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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금보 Oct 12. 2020

회사 잘리면 원래 남탓 하잖아요

반강제 안식월 후기.txt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몇 개월 전 타의에 의해 퇴사했다. 수년을 함께 한 내 동료들도 모두 나와 같은 처지가 됐다. 피바람이 분 2020년 봄이었다.


여러 상황이 겹쳐 속수무책으로 실직자가 되자 나를 위로하는 것은 남 탓이었다. 퇴사 후 몇 차례 동기들과 만나 한 것이 결국은 남 욕이었다.


우리의 분노가 향한 건 지난해 여름 우리팀 총괄을 맡게 된 선배였다. 자매사의 팀장급이었던 A는 마흔이 넘은 싱글 여성. 나 역시 싱글이고 비혼주의자라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섣불리 착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식 밖의 행보로 나를 기함하게 했다. 가장 무섭다는 쿨한 척하는 꼰대였고, 상식 밖의 행동들에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서 하는 얘기 중 약 70%는 A가 주제였다. 총괄을 맡자마자 매출을 반토막 낸 무능함이라든가, 자신을 위협할 만한 일 잘하는 후배들끼리 이간질을 시전 한다든가,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든가, 각자가 당한 가스라이팅이라든가, 정신병력이라든가. 


나머지 10%는 연예계 정보 교환, 20% 정도는 일상적 잡담이었다.




나쁜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헌신하고 사랑했던 회사를 망가뜨리는 데 내 탓은 없어야 했다. 나와 동료들은 동료들은 그 책임을 A에게 돌렸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정답이 되는 것이고, 우린 그게 정답이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들로부터 기레기라는 조롱을 들어 멘털이 너덜너덜해졌지만 버텼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지금 이 직업, 그저 회사가 좋고 동료들이 좋아 버텼다. 


콘텐츠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유희로 즐기던 TV를 보며 분석해야 했고, 아이돌의 신곡은 그저 듣고 흘리기보다는 '잘 팔릴까' 가늠했다. 남들이 쉴 때 즐기는 것들을 재미로 볼 수 없어, 인생의 큰 재미 하나를 잃고 살았다.


이제야 나를 병들게 한 사건과 시간들이 서럽고 아깝게 느껴졌다. 사회생활을 하며 이직은 딱 세 번 했고, 세 번째 회사인 이곳에서 7년을 일했다. 그리고 깨달은 건, 한낱 직원 따위가 애사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회사를 위해 마음 쓰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는 거다. 




회사 걱정을 하며 직장생활을 했던 7년, 반강제로 안식월을 갖게 된 뒤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금 받으면 절반은 여행으로 탕진하겠다는 인생 버킷리스트 1번은 이따위 시국 때문에 불발된 탓도 있고. 


처음 두 달은 잃었던 큰 재미를 되찾는 기간으로 만들었다. 


남들이 다 본다고 꼭 볼 필요가 없으니 취향껏 구미에 맡는 것만 골라 볼 수 있었다. 억지 평가를 할 필요도 없고 괜스레 어그로를 끌 이유도 없으니 자유로웠다. BTS가 미국을 가든 말든, 중국 한한령이 완화가 되든 말든, 미스터트롯이 공연을 강행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


재미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멘털 회복. 언제까지 과거를 탓하며 내 살을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만 할 수는 없었다. 미워하는 대신 냉정해지기로 했다. 과거의 선택, 지난날의 처세에 잘못된 것은 없었는지.




감사하게도 2020년 10월 현재, 이 시국에 이 연차에 다시 일할 소중한 기회가 주어져 내 인생 여섯 번째 직장을 다니는 중이다. 운이 좋았고, 내 마음가짐도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내게 다시 기회를 준 사회에 보답하는 차원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삼고,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남 욕을 조금 더 건설적으로 해보려 글을 쓰기로 했다. 


10여 년의 직장생활 끝에 내가 깨닫게 된 것들을 정리하는 일, 이보다 건설적인 남 욕이 있을까 싶다.


앞으로 써나갈 글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빌런 혹은 더러운 상황에 대한 얘기가 될 것 같다. 남 욕을 생산적으로 하는 방법은 "넌 이런 거 꼭 조심해"라고 후배에게 알려주는 일이라는 판단이다.


꼰대의 신세한탄이 되지 않기를. 내가 20대 중반에 만났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빌런을 만나게 될 후배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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