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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Dec 16. 2022

몸의 일기

감각 채집

몸에 관련된 책은 없을까? 궁금했다.

건강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몸을 알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몸의 일기’라는 책을 찾았다.


루소가 산책길에 식물채집을 했던 것처럼 나도 내 몸을 채집하고 싶다. 죽는 날까지. 그리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한 남자가 10대에서 80대까지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 써온 일기 형식의 책. 일기 첫 꼭지마다 나이와 개월수까지 적혀 있어 실화처럼 느껴지는 소설책이었다. 이 작가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나 보다. 내면의 일기, 정서 일기가 아니라 몸에 관련된 일기만 쓴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하고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 몸이 일으키는 감각의 반응을 알아내기 위해 10대 시절, 친구들과 실험을 한다. 잠을 깨는 건 여러 감각들 중 하나가 반드시 신호를 보내서다.

청각: 문 닫히는 소리에 깬다.
시각: 다마스 선생님 침실의 불을 켜는 순간에 눈이 뜨인다.
촉각: 엄마는 언제나 날 흔들어 깨웠다. 사실 흔들 필요까진 없었다. 엄마가 내 옆을 스치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깨었으니까.
후각: 초콜릿과 구운 빵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잠에서 깰 수 있다.
이제 남은 감각은 미각 뿐, 친구가 입 안에 소금을 집어넣어 준다. 그리고 깬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감을 동시에 자극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궁금해져서 친구들과 ‘총체적 기상’의 실험을 시도한다. 동시에 다섯 가지 자극을 주어서 주인공을 깨우는 것이다.

말맹은 날 흔들었고 루아르는 내 입에 식초 한 숟갈을 넣었고, 포미에는 눈에 손전등을 갖다 댔고 자프랑은 코 밑에 암모니아 묻힌 솜을 갖다 댔고, 에티엔은 귀에다 대고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자 난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더니,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휘둥그레 뜨고, 몸은 당긴 화살처럼 긴장된 채 꼼짝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 실험은 결론: 잠들어 있는 사람의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면 그를 죽일 수도 있다.


20대부터는 몇몇 여자와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등장한다. 몸이 폭발하는 그 순간까지 나아가는 그의 여정을 나도 일기를 읽으며 함께 다. 부인과의 애정도 성격, 가치관, 대화, 감정 등등이 아닌 몸이 느끼는 사랑만을 기록했다 . 부인의 몸을 만나는 순간 주인공은 그제야 집에 돌아간다는 의미를 깨우쳤다고 말한다. 둘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집에 돌아간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낀다. 바로 자신들만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녀도 그도 운이 좋았다. 서로의 내면에 살아있는 건강한 동물성을 제대로 찾아내줄 짝을 만난 것이다. 하루에 6번까지 부인과 기록을 세우고 30대까지는 날마다 한번씩은 사랑을 나눈다.

오늘밤 말 그대로 모나를 삼켜버렸다. 콧구멍과 혀로, 모나의 겨드랑이 속에, 젖가슴 사이에, 엉덩이와 장딴지 사이에 코를 파묻고는 깊이 숨 쉬고 핥으면서 그녀의 맛, 그녀의 냄새를 포식했다.


40대에 접어들고부터는 벌써 병이 그의 몸에 동거를 신청한다. 전쟁통에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엄마와의 불화 때문에 불안증이 있었던 그에게 심장을 비롯해 이명, 비출혈, 불면증, 신트림, 건망증, 잇몸병 등등의 짖궂은 손님이 찾아온다. 그 사이 자식들은 성장하고 손주를 낳는다. 아들을 키우면서는 아들 얼굴에 있는 눈썹이 하는 말, 이마가 하는 말, 눈이 하는 말, 코가 하는 말, 뺨이 하는 말, 입술이 하는 말들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아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53세, 7개월
그레구아르가 태어났다. 손자가 생기다니, 나 참! 실비는 완전히 지쳐 있고 뷔뤼노는 엄청 아버지 티를 내고 모나는 기뻐 어쩔 줄 모르고 그리고 나는 …. 아기의 탄생을 천둥에다 비유해도 될까? 처음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친숙해진 이 자그마한 존재만큼 날 감동시킨 게 내 평생에 또 있을까. 병원을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혼자서 세 시간을 걸었다. 그레구아르와 난 의미심장한 눈길을 나누며 영원한 사랑의 계약을 맺었다. …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길거리를 세시간이나 걷고 또 걷는 그의 모습이라니. 감동이 그의 몸에 에너지를 번개처럼 내리꽂아 줬다.   


60대부터는 느릿느릿 느림보가 된다. 몸은 느릿해진다. 세상의 시간에 몸의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신호등을 건널 때의 세상의 시간은 턱없이 빠르다. 몸은 이제 몇 발자국 내딛었을 뿐인데 말이다. 젊은 날에는 영웅처럼 몸의 한 부분이 도드라지더니 나이가 들수록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독불장군이 되어 각자의 명령을 내리며 독자적인 행보를(각종 질병) 요란하게 걷기 시작한다. 그래서 몸의 일기는 노년에 훨씬 더 풍성해진다. 동거인들을 받아들이고 보살펴줘야만 한다. 수많은 질병들은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몸과 함께 할 동거인일 뿐이다.


70대에는 몸의 부활을 맛보기도 한다. 유명 인사이기도 한 그는 강의로 출장을 갔다가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아프리카계 미녀에게 유혹을 당한다. 그녀는 25세. 결혼 이후로 일부일처를 철저하게 지켜온 그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몸의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가 없다. 마음은 안 된다고 하는데 그의 몸은 그녀를 따라 호텔방에 들어간다. 거역할 수 없는 매력에 따라는 왔지만 ‘안 될 거야’라고 마음을 접은 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그녀는 그를 부활시키고야 말았다. 출장 내내 부활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다. 참 쿨하다. 서로가 오랜 시간동안 구축한 시간의 건축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몸과 정신은 엄연히 분리다. 몸이 정신에 끌려가지도 않고 정신이 몸에 끌려가지도 않는다. 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정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몸의 이야기를 각각 들어주면서 둘이 화해하고 친해지는 일을 평생을 걸쳐 해 나가는 이 남자.  


방광이 문제가 생겨 소변줄을 달아야 했다. 발목에 대롱대롱 달린 노란 주머니 때문에 곤혹을 치르지만 이마저도 몸의 이야기라며 귀 기울인다. 80세에는 기력이 쇠한다. 그러나 40년만에 레지스탕스를 함께 했던 열정적인 동료 팡슈를 만나고 그의 몸은 다시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낸다. 그의 몸에 에너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팡슈와 함께 활발하게 사회 참여를 하는 동안 몸은 활기를 찾는다. 열정을 태운다. 20대에 함께 했던 시간들만큼이나 열렬하게, 쌩쌩해진 몸은 아프지도 않는다.


그러나 의사가 됐던 첫 손주, 그레구아르가 수두로 20대에 죽자 그의 몸은 수난의 시대로 접어든다. 몸을 그대로 방치하고 다녔다고 해야 하나. 운전을 하다가도 운전 하는 걸 깜빡하고 뒷좌석에서 책을 찾다 자동차가 굴러떨어지기를 몇 번이나 하고 걷다가 구덩이에 빠진다거나 자동차에 치일 뻔 한 적도 수없이 많아지자 문제 해결차원서 아내가 그를 베네치아로 데려간다. 감각의 폭죽이 매일 터졌던 신혼여행지다. 젊은 시절 사랑을 나눴던 비밀 장소들을 순례하니 그의 기분이 전환된다. 둘은 마냥 걷는다. 그러자 손주의 죽음이 받아들여진다.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심리적, 감정적, 촉각적, 미각적, 청각적인 면에서의 감미로움이 채워지자 위안을 받고 몸은 다시 활보한다.


결국 때가 왔다. 피가 더 이상 생성이 안 되는 병이 찾아왔다. 수혈을 두 번 느릿느릿 받고 잠시 힘이 돌아왔지만 더 이상 수혈로 연명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리며 힘겹게 일기를 쓴다.

끝이 가까워 올수록 하고 싶은 말은 많아지는데 기운은 점점 더 달린다. 매 순간 몸이 달라진다. 악화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기능을 느려진다. 가속과 감속...팽이처럼 돌던 동전이 이제 그만 돌려고 하는 것 같다.
라루스 사전의 인체 해부도를 마지막으로 거울에 붙여놓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인체 해부도와 비교한다면 너무 보잘것없다. 생일 축하해.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다 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편안하고 좋다.


결국 그는 해부도 보다 못한 몸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색찬란했다. 난 곧바로 아들의 볼을 손가락으로 스스슥 만지며 손가락의 감각을 느껴본다. 아들이 몸을 내 몸으로 밀착시켜 친밀함을 드러낸다. 내 몸에 생기가 퍼지는 파동을 귀기울여 듣는다. 피가 잘 돌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두 팔로 아들을 꽉 껴안고 볼을 비빈다. 어깨의 뻐근함이 사라지고 두 팔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워졌는지, 볼에서 일어나는 온기를 가늠해 본다. 내 몸의 일기도 첫 줄 시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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