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의 속도

2026년 2월 11일 수요일

by 전귀자씨

세종 출장을 마치고 오송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KTX를 탔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천안아산역에 도착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을 때 한 어르신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팔순은 훌쩍 넘겼을 것 같은 어르신은 머리 위 선반에서 짐들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짐을 옮기는 모습이 나무늘보를 연상케 했다. 나를 비롯한 주변 승객들은 그를 주시했다. 저 속도로는 천안아산역에서 하차하기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누구도 도와드리겠다며 선뜻 나서진 못했다. 좀 느리긴 해도 어르신 나름의 숙달된 루틴이 있는 듯했다. 구두를 벗고 의자 위에 올라가 짐을 선반 끝으로 당기고, 의자에서 내려와 선반 끝에 매달린 짐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일련의 동작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그가 순간 휘청이기라도 했다면 누구든 일어나서 손을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함부로 개입하기 어려운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계속 보다 보니 천안아산역이 그의 목적지도 아닌 듯했다. 어르신이 천천히 짐을 내리는 동안 옆자리 할머니는 외투를 입고, 남편이 내린 짐을 한쪽으로 정리했다. 부인의 속도도 나무늘보처럼 느렸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그러나 매우 익숙한 동작으로 각자가 맡은 일을 했다.


노부부가 모든 작업이 끝냈을 때, 기차에선 “잠시 후 광명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천안아산역부터 광명역까지는 약 15분. 노부부에게 천안아산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은, 광명역에 내릴 준비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노부부는 그들이 쌓아온 세월만큼 무거워진 일상의 속도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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