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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5. 2022

자유라는 유령

루이 브뉘엘, 프란시스코 고야

루이 브뉘엘(1900~1983)의 ‘자유의 환상 The Phantom Of Liberty’(1974)을 인상깊게 보았다. 제목이 뜻하는 대로 자유는 유령처럼 잡을 수 없는 환각일지도 모르겠다. 루이 브뉘엘은 스페인에서 태어났지만 멕시코인이 되어 눈을 감았다. 그는 프랑코 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났으며 냉전 시대 매카시즘과 본인의 무신론적 성향 탓에 미국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런 불안한 위치로 인해 가치, 법,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했을 것이다. 세상을 풍자하는데 코미디 장르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초현실주의적 유머 코드는 우스꽝스럽지 않다. 심각하다.      


‘자유의 환상’은 극의 구성에서 일반 영화와 다르다. 마치 '트리아누스 황제의 원주'처럼 이야기가 이어달리기처럼 구성된다. 두루마리처럼 감싸고 전개되는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황제가 어떻게 새 땅을 정복했는지 그 과정을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생각난다. 소설에는 액자식 구성이  자주 눈에 띈다. 이야기 속 이야기가 꼭 필요한 건지 절로 의문이 든다. 작가는 돈키호테가 마주치는 인물들의 구구절절 사연을 알려준다. 누가 주인공인지 거의 잊을 때쯤 되면 돈키호테가 다시 등장한다. ‘자유의 환상’은 에피소드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A가 B와 만나는데 C가 등장한다. 그러면 이야기는 자연스레 C를 따라간다. 그가 D를 만난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인공은 D로 바뀐다. 우연이 모든 걸 지배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는 10여 개의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우리는 각자 삶의 주인공이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렇다. 브뉘엘에게는 등장인물 모두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 모습을 전반적으로,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1808년 5월 3일’이 이 영화의 모티브이다. 브뉘엘은 고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고야는 브뉘엘처럼 아라곤 출신인데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감독은 둘이 공유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고야가 궁정화가로 출세해 왕가나 상류 귀족과도 교유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40대에는 청력을 잃었고 말년에는 뇌졸중으로 시력을 포함해 한쪽 몸이 마비되었다. 그는 조국의 정치, 사회에 실망해 프랑스 보르도로 떠나 거기서 사망했다. 죽은 후에는 목도 없이 스페인에 돌아와 묻혔다. 그의 후반기 회화처럼 기괴한 일이다. 그는 인간사 온갖 일을 경험하며 남들이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들을 회화로 남겼다.    

 

프랑스는 1807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일으키며 스페인을 침공한다. 자유, 평등, 박애를 앞세운 프랑스혁명에 들뜬 유럽인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그러나 대부분 스페인 사람들에게 프랑스군은 침략자이며 학살자일 따름이다. 작품의 전면 왼쪽에는 이미 처형된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가운데 흰옷 입은 남자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죽음에의 회피 혹은 저항이다. 오른쪽에는 차례가 머지않은 사람들이 있다. 차마 사형 현장을 바라보지 못한 채 얼굴을 가린 채 흐느낀다. 한 화면에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고야의 시야는 세상 전체다. 브뉘엘 역시 고야의 눈처럼 빈틈이 없다.




프란시스코 고야, The Third of May (1808~1814)




다음은 영화의 줄거리다. 특이한 구성이기에 길지만 넣어보았다. 삶을 지배하는 것이 우연, 자의성이라면 법이나 정의가 의미있는 건지 질문히는 것 같다.


1808년, 톨레도. 프랑스군이 스페인 게릴라들을 끌고 들어온다. 군인들은 무방비로 늘어선 사람들을 차례로 처형한다. 화면은 갑자기 1970년대 프랑스로 바뀐다. 한 남자가 있다. 어느 날 어린 딸이 낯선 남자로부터 이상한 사진들을 받아왔다. 악몽을 꾼 남자는 다음날 의사를 만난다. 의사와 면담 도중 간호사가 들어온다. 그녀는 휴가를 내고 싶다고 한다. 간호사는 도중에 호텔에 들른다. 호텔에는 여러 명의 투숙객이 머물고 있다. 그녀수도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도박판도 벌인다. 옆방 남자가 이들을 초대한다. 남자는 벌거벗은 자기 엉덩이를 채찍으로 내리치라고 애인에게 명령한다. 또 다른 투숙객 남자는 자기 숙모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다. 거부하는 척하던 숙모도 조카를 유혹한다. 다음날 간호사는 또 다른 투숙객 남자를 태워 경찰서 앞에 세워준다. 그는 경찰들에게 법과 정의를 강의하는 교수다. 그러나 강의를 경청하는 경찰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한 남자는 교수 등에 나체의 여자 그림을 몰래 붙인다. 교수는 자기가 초대받은 한 가정에 대해 말한다. 십여 명 손님이 거실에서 변기 위에 앉는다. 다들 대소변을 보면서 우아한 대화를  나눈다. 배가 고파진 교수는 화장실같은 식당에 들어 문을 잠그고 밥을 먹는다. 강의를 듣던 경찰들은 총기 난사 현장으로 출동한다. 한 남자가 옥상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쏜 것이다. 경찰에 진압된 남자는 잠시 후 풀려난다. 환호하는 군중에게 록스타처럼 사인을 해준다. 경찰서에 한 부부가 딸과 함께 왔다. 재미있게도 이 딸이 사라졌다고 한다. 경찰은 꼭 찾아준다고 약속한다. 경찰청장은 다 귀찮은 나머지 근무 중 술집에 가서 여자에게 치근덕거린다. 그에게 갑자기 전화가 온다. 작년에 사망한 여동생이라는 거다. 그가 근친상간의 망상에 빠졌던 여동생이다. 이런 경찰청장에게 정부 고위 당국자가 시위가 일어났다고 알린다. 경찰들이 출동한다. 경찰서에는 고야의 그 그림 ‘1808년 5월 3일’이 걸려 있다. 학생들이 동물원에 모여들었다. 경찰청장은 학생들과 동물들을 향해 대포를 쏘아댄다. 놀란 타조가 둥근 눈으로 바라본다.   


영화는 자유를 기원하는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도 권력이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면서 마무리한다. 1808년의 스페인으로부터 1970년대 중반 프랑스까지 160년이 지났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자유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자유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어려운 말이다. 이사야 벌린(1909~1997)에 따르면 자유에도 ‘적극적’인 의미가 있고 ‘소극적’인 의미가 있다. 적극적 자유는 가치 실현과 관련이 있다. 무엇인가를 향한 의지로부터 출발해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궁극의 가치를 향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이나 결정론과 관계가 있다. 잘못하면 형이상학적 오만을 부를 수도 있다. 이념 추구, 정치참여, 입법 활동 등은 적극적 자유와 관계있다.


반면 소극적 자유란 각 개인이 취하는 자유  혹은 '~을 하지 않을 자유'다.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간섭이나 제약이 없이 자유 의지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싶어 한다. 소극적 자유의 옹호자들은 복지를 포함한 국가의 개입마저 제한하려 한다. 일반 시민들의 자유는 보통 소극적 자유를 뜻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문제를 일으킨다. 공동체와 개인이 부딪칠 때가 있다. 개인과 개인이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이사야 벌린은 다원주의를 주창했다. 최소 보편성을 가진 객관적 가치들이 여럿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자유의 환상’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개인의 자유와 도덕에 관해 질문한다. 에피소드의 첫 인물이 아이로부터 빼앗은 사진은 단지 건물 사진들이다. 그걸 자기식대로 해석한다. 그 안에 성적, 도착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여긴다. 현대 부르주아로 등장한 인물들은 자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타인의 마음, 권리, 심지어 목숨은 그다지 대단치 않다. 주변을 상대적으로, 주관적으로 보면서 마음 가는 대로 뜻풀이한다. 연쇄 살인범도 풀려난다. 아마 유력자의 자제일 것이다. 아니면 범인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온정주의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범죄자에게 매혹된다.


비밀과 프라이버시도 자기 스스로 공개하는 시대이다. 남들에게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는 일도 부끄럽지 않다. 혐오스러운 행위에도 뻔뻔하고 당당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성직자는 타락했고 경찰은 무능하다. 오히려 법과 도덕을 희화화시킬 궁리만 한다. 이런 세상에 모럴이 있는지 궁금하다.      


루이 브뉘엘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는 공동체가 거대하고 개인은 왜소한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다가오는 시대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미래에는 반대로 개인만 있고 공동체는 없다. 내맘대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개인들은 타인을 보지 않는다. 자유, 도덕은 어디에 있을까. 자유는 고작 환상일까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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