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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15. 2022

불안하다

돈 드릴로, 노아 바움벡, 화이트 노이즈

모든 빛을 혼합하면 흰색이 된다. 우리 눈은 여러 색이 같은 정도로 자극하면 흰색으로 느낀다. 화이트 노이즈는 다양한 음이 섞여 일정한 패턴 없이 주파수 전체에 걸쳐 평탄하게 나는 소리다. 물론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때로 백색 소음은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두드러진 음을 덮어주기 때문이다. 온갖 소리가 섞여 무의미를 만든다. 정보가 섞여도 비슷할 것 같다. 정보의 늪에 빠져 있다 보면 때로 무엇이 진짜인지  어렵다. 가상이 현실인 척하는 길목에서 길을 잃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컴퓨터 시스템의 단조로운 소음, 딸랑거리고 끽끽거리는 카트 소리, 확성기와 커피메이커 소리, 아이들 고함소리, 그리고 이 모든 소리의 이면 혹은 저변에는 인간의 지각 범위 바로 바깥에 있는 어떤 형태의 생명체 무리에게서 나오는 듯한,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고함소리’      


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1984)는 새 정보가 구 정보를 바로 덮어버리는 시대, 상품이 출시되자마자 즉시 진부 해지는 시대에 어울리는 소설이다. 오래전 읽으면서 돈 드릴로라는 작가의 에너지, 상상력에 압도된 기억이 있다. 이후로 그의 소설을 몇 권 읽었는데 현대문명에 대해 비관적인 데다 묵시록적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이 큰 산을 비춘다. 그 산은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작가는 짙은 음영을 바라본다. 그것은 재앙과 파멸을 불러오는 음험한 괴물로 둔갑한다. 어디까지가 실물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 모르게 뒤섞인다.


작가는 우리가 문명의 위험한 촉수에 휘감겨 있다고 말한다. 대형 몰, 놀이동산, 고층빌딩,  미디어 등은  사람들쯤 얼마 죽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체제를 상징한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도 세상은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간다. 현대인들은 쇼핑몰에서 재충전감, 행복감, 만족스러움을 느낀다. 혹시 이성 집중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람들은 물건 진열대를 누비며 행복한 춤을 춘다. 자신의 값어치와 자존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모습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밝은 빛이 주위에 깃든다.’ 쇼핑객들은 계산대에 늘어섰다가 계산이 완료되면 문밖으로 나간다. 한 번 나가면 거꾸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어딘가로 가버린다. ‘보너스 쿠폰이 보장되는 죽음 후의 삶’을 이어가려나. 거대 몰은 어딘가 죽음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안드레아 거스키의 ‘99센트’(2001)가 생각난다. 거스키나 돈 드릴로는 슈퍼마켓에서 자본주의적 숭고미를 동시에 발견한다. ‘신비하고 장엄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곳’이다.      




            Andreas Gursky, 99 cent, 1999




잊고 있었던 ‘화이트 노이즈’의 충격을 노아 바움백이 동명의 영화(2022)로 일깨워주었다. 유명 히틀러 학과 교수인 잭은 학장의 권유대로 병적인 과체중, 부풀린 덩치, 과장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늘 날렵한 아담 드라이버에 익숙해 있다가 이런 모습에 많이 놀랐다. 잭은 히틀러 학과 교수답게 대중 선동, 공포와 경외심을 조작하는 방법을 잘 안다. 의미심장함, 위세를 드러내도록 스스로를 위조하는 인물이다.      


잭의 가족은 블랙스미스라는 한적한 소도시에 산다. 잭과 배비트는 여러 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거친 후에 맺어진 커플이다. 그들은 각자의 아이들을 합쳐 한집에서 복닥거리면서 산다. 미니멀리즘이 시대정신이 된 21세기의 눈으로 80년대의 과장과 복잡함, 수선스러움을 목격해보니 어딘가 낯설다. 핸드폰이 없는 집안의 식탁 풍경은 산만하기가 그지 없다. 네 명의 아이들은 정체모를 정치/경제/과학기술/건강상식을 꺼내놓는다. 어디에서 흘러들어온 정보인지도, 그 정보가 오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똑똑하다. 사고는 정반합을 따르지 않는다. 각자 자기주장을 되풀이한다. ‘그래, 너 잘났다.’ 잭은 한 집안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정보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데 넋이 빠질 지경이다.      


어느 날 블랙스미스에 재앙이 닥친다. 탱크차가 탈선해 충돌하면서 운반하던 화공약품을 공기에 유출시킨 것이다. 나이어딘 D라는 이 약품은 일종의 살충제로 인체에 치명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가스 구름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동차 피난 행렬에 오른다.      


피란민들에게는 소문만이 무성하고 진짜 정보는 없다. 방송에서도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는다. 언론이 다루지 않는 재앙은 재앙이 아니다. 대책 반원들도 피란민들을 훈련용 데이터로 취급한다. 혼란의 며칠이 지난 후, 미생물로 가스를 제거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한다. 모든 게 가상적으로 일어난 일 같다. 잭의 동료가 말한 대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폭주를 끊어놓으려면 가끔 대재난이 필요’한 건지.


아내 배비트는 건강하고 풍만한 여자다. 잭은 그녀가 충만한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런 아내가 향정신제를 몰래 복용한다. 시판된 적도 없는 약물 ‘다일러’. 그녀는 ‘올바른 태도와 적절한 태도만 주어진다면 유해한 상황을 가장 단순한 부분으로 환원함으로써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죽음’이다. 그녀는 죽음이 미치도록 두렵다. 그 공포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그녀는 이 위험한 약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인간 실험동물이 되었다. 약을 얻기 위해 프로젝트 책임자와 정기적으로 모텔에서 만나기까지 한다.     


죽음이라면 잭에게도 할 말이 있다. 그는 나이어딘 유출 사고 때 잠시 차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거다. 그는 이후로 ‘현대적 죽음’을 경험한다. 나이아딘 D는 인체에 30년 머문다. 현대적 죽음이란 ‘우리와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지니고 거창하게 폭넓게 자란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죽음은 더 크게 자라서 새로운 변종이 나타난다. 이 죽음은 민첩하게 적응해나가는 기술을 지닌다.’ 배비트뿐 아니고 잭도 죽음에의 공포에 휩싸여있다. 언제 어느 순간 죽음이 그에게 밀어닥칠지 알 수 없다. 그에게도 공포 치료제가 필요하다.     


소설은 현대문명의 허장성세를 말하려고 한다.  문명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며 성장해왔다. 괴벨스 이후 선동가들은 ‘공포와 더불어 종교적인 것에 근접하는 경외감’을 이용할 줄 안다. 모든 음모는 죽음으로 향한다. 거대함에 몰두하는 사람들, 미디어가 사건 사고를 다루는 태도, 대형 영화, 군중을 동원하는 정치 행사는 모두 죽음을 의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은 공포 그 자체를 감출 수는 없다. 작가는 우리가 그 공포를 감추면 감출수록 그것은 더 큰 구멍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잭은 다일러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총상을 입히지만 병원으로 옮긴다. 그는 그곳의 책임 수녀와 대화를 나눈다. 천국이 그려진 그림이 내려다보는 방이다. 그는 천국이 여전히 하늘에 있냐고 묻는다. 수녀는 ‘그런 걸 믿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라고 대한다. 그녀가 수녀 노릇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바로 지옥이니까요.’. ‘우리가 있어야 당신들이 산다.’ 즉, 남에게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게 웬일인가. 진정한 무신론 수녀다.


드릴로는 불확실성과 임의성, 혼돈이 마침내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거짓으로 쌓은 탑이 무너질까 봐 탑이 있는 척한다. 약물, 시이비 종교  거짓 현자들은 두려음을 잠시 잊게 해줄 뿐이다.  현대문명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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