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에서 쏟아진 콜라가 이마를 타고 내려와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때는 20살인가 21살인가. 동네 맥도널드에서 친구 ‘굥니’와 싸웠다. 싸운 이유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하찮은 이유였다. 굥니가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말했다.
“야..! 진짜 니 얼굴에 확 콜라 붓고 싶어.”
나도 지기 싫었다.
“부어봐~! 부어봐!! 붓지도 못할게 센 척 쩔어.”
“진짜 붓는다? 진짜 붓는다???”
굥니가 쥐고 있는 콜라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굥니의 눈은 광기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나는 진짜로 무서워졌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해봐! 할 수 있으면 해 봐!”
턱 끝을 위로 올리며 나는 끝까지 센 척을 했다. 참을 수 없었던 굥니는 진짜로 내 머리 위에 콜라를 부어버렸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친구 ‘슈렉’이 내 얼굴에 흐르는 콜라를 냅킨으로 닦아줄 뿐…
콜라 사건으로 나라는 사람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나는 싸움꾼이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면 나도 그만큼 응당한 화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모토인 사람이다. 화를 내는 것은 너무 쉬웠다. 내가 화를 내면, 상대방도 하나같이 화를 냈다.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싸울 각오를 다지는 것, 이제 곧 싸움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과거의 그 차가운 ‘콜라’가 10년 후, 돌연 표정을 바꾸어 나에게 들이닥쳤다. 그날, 사무실에서 나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J에게 화를 냈다. J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강도가 세서 ‘며칠간은 좀 서먹서먹하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긴장감이 가득 찬 공간에서 J가 갑자기 얼음이 가득 찬 콜라를 담아 건넸다.
“대리님,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당황했다. 내가 낸 화에 콜라로 답변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J도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얘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나에게 콜라를 줄 수 있지. 나중에 J에게 물어봤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냐고. 나는 너의 사회생활 대처 능력에 깊게 감명받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J는 정말 사회생활 만렙의 경지에 오른 건지 기가 막힌 답변을 했다.
“사회생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대리님이랑 잘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던진 싸움에 ‘다정한 콜라’로 반격당한 일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화나 짜증을 보인다면, 나도 ‘다정’으로 반격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에게 꽤 심각하게 혼이 났다. 혼이 나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죄송하다고 말은 하긴 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다. 그때 J의 다정한 콜라가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볼까. 어떻게 해.. 못해.. 젤리라도 드려볼까… 아니야.. 도저히.. 못하겠어.. 몇 분 동안 내 뇌 속에는 다정한 콜라가 고장 난 가게 간판처럼 깜빡 깜빡 거리며 등장했다. 간판 불을 켤지 말지 망설이고 있던 참에 다시 팀장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많이 화났어요?” 팀장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본인이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공감해 주었다. 팀장님이 다정한 말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또 한 번 다정함에 습격당한 것이다. 다정함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겪어보니 화보다 다정함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도 분명 화를 낼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대신 따뜻함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의 전략에 나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다정한 콜라 전략을 나도 최근 사용해 봤다. 타겟은 내 정수리에 차가운 콜라를 선사한 굥니. 오늘도 어김없이 투닥투닥거리다가, 굥니가 말했다. “야! 우리 사이는 슈렉 없었으면 진작에 쫑날 사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오래된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에 지지직 전류가 흘렀다. 하지만 지금이 ‘다정한 콜라’가 필요할 때라는 걸 알아챘다. 다정한 콜라 간판 스위치를 딸칵 눌렀다.
“섭섭해~ 그렇게 말하니까.”
내 말을 듣고 굥니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게 생각해”
역시 다정한 콜라 전략은 막강하군. 다정한 콜라 전략이 앞으로도 얼마나 먹히는지. 승률은 어떻게 될지. 앞으로도 여러 번 실험해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