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내가 어린시절 가진 클래식의 이미지란 그저 평화로운 것이었다. 만삭의 임산부가 배를 쓰다듬으며 태교 목적으로 듣는 우아하고 잔잔한 음악, 또는 고풍스러운 집에 사는 귀부인이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여유롭게 듣는 음악 말이다.
클래식이란 단어는 양복을 입은 외국 신사들이 잔뜩 몰려 앉아 ‘브라보-!’를 연신 외치는 광경도 떠오르게 만든다. 도대체 그 분위기라든지 그 음악이라든지 당최 이해하기가 어렵고 졸리기만 한 문화라는 것이 클래식이 흔히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다른 한편에서 클래식은 고급문화의 상징이다. 쉽게 공감 가능한 가사로 사랑을 노래하고, 연신 눈과 마음을 빼앗는 비주얼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아이돌 무대와는 달리 정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겨 다가가기가 쉽지 않고 낯설기만 하다.
핸드폰으로 유튜브에만 들어가도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다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와 음악이 즐비한데 클래식은 아무래도 쉽게 손이 가는 장르는 아니다. 클래식을 제대로 즐기려면 공연장에서 실제로 연주를 들어야 한다는데 위치는 대부분 서울인데다 티켓 가격도 부담이 되다보니 지루해보이기만 하는 클래식을 찾아 공연장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은 클래식을 샘플링(기존의 음반의 음원을 그대로 차용하는 음악기법으로 어떤 음악의 특정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약간의 편곡을 다해 음악을 만드는 형태. 기존의 음원을 새로운 음악을 구성하는 하나의 소스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 곡들도 유행하고 있고, 게임이나 다양한 영상에서 클래식을 차용하기도 하지만 요즘 세대에게 클래식 그 자체가 어필되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미지들은 클래식 공연을 관람해본 적 없는 사람의 시선일 가능성이 높다. 직접 무대위에서 펼쳐지는 클래식 연주는 그저 평화롭다기보다는 다이나믹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 공연을 같이 봤던 일행의 표현을 빌리자면 ‘2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듣는것도 힘든데, 체력이 얼마나 좋아야 저런 연주를 무대에서 계속할 수 있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이다.
클래식 공연을 찾아가보면 곡들의 구성이나 악기들이 낯설수는 있지만 어릴적 음악시간에 들어봤거나, 최근 아이돌 음악과 다양한 콘텐츠에서 들어봤을법한 곡들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공연을 예로 들자면, 막스 리히터가 현대적으로 구성한 버전이기는 하지만 <비발디의 사계>가 그러했을 것이고, 초반부에 연주된 곡들의 작곡가인 <하이든>이나 <에드워드 엘가>가 그러할 것이다.
세상은 아는만큼 보이고, 공부할수록 해상도가 선명해진다고 했던가. 심미안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좋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훈련되고 발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간의 공부가 필요할 수 있지만 클래식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기에 여전히 우리와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고, 기존의 편견과는 달리 훨씬 더 생동감있고 독특한 감동을 주는 음악적 경험의 장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한수진과, 2021년 젊은 예술인들은 주축으로 설립되었으며 아드리엘 김이 지휘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이 준비하여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이라는 이름으로 2024년 2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이루어졌다.
주한영국대사인 콜린 크룩스(Colin Crooks)가 이 날 공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음악은 보편언어로 사람을 연결해주고 소통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오늘의 공연을 즐겁게 즐겨달라며,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달라도 음악이 한국과 영국의 문화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을 소개했다.
한수진은 8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10세부터 런던,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등 여러 국가와 수많은 무대에서 다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한국 무대에는 18세에 코리안 심포니와 정명훈 지휘로 데뷔하여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시절 영국에서 자란 음악인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영국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전해줄 수 있는 한수진이 이번 무대에서 영국의 클래식을 연주하는 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 클래식에는 하이든이나, 에드워드 엘가처럼 잘 알려진 이름의 음악가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주목받지 못해왔다고 한다. 바흐, 베토멘, 모차르트, 쇼팽, 브람스, 바그너, 비발디, 하이든, 차이코프스키... 많은 음악가들이 있지만 영국의 음악가들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영국도 비가 많이 오는 나라, 영어 발음이 매력적인 나라, 국기에 빨간색 십자와 가로지르는 선이 매력적인 나라, 비틀즈 - 롤링스톤즈 – 레드 제플린 – 퀸과 같은 락과 밴드 음악으로 유명한 나라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 클래식이 먼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연이 영국 클래식을 접할 수 있는 흔치 않고도 강렬한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수진 바이올리니트스의 예전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영국 클래식은 자연에 영향을 받은 곡들이 많다고 한다. 영국의 자연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이나 날씨로부터 비롯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는 음악이 영국 음악가들로부터 많이 작곡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느꼈던 차분하고 포근한 느낌, 그 안에서 몰아치고 다양하게 밀고오던 다양한 감정들이 실제 영국에서 들으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해졌다. 언젠가 영국에 가게 된다면 이번에 들었던 음악을 들으며 공연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비교해보고 싶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곡을 고르자면 역시 막스 리히터의 <사계>였다. 비발디의 사계가 워낙 유명하고 익숙한 곡이기도 했지만, 막스 리히터가 재구성한 버전의 <사계>는 기존의 내가 알던 그 음악과 완전히 다른 경험을 주었다.
막스 리히터는 이 곡이 ‘자신이 비발디 사계와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 선택한 작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는데, 바이올린이 특정 악구를 루핑(Looping)방식으로 시간차를 두고 계속해서 쌓아가며 연주하는데 기존의 클래식에서 느낄 수 없던 색다른 충격과 세련된 느낌을 받았다. 유려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기존의 버전과 조금씩 다른 박자와 강세를 주면서 익숙함을 깨부수고, 예상에 못한 순간에 치고 들어오면서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그동안 나름 음악을 좋아하고 꽤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공연을 보면서 나의 편협하고 좁은 세계가 한 겹 깨어진 느낌이다. 아직도 공부해야할 것이 너무나 많고 들어봐야 할 음악의 세계가 너무나 넓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통해 든 또 하나의 확신, 그 모든 순간들이 여전히 새롭고 놀라울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내 앞에 놓여진 것은 숙제가 아니라 나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