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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규 Feb 22. 2024

간접화의 세계와 상상력 [문화 전반]

거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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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그림은 SBS뉴스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얼마전 서울에서 또다시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가 있었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였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배리어 프리 디자인이 많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 (배리어 프리: 모든 시민이 자연스럽게 사회에 참여-직장 생활, 가정생활, 지역 사회생활-할 수 있는 참가형의 성숙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참가를 방해하는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축소 제거하는 개념)



2001년에는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 이용자가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고, 최근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예산 반영은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서울시는 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 공사 예산을 119억원에서 96억원으로 오히려 삭감하기도 했다.



한동안 장애인분들을 몇 번이나마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노력했던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듣지 않았으니까. 변해왔다기에는 속도가 너무 더뎠고, 대부분은 남 일 취급했으니까. 우리가 느꼈던 며칠간의 불편은 ‘통행권을 보장해달라’고 외치던 그들에게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교통약자가 이용할 수 있는 저상버스 도입률은 한참 모자라고 그마저도 장애인이 타려고하면 귀찮은 기색을 하거나 무시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여전히 있어 실제 교통약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통계화된 수치보다 훨씬 더하다고 한다. 교통부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식당이나 카페나 공연장 등을 살펴보면 아직까지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곳이 더 많다.



그래서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쉽게 비난하지 못하겠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있는 카페 상가의 장애인 화장실에는 장애인들을 위한 손잡이에 이만큼의 녹이 슬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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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다른 곳은 깨끗하고 멀쩡한데 장애인들을 위한 이 공간은 이만큼 방치되어 있다. 심지어 이 건물 맞은편에는 장애인을 위한 사업을 다수 진행하는 복지관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봐도 우리나라가 장애인과 약자에 관한 부분에서는 이렇게나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번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는 그간의 불편과 답답함이 터져나온 현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이번 시위를 벌인 장애인분들의 방법을 두둔하지는 못하겠다. 지하철에서 벌어진 이번 시위는 많은 불편을 야기했다. 출근길에 벌어진 만큼 출근이나 개인일정에도 지장이 많았고, 사실확인은 못 했지만 가족이 아파서 급한 상황인데 병원을 가지 못하고 있는 남자분이 절규하는 영상도 인터넷에서 봤다.



시위는 필요하지만 왜 이렇게 많은 불편과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가 하는 반감 여론이 형성됐고, 다른 장애인 협회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떨어뜨리는 이런 방식의 시위를 다른 장애인 단체와 협의도 없이 벌이는 것은 잘못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던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언가 변했는가? 이번 시위는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 실질적인 통계나 현안 법 개정 등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불편이 큰 만큼 논란이 많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다시 한 번 환기되기는 했으나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반감을 샀다고 봐야할 것 같다.



솔직히 최근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는게 좀 조심스럽다. 글이 양쪽의 입장을 오가는걸 보며 느꼈겠지만 특정 입장을 지지하거나 비난하고자 쓰는 글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간접화된 세계들에 대하여.



최근에 눈에 띈 사건이 이 시위였을 뿐 이 글에서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삶들을 외면했고,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로인해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이들의 불편과 삶을 상상하고 함께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모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불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내가 그 시위의 불편을 사실 겪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시위로 불편과 아찔한 순간을 겪어야 했던 이야기도 지금 나에게는 간접화되어있으니까. 우리는 남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쉽고 매정해지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황현산 선생님의 책 [사소한 부탁]을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간접화의 세계”라는 제목을 가진 글의 내용이다. 이번 글의 제목 ‘간접화의 세계와 상상력’도 여기서 빌려왔음을 밝힌다.







춘천에 있는 한 대학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교수들이 교수 휴게실에 모여 춘천과 서울을 잇는 자동차 도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춘천 출신이기도 한 나이든 교수가 말했다. “옛날에는 산길로 덕두원 고개를 넘어갔는데” 그는 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하인에게 말고삐 잡히고 한가롭게 이동하는 그때가 더 좋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잔등에 탄 사람이면 좋았겠지만, 말고삐 끄는 사람이었으면 어떡하게요.” 분위기가 조금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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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을 좋아보이는 쪽에 이입시킨다. 궁이나 성곽에 놀러가면 한복을 빌려입고 산책을 하며 자신이 왕이나 공주가 된 듯 상황극을 하고, 드라마 촬영지에서는 조연이 아닌 주인공의 한 장면을 따라하며 사진을 찍는다. 영화 <한산>을 보러가면 손으로 배를 저어야 했던 병사들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에 자신을 이입한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 자기 투사는 우리의 편향되고 편협한 시야와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관심있는 쪽은 보통 밝은 쪽이다. 우울하고 어둡고 힘든 이야기는 자꾸만 피하고 싶어한다. 학창시절 배웠던 롤스의 무지의 베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수 있고 지금 서 있는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조금은 바뀔 것이다. 나중에 내가 그 입장이 되었을 때 쓸 수 있는 보험이라고, 다소 불순한 의도라고 생각되어도 좋다. 그렇게 한 발씩 시작하며 바뀌는거니까.







재미교포 한 사람이 십수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그 소감을 적어 온라인에 올린 글이 있다. 그는 먼저 한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편리한지를 말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전자화, 자동화 되어있다. ...중략... “언제든 열린 가게들과 대리운전 서비스”도 언급한다. 재미교포는 이 편리한 나라를 왜 사람들이 지옥으로 느끼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국이 지옥인 이유는 벌써 그의 묘사 속에, 또는 윤서인의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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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예찬하는 저 재미교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갖 편의성의 이기들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인터페이스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지하철의 스크린도어(안전문)를 보지만 그 뒤에서 죽어가는 젊은 수리공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 수리공을 간접화하고 저 값싼 택시의 운전기사를 간접화할 때 한편에서는 우리가 삶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곤경이 간접화된다. 우리는 저 간접화된 세계의 사람들에게 모든 불편과 위험과 치욕을 맡기고 때로는 죽음까지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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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와는 관련없어 보이는 타인의 삶, 게다가 그것이 안 좋은것일수록 더 쉽게 간접화하고 만다. 마치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나와는 먼 이야기인것처럼. 그러나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삶은 그렇게 쉽게 간접화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거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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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타인의 삶과 고통을 나의 것처럼 느끼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그 노력들을 꾸준히 해나가려는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간다고 믿는다. 대단한 능력의 차이나 타고난 성정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나 이념이나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자꾸만 상상하게 되고,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생기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던, 쉽게 간접화했던 어느 세계를 주목하고 세상에 꺼내놓고 더 나은 곳으로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트인사이트 전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search.php?q=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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