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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Mar 25. 2023

거부하는 사람들

더 웨일, 찰스 부코스키, 모비 딕

프랑수와즈 사강(1935~2004)은 스캔들이 많았다. 그녀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유명작가가 되었다. 권태에 취해서일까. 연애, 약물, 스피드 등 중독된 것도 다양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1990년대 마약 소지 혐의로 재판정을 들락거리게 된 사강이 자신을 변론하면서 한 말이다. 사실 내가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지 잘은 모르겠다.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지당한 말씀이라 여겼다. 점점 보수화되는지 요즘 와서는 매사 반신반의한다. 그런 거 보면 이 작가는 끝까지 전투적으로 살았다. 도무지 타협이라고는 모른다.     


파괴라면 떠오르는 이들이 많다. 저장강박증에 걸린 사람들, 애니멀 호더들. 그들은 집을 쓰레기장처럼 방치한다. 악취와 벌레 심지어 까지 집안을 바삐 돌아다닌다. 수십 마리의 동물들이 좁은 방 안에 가득하다. 털이 빠지고 안질에 걸린 강아지들,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고양이들이 우글거린다. 저 사람들은 어쩌다 저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런가 하면 문학이 오래도록 관심을 가져온 결핍된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창조물들도 생각난다. 토마스 드 퀸시, 허먼 멜빌, 에드가 앨런 포,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 플래너리 오코너, 카슨 매컬러스, 윌리엄 버로스, 찰스 부코스키와 그들의 피조물들. 어떤 작가들은 숨김없이 비관적이다. 독자들은 이런 작가들의 파괴 본능 속에 인간의 어두운 면과 갈망을 알게 된다.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은 부모의 기쁨이다. 대개는 자기를 위해서도 좋다. 그들도 호르몬이 과잉 분비되는 사춘기가 되면 반항하는 한때를 보내지만 이내 세상의 법으로 돌아온다. 이를 위반하면 불이익을 얻는다는 걸 알게 된다. 사회화는 기본 틀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그 틀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면 개선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삶에 긍정적인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가능해서 꿈도 꿀 수 없다면?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2022)은 바꿀 수 없는 어떤 것에 분노한 사람의 이야기다. ‘자기 파괴가 뭔지 보여주마.’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찰리는 270kg도 넘는 거구의 사나이다. 그렇게 큰 덩치로는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한다. 떨어진 물건을 주울 수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닦을 수도 없다. 라세 할스트룀의 ‘길버트 그레이프’(1993)에 나온 길버트의 모친, 보니 그레이프도 250kg이었다. 그녀가 이런 초고도 비만이 된 이유는 슬픔 때문이었다. 남편이 자살한 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에만 앉아 있다가 이런 상태에 이르렀다. 찰리나 보니 둘 다 슬픔으로부터 시작했지만 분노와 차기학대 뒤를 이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돌아오지 못한다. 고치거나 바꿔서 될 일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도 안전선 안과 밖이라는 경계가 보였을 것이다. 어떤 선을 넘으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쯤 안다. 그러나 그들은 훌쩍 선을 넘어버렸다. 안전선 그런 건 이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세상의 법을 지켜서 얻을 게 있다면 누가 말리지 않더라도 자신이 조절했을 것이다. 선 선 선. 본인에게만 보이는 어떤 선을 넘기까지 어떤 심리적 압박이 지독했을 것이다. 일단 그 경계를 넘어서면 세상 따위 안중에나 있을까. 그다음은 자신이 만든 서사방식에 따라 흘러가리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으므로.    

  

찰스 부코스키(1920~1994)는 비트 시대의 작가다. 그러나 비트 작가들의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무명 시절은 터무니없이 길고도 험난했다. 온갖 직종섭렵했다. 그 때문인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계급이라는 의식을 평생 지녔다. 이런 사고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후에도 변치 않은 채 줄곧 아웃 사이더로 남았다.


‘여인들’(1978)에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냉소, 이단적 경향이 드러난다. 헨리 치나스키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작가 본인 부코스키를 그대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치나스키는 이름이 좀 있는 작가다. 도박, 여자, 경마 그리고 술 이게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이다. 탐닉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이것만을 위해 사는 거 같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까지 마셔야 진정한 치나스키다. 취하지 않은 날이 있기나 할지. 독자가 염려할 정도다.       




 



제목이 ‘여인들’이니 여자들이 늘 주위에 있어야 한다. 한 명씩 따로 올 때도 있고 여럿이 동시에 몰릴 때도 있다. 흠, 70년대 여자들은 이런 중독자에게도 매력을 느꼈나 보다. 아니면 부코스키가 자기 자랑에 취해 유사 자서전을 쓴 건가. 작가 낭독회가 끝나면 젊거나 나이 든 여자, 아름답게나 수수한 여자들이 모여든다. 이 남자랑 데이트 좀 해보려고 안달이다. 오, 불건전해라. 수도 없이 바뀌는 여자들이여, 이름 외우기도 어려웠겠다.      


나는 무에 정착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부류, 그리고 이런 삶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살아서야 재미있는 사람이 될 순 없었다.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치나스키인지, 부코스키인지 이분은 사회가 지시하는 가치 따위 관심 없다. 소설에는 향락, 퇴폐, 파괴 이런 낱말들늘어서 있다. 아마 일부러 이럴 것이다. 여자들, 술, 도박이 어느 정도까지는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즐거움이 쾌락의 단계로 올라간다. 그는 그것도 넘어선다. 더 이상은 탐닉도 아니다. 그 다음부터는 파괴의 경지가 아닐까 한다. 나 포함 다 파멸시키고 말리라 하는 오기 같은 것. 그는 미국 사회를 믿지 않았다. 그 증오를 이런 식으로 드러냈으리라.     


그래도 최고봉은 역시 허먼 멜빌(1819~1891)이다. ‘모비 딕’, ‘피에르 혹은 모호함’, ‘필경사 바틀비’, ‘빌리 버드’ 등을 읽어보면 멜빌이 19세기 인물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존적 경향이 농후하다. 멜빌은 십 대에 부친이 사망한 이후로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그중에는 그 유명한 고래잡이 선원도 포함한다. 40대에는 세관원으로 20여 년이나 근무했지만 생활은 늘 어려웠고 자녀들은 젊은 나이에 숨졌다.      


'모비 딕'(1851)의 에이하브 선장만큼 소멸하려 온갖 노력을 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현대 작가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신경 써야 한다. 병든 인간 자체도 힘들지만 자연 파괴자, 동물 학대자는 더더욱 금기다. 출판사에서 자체 검열로 제외할 것이다.


에이하브는 모비딕을 아서 바다를 헤매고 다닌다. 그는 죽음에 도취했다. 그러더니 소설에 난데없이 고래 잡는 도구들, 고래 화석, 고래 뼈, 용연향이 등장한다. 갑자기 감정을 스톱시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파국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잠시 유예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래학이 소개된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랄까. 이 시간이 지나면 에이하브는 검은 어둠을 향해 곧바로 걸어갈 테다. 각성인지 도취인지는 판단 불가. 보통 이런 사람은 자기 심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그가 하는 일은 세상에의 거부, 바로 그것이니까.     


'필경사 바틀비'(1853)나 '빌리 버드'(1924) 수동적인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죄 많은 세상을 향해 아무것도 외치지 않는다. 바틀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다가 굶어 죽었다. 반면 빌리 버드는 군법 재판에서 ‘더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들은 바보성자, 유로지비들지도 모른다. 멜빌은 세상에서는 더이상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차라리 자멸해 버린 거 아니었을까.


이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고려하지 않는다. 게임에 이기고 싶은 게 아니고 게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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