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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Apr 04. 2023

엄마의 인생은 몇 층일까요?

영화 파벨만스를 보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라는 파벨만스.

주요 스토리는 감독님의 두 가지의 상처에 관해서다. 하나는 토네이도와 닮은 엄마로 인해 가정이 깨진 것,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라서 당한 학교 폭력이다.

영화를 보고 두 밤이 지난 새벽 아침, 일어나자마자 문득 떠올랐다. 감독님은 정말 너무너무 아픈 상처를 꺼낸거구나. 특히 엄마에 관련된 부분이 영화에서 보이는 대로가 아닐 수~도 있구나. 감독님 인생의 슬픔을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예술적으로 고혹적으로 만드신 건 아닐까.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다. 감독님이 유대인이라고 주먹으로 때리고 학교 폭력을 가했던 주동자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영상을 위해 카메라를 담당한 10대 시절의 감독님은 폭력배를 에메랄드빛 가득한 해변가에서 오일에 반질거리는 구리빛 근육질의 훈남 주인공처럼 카메라를 들이대서 찍고 편집해서 영상을 만들어냈다. 얼마나 멋진 작품이었는지 평소에 폭력배가 짝사랑하던 조신한 여학생이 와서 키스까지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인생에서는 너저분한 싸구려 폭력배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상에서는 눈부신 캐릭터로 변신했다. 본인 자신도 믿지 못 할 모습을 10대의 감독님이 만들어 냈다. 그때 감독님은 영화라는 매체에 매혹되지 않았을까. 인생은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영화는 얼마든지 뒤집고 비틀고 초점화해서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엄마 이야기의 작은 소품이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 엄마는 감독님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고 피아노를 치는 손을 지키기 위해 설겆이를 하지 않을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남편과 남편의 절친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런데 만약 엄마의 그런 모습이 폭력배의 장면처럼 비틀고 뒤집어서 재창조한 모습이라면? 인생에서는 아이들 넷을 버리고 결국 남편의 절친에게로 떠나버린 엄마를 인생의 느지막한 나이에 아름답게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만들어냈다면? 슬펐다. 감독님의 영화 A.I에서 인공지능이 얼마나 엄마를 갖고 싶어했는지 그 절절함에 눈물을 흘린적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A.I의 마음이 곧 감독님의 마음처럼 생각되었다.


인생의 비극도 영화에서는 눈부신 이야기가 되고 캐릭터가 되고 예술이 될 수 있었다. 영화는 어둠을 빛으로 만들어낸다. 카메라를 정면이 아닌 요리조리 바꿔 들이대서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이라고 감독님은 말하는 듯 했다.


그럼 난 이런 생각을 한다. 현실의 70대가 넘는 우리 엄마도 어떻게 빛나는 존재로 변신해주면 좋을까. 물론 우리 엄마는 여전히 내 곁에서 따스하고 맛있는 요리를 해 주시며 나를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인생을 찬란하다고 생각지 않으니 감독님처럼 어떻게 비틀기를 해서, 카메라의 각도를 달리해서 엄마의 인생에 오색찬란한 빛을 보내줄 수 있을까?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점핑을 하는 승화는 어떻게 이뤄내야 하는 걸까? 고민에 빠진다.


인생에서는 어쩌면 후지고 바랜 것 투성일지 몰라도 예술은 그 인생들을 되살려낸다. 그래서 인생과 예술은 번지수가 같을 지도 모른다. 다만 층수는 다르겠지. 1층의 인생을 예술 계단을 딛고 3층, 5층, 20층까지 올라가게 할 수 있을까? 엄마의 인생은 몇 층까지 올려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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