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현대
지그문트 바흐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현대는 유동한다. 마치 물 위의 빙하처럼 둥둥 떠다닌다. 구조, 제도, 풍속, 도덕이 해체되어 희미하고 불확실하다. 발밑이 단단하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절대적이라고 여겨졌던 진리도 다원화, 상대화된다.
‘유동하는 현대’는 지그문트 바흐만(1925~2017)의 용어다. 그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다. 동구권 유대 지식인의 고난에 찬 긴 생애는 역설적으로 세계가 액체화되고 있음을 관찰하기에 적절했다. 만일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더라면 탈근대 사상가로서 우뚝 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흐만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다. 그는 폴란드 의용군이자 공산당원으로 전후 소련군과 함께 조국으로 입성한다. 그러나 승승장구도 잠시 1953년 군에서 강제 전역당한다. 이후 바르샤바 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명성을 얻었으나 1968년 폴란드 공산당은 바흐만의 모든 직위를 박탈한 후 그를 추방한다. 그는 텔아비브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는데 과열된 시오니즘과 비참한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실망해 이스라엘을 떠난다. 바흐만은 1971년 영국에 정착해 사망할 때까지 거주한다.
작가의 책 중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쓰려한다. 때늦은 소감문이다. 이미 포스트 모던 시대에 푹 젖어 살고 있으므로 누구나 아는 보편경험이다. 이 책은 지그문트 바흐만이 잡지사 청탁으로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쓴 44편의 편지 묶음이다.
글을 44편으로 제한한 까닭이 있다. 한 폴란드 시인이 자유에 대한 경외감과 희망, 자유의 도래를 염원하는 숫자로 44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기획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재치있는 발상이다. 바흐만은 44통의 편지에 자유라는 유령이 배회한다고 말한다.
바흐만은 자신과는 판이한 분위기에서 성장해 다른 가치관, 세계관을 지닌 현대인들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다. 1920년대에 태어난 이가 21세기에 적응하는 건 힘겨운 일이다. 그에게는 낯선 시간과 장소이며 거주자들은 외계인이나 다름없다. 작가는 이책을 여행기라고 표현했다. 역설적으로 독자는 그의 관찰을 통해 현 시대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타임 머신을 타고 100년 후, 현대에 도착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휴대폰에 빠진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외로움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프라이버시나 비밀도 본인 스스로 폭로하는 일에 놀란다. 공허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심리 근육이나 상상력 등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오히려 고독은 생각을 집중하게 하고 신중하게 해 진정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견고한 강철’ 사회의 부모들은 자기 단련을 강조해왔고 아이들도 규범적 행위를 해내야 했다. 반면 ‘가벼운 외투’ 시대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경쟁사회에 최적화되도록 돕는다. 무엇이든 돈을 치러 근심에서 탈출하려 하고 양심의 가책도 상업적으로 처리한다. 아이들은 과도한 소비도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일상적으로 보게 된다. 사물과 지속적인 우정을 맺지 않고 획득하는 순간만을 즐긴다. 이렇게 학습된 이가 자랑스러워하는 건 소유물이 아닌 스타일이다. 그렇다 보니 부대용품을 계속 바꿔줘야 한다. 그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란 오로지 죽은 사람들에게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며 낯설어한다.
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는 일은 이렇듯 공상과학적이지만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소비사회, 현대 문명의 병폐에 대해 진단만 하는 건 아니다. 치료를 위한 방안까지도 권유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안전과 자유라는 두 열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큰 전체의 부분일 때 안심하지만 개성을 추구하려는 욕구 또한 이에 못지않다. 바흐만은 이 두 가지 인간 욕구를 결합시키는 것으로 유행 숭배를 든다. 유행은 스스로 유지되며 스스로 충족되는 기묘한 기계 장치, 페르페투움 모빌레나 마찬가지다. 소비 사회는 두드러지려 하지만 결국은 엔트로피에 굴복하는 세상 원리를 이용한다.
소비사회의 인간은 무엇보다 소비자여야 한다. 쇼핑은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증거다. 끔찍한 재앙도 하찮은 골칫거리로 축소하는 강력한 행위다. 그러므로 나라를 구하는 건 소비자들, 순종적인 소비자들이다. 여기서 소비는 상업 자본이 아닌 정치 자본으로 변환한다. 상점은 약국이나 마찬가지다. 심리적인 불편함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달래주는 치료약이라고 훈련받기 때문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순환과정에서 뒤떨어진다는 공포감이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늘 치료약을 업데이트하고 점검하려 한다.
거의 19세기식 교육을 받았을 바흐만이 색다르다고 본 현상 중 하나가 문화 엘리트의 소멸이다. 이제 대중의 문화 취향은 편식이 아닌 잡식이 된 지 오래다. 사람들은 온갖 예술 형태들을 두루두루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와 무관한 문화는 없고, 모든 곳이 내 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도 까다롭게 선택하라는 말 대신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소비하라는 명령어에 적합하다. 예술 소비는 개인적인 관심사나 자유 추구에 부합해야 한다. 사람들은 규범이 아닌 제안, 규정이 아닌 유혹에 움직인다. 광고 역시 ‘충격은 강하게, 그러나 즉시 진부하게 만들기’ 전략을 좇는다.
그는 교육이라는 개념의 불변성에 입각해 훈련받고 배웠다. '형성'이나 '빌둥'같은 말은 불변하는 세계 질서가 있다는 가정을 전제한 것이다. 유동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지식도 간단하게 폐기되고 빠른 속도로 진열되는 일에 익숙하다. 세계는 언제든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현대는 배우는 일을 선호하게 하는 환경이기는커녕 망각하도록 사주한다. 살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이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속도가 문제다. 과거의 가치들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제도 교육에도 심드렁하다. 터득해가는 지식이 아닌, 실용적 지식이나 처세술이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학교가 아니라 바깥 세계를 주목한다. 교사보다는 상담전문가가 오히려 새 시대를 안내하는 전문가가 아닐까.
비판을 절제하려고는 하지만 바흐만은 현대문명이 어딘가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점술이나 마찬가지로 과학적 사고도 앞날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다고 본다. 확률을 믿는 건 위험한 일 아닌가. 세상은 원래 우연, 무작위적이지만 근대 문명은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키워왔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 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해 온 셈이다. 미래를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인간 행위는 변수들 중 가장 중요한 변수고 예측 불가능 중 최소한 예측 가능한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의 말처럼 미래는 ‘사람들이 현재 어떤 노래들을 부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볼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화가 경계 긋기와 더불어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여러 선택들을 관리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다루어왔다. 그 경계가 확신을 제공하고 사람들이 복종하면서 ‘질서 있는 세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경계가 있었던 적은 없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상호 접속할 틈새가 존재했다. 대화와 상호 연대가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다. 바흐만은 과거의 유대인이 경계 틈새를 오르내리며 양쪽의 불만과 불안을 덜어내는 역할을 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는 현대인에게도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방안을 계획하는 복잡한 임무가 주어져 있음을 강조한다.
불안정한 사회는 우리 세기만의 독특한 공포증을 만들곤 한다. 심지어 공포에 대한 공포, 포보포비아를 앓는 사람들도 증가한다. 한쪽에서는 과잉 생산, 다른 한편에서는 정리 해고가 거듭된다. 배제와 축출, 뒤처지거나 과도하게 주목받는 일, 거부당하고 무시당하는 일은 모두에게 악몽이다. 바흐만은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 되자고 한다. 운명은 경멸을 통해서는 극복할 수 없는 법이다. 피할 수 없다면 현재를 받아들이는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행위가 반항을 만들어낸다. 그는 알베르 카뮈를 인용해 '체념과 무관심을 벗어나려는 자유에의 노력이야 말로 인간 실존에 필연적 측면'이라고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현대를 낯선 이의 눈으로 보는 듯한 책이다. 작가는 본인의 삶을 뒤돌아보며 현대인이 걸어야 할 실천적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고독이나 고통을 홀로 감내하기보다는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하자며 글을 맺었다. 인간 냄새가 나는 진심어린 제언에 감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