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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30. 2022

안다, 한다

언노운 걸,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지식인이란 많이 아는 사람을 뜻한다는 오해가 있었다. 지적인 호기심이 많거나 실제로 많이 안다고 해서 지식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공염불을 탁상공론이라고도 부르는 걸 보면 실천하지 않는 건 위선과도 연결되기 쉽다. 알고 실천하고 거기에다가 무언가를 형태로 만들기까지 한다면 진정한 지식인으로 불릴 만하다. 사람들은 이왕이면 바람직한 삶, 좋은 삶을 지향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진짜 지식을 가진 사람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음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인간의 활동양식을 테오리아, 프락시스, 그리고 포이에시스로 나누었다. 테오리아는 세계를 관조하는 지식이다. 프락시스는 이론적인 지식을 행위로 옮기는 일로 윤리적 실천 행위 양식과 관계하는 실천적 지혜이다. 포이에시스는 질료로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행위이다. 테오리아의 목표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앎 그 자체와 연관된다. 포이에시스는 인간이 사물을 생산 내지 제작하는 행위로 그 목표는 가공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프락시스는 정치적 실천 행위의 과정 자제가 목적인 행동이다. 이 행위는 가치 판단 실현과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가운데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테오리아와 프락시스에 다고 보았다. 즉 참다운 지식이란 단지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립된 지식을 토대로 윤리적 가치관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2016)은 '안다'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이 감독 형제의 영화는 늘 그렇듯이 담백하고 명쾌하다. 돌려서 말하거나 겉 포장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영화는 음향, 음악 효과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극적 반전과 같은 깜짝쇼도 없다. 단지 등장인물들이 겪는 윤리적 갈등을 보여주고 고민해 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인물들은 문제를 슬그머니 덮지 않고 자기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언노운 걸’에도 전작들처럼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 박애, 이런 표현은 몹시 식상해 보이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아는 말이지만 늘 그렇듯 프락시스는 쉽지 않다.       


제니는 실력을 인정받은 의사로 유명 병원에서 근무가 시작되기 전 동네 의원에서 잠시 일한다. 어느 날 제니는 특별한 상황을 만난다. 형사들이 조사차 나왔다. 전날 마감 시간 이후 들이지 않은 환자가 그다음 날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은 좀 느끼겠지만 곧 넘어갈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해결할 방법도 없다며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제니는 피살자가 흑인 소녀이며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걸 알게 된다. ‘알려지지 않은 소녀’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미제살인사건이 되어 모두에게 잊힐 수도 있겠지. 제니는 망자를 위한 최소한의 존재 증명을 해내고자 한다. 누구인지 알려서 묘지에 그 이름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날 밤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죄의식을 다소나마 더는 일이기도 했다. 동시에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도 믿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호세 사라마구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1997)에서 표현한 대로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이름을 안다 해도 죽은 여자아이를 위안할 수 없는데 이름까지 지워진다면 그 영혼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이름이라는 건 내가 한때 존재했다는 것, 다른 존재들처럼 유니크했다는 걸 의미할 테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등기소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엄격하게 갈라놓는다. 산 자의 자료는 죽은 자의 것과 섞일 수 없다. 한 번 죽으면 언제 살았었냐는 듯 등기 서류도 분리된다. 산자끼리만 잘 살면 된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기억난다. 여기서 ‘이름’은 유명인 뜻하는 건 아닐 거다. 우리는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여 인식체계로, 관심 망 안으로 들인다. 그후에야 그들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의 영어 제목은 ‘All the Names’이다. 이름이 없다는 건 어떤 사람 중 하나라는 뜻이다. 종으로서는 의미 있을지도 모르지만 개인으로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산자는 죽은 자를 곧 잊는다. 유명 인사가 아닌 경우는 망각의 정도가 더 심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존재감 없이 사라진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보여준다. 제니는 아마 그런 사람 아닐까.


무관심이 제일 편하다. 나의 평안을 깨뜨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제니가 모른 척한다 해도 법적으로 문제 될 일은 없다. 그녀를 비난할 사람은 없다. 비난할 사람이 하나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일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 배려를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죄의식이다.      

 

제니는 ‘알려지지 않은 소녀’를 알아내기로 마음먹는다. 마치 탐정처럼 죽은 아이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알고자 하면 할수록 단단한 벽에 부딪힌다. 벨기에의 한적한 마을에도 불법체류자들이 많은가 보다. 이들은 신원이 불확실하다. 생계비를 버는 일도 합법적이기 어렵다. 죽은 소녀의 주변 역시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녀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제니의 수색이 불편하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나약한 사람들은 소녀를 지우고 내몰려고 한다. 그녀를 들추어낸다는 건 자신의 비리를 밝혀내는 일이고 양심을 불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집단 무의식은 소녀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지우라고 명령한다.      


신원미상소녀는 아프리카 출신의 불법 이민자이며 미성년 매춘부다.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찾아낸 일이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한 매춘이다. 그녀는 그늘에서만 머물러야지 빛 으로 들어올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제니는 병원으로 들이지 않았던 자신도 버림받은 영혼을 또 한 차례 배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소녀는 제니 덕분에 이름을 찾았다. ‘펠리시 콤바’. 세상에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한 시민의 죄의식과 책임감이 영혼에 안식처를 찾아주었다.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건 다른 차원이다. 테오리아가 프락사스로 실현되는 건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 의지는 때로 사회의 통념이나 아집에 부딪혀 꺾일 수 있다. 그래서 안다 해도 실천하는 일은 두렵다. 대부분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가치 갈등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바로 는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프락사스에 덧붙여 자신을 드러내는 포이에시스를 남긴다는 것이 또 귀중하다. 제니라면 어떤 결과물을 남길까. 그녀는 실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윤리적으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형병원이 아닌 시 외곽의 작은 의원을 택해 남기로 한다. 환자들과의 전인적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로 들린다. 자신의 가치관을 헌신으로 드러내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큰 작품은 본인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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