 장물을 판매하는 추악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악용한다. 이를 눈치챈 언론이나 경찰, 사법 권력이 있으면 즉시 매수한다. 뇌물 지급 명단에 오른 정치가가 130명 이상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문제는 1920~1930년대에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어느 나라든 극심했다는 점이다. 1933년 독일의 히틀러 선출이나 1936년의 스페인 내전으로도 알 수 있지만 이때는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극적으로 고조되던 시기다. 프랑스는 1789년 이래 자국민 스스로가 나라의 정체를 결정한다는 의식이 매우 강렬하다.
1930년대 전간기프랑스제3공화국은 급진당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주의적 경제 원리를 따르고는 있었지만 중간 세력의 지지가 없으면 정권을 잡기가 어려웠다. 급진당으로서는 사회당, 온건 좌파 등과의 연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때 스타비스키 사건이 터졌다. 스타비스키는 경제 관료들에 접근해 막대한 양의 국채를 발행하게 하고 이 돈을 빼돌렸다.
그가 뇌물을 준 이들은 현재 집권 세력인 좌파 연합이다. 보수 우익이나 언론에 좋은 기회가 왔다. 편협한 우생학 이론이나 극렬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던 파시즘 세력에는 스타비스키가 유대인이라는 점도 선동 요인이 된다.
쫓기던 스타비스키는 1933년에 자살했다. 아니 자살했다고 발표되었다. 정계와 연루된 희대의 스캔들은 범죄 은폐 시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소요 사태를 몰고 온다. 1934년 2월 우익 연합은 파리코뮌 이래 최대의 폭력 시위로 사회에 충격파를 던진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급진당의 쇼탕 정부와 각료들은 물러나야 했고 역시 좌파 연합인 달라디에 내각이 뒤를 잇는다.
스타비스키 스캔들로 20여 명 이상의 고위 관료가 기소되었다. 그들은 재판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무죄로 방면되었다. 뇌물을 준 사람은 의문사했고수뢰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이었다. 스타비스키 사건은 제3공화국에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만일 이들 좌파연합이 무너졌더라면 프랑스도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극우 세력에 휘둘리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스타비스키는 1,2차 대전사이 프랑스 정치사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물론 부정적인 면에서 그렇다. 그는 돈과 권력의 속성을 이용해 외줄타기에 도전했지만 참패했다.
로스코와 스타비스키를 작품 속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땅으로부터추방당한 이들이다. 로스코는사회주의에, 스타비스키는 자본주의에 흠뻑 빠져 있었다. 전자가정신적 영역을 거닌 반면 후자는 비할데 없는 물신숭배자이자 유물론자다. 두 사람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무언가에 쫓겨 스스로 삶을 마감한 건 같다. 추방의 상처는 깊고 길다.호모 사케르는 이런 것일까.
1910년대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러시아 화가 나탈리아 콘차로바(1881~1962)는 이 곳의 유대인박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그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몇몇 유대인 시리즈를 남겼는데 특히 ‘고양이를 안은 랍비’(1912)가 기억에 남는다. 화면 전면에는 유대교 랍비가 고양이를 껴안고 있다. 러시아 이콘화처럼예수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하게 한다. 세파에 희생당하는 민중이 가련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뒤로는 무거운 짐을 진 두 남자가 힘겹게 걸어간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는 중이다. 20세기 전반을 산 사람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은 참 힘든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