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죄송한데요 by 이기준
책이라면 두껍고 무겁기도 해야지 아깝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에 살다 보니 온라인으로 한국 책을 주문하는데, 생각보다 얇거나 작은 책들을 받으면 괜히 실망하기도 하고 제 값 주고 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 그 값을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닐 때가 있다.) 문고본은 그런 이유로 별로 선호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신기하고 재밌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쏜살문고'라는 민음사의 시리즈 중 가장 최근에 출판된 책, <저, 죄송한데요>. 시리즈 이름이 쏜살문고라니, 쏜살같이 읽을 수 있어서 쏜살문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쁘띠 사이즈의 얇은 초경량 책이라 '이거 금세 읽겠는데...' 하며 솔직히 좀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도 안걸려서 다 읽어버렸다.) 북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저자답게 책 안에는 다채로운 일러스트들이 있는데, 그게 참 재미있었다. 매 챕터마다 숫자를 다르게 디자인해 표현하기도 하고 (숫자 일러스트 옆에 친절하게도 한두 마디를 써놓으신 게 키포인트다), 어떤 페이지는 꼬불꼬불한 선들이 지나다니고, 또 작가 자신을 본떠 그린듯한 일러스트 이미지가 있는 페이지도 있고. 단순한 듯 하지만 멋스러운 일러스트들이 맘에 들었다. 잉크의 색도 한 면은 보랏빛이 나는 파란색, 다른 한 면은 초록색으로 사용하고, 왼쪽 면은 본문의 꼭지를 설명하는 면으로, 또 오른쪽 면은 본문을 담는 면으로 활용한 것도 색달랐다. 확실히 다른 책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개성이 있는 책이란 것이 읽지 않고 훑어만 보아도 느껴졌다.
저자는 북디자이너로 일해왔는데 꽤 명성이 높은 디자이너였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은 유유 출판사가 내는 책들의 표지였다. 항상 보면서 감탄하고 너무 좋아했던 표지들이 다 이기준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표지였다니...! 대단하다. 특히 <고양이의 서재>의 표지와 세로 쓰기는 thumbs up.
이번에는 에세이를 출간하신 작가님이 되셨다. <저, 죄송한데요>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일상에서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과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귀여운 저자의 취향으로 가득차있는 책이다. 문체가 너무 귀엽고 센스와 위트가 마구 넘쳐나는 것이, 실제로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너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아마 이쯤에서 차례가 나오리라 여기셨겠지요. 이 책에 차례는 없습니다. 볕 좋은 날 친구와 떠는 수다 정도로 여기며 쓴 글입니다. 친구 만나러 나가면서 어젠다를 짜는 분은 없겠지요.
이 책은 차례가 없다. 목차도 없다. 항상 존재하는 틀을 깨 버린다.재밌다. 무슨 얘기들이 펼쳐질까, 기대가 되었다. 볕 좋은 날 친구와 떠는 수다는 항상 좋기 마련이잖아.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병원에서 정기 건강검진 중 영양사와 함께 한 영양 상담이었다.
다만 '정상'이라는 소견에 한 가지 의문이 들 따름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거나 밥을 불규칙하게 먹은 결과로 위염이 생겼다면 정상이겠지요? 나이 먹는 세월만큼 줄곧 신체를 사용하기 마련이니 일부가 닳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정상이겠지요? 마흔 해 썼는데도 신품과 마찬가지라면 비정상이겠지요?
저자는 "일주일에 몇 번 고기를 먹냐", "한 끼의 밥의 양은 얼만큼이냐", "일주일에 외식은 얼만큼 하냐"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할지 모른다고 말한다.이번주는 밖에서 친구들 만나고 미팅이 많아서 다른 주보다는 더 밖에서 먹었는데 그걸 평균치를 내야하는지, 저번주는 다른 주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었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저자 뒤로 사람들은 줄을 지어 기다리게 되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대답한 후 받은 소견은 '정상'. 나는 '정상'이라는 소견을 받아든다면 아무 생각 없이 다행이라고 생각할텐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 왜 난 한번도 '정상'이 어떤 '정상'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면 몸이 닳아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 '정상'일텐데, 식생활이 불규칙해 병이 생긴다면 그것이 '정상'일텐데, 그리고 늙고 나이가 들어도 피부에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하다면 '비정상'일텐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다른 관점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이 책, 작다고 너무 우습게 봤나보다.
누구나 때로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합니다. 바흐만 듣다 보면 갑자기 비스티 보이즈가 생각나는 것처럼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채 무작정 찾아 나섭니다.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양손 가득 채워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평이 서서히 넓어집니다. 여러 사람을 통해 검증된 곳만 다니면 별로 재미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좋다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저만의 풍경을 찾고 싶습니다. 비록 반쪽짜리 여행이 되더라도요. 무언가를 찾는 행위는 흩어져 있는 자신의 일부를 확인하는 일인 듯 합니다.
가볍게 읽어내려가다가도 이런 문장들과 마주하게 되며 책을 잠시 덮고 사색하게 된다. 우리의 가치관, 취향, 성향 등으로 인해서 우리의 시야는 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좁아지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이 아닌 안전한 것만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로 인해 검증된 맛집, 사람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유행하는 트렌드들을 따라야만 뒤쳐지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이 나를 '나'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여행으로 빗대어 본다면 더 공감할 수 있다. 꼭 가야하는 랜드마크, 유명한 맛집, 이 코스를 거쳐 이 곳으로 가서 이 그림을 보고 이 음식을 먹은 후에 이 호텔에서 잠을 자는 짜여진대로 움직이는 여행이 아니라, 내가 찾아보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여행을 하게 되면 그만큼 나의 시야가, 풍경이, 지평이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다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들어가 본 음식점은 음식이 별로 맛이 없을 수도 있고, 일정이 꼬일 때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기쁨을 맛볼수도 있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생애 최고의 커피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한 내가 된다는 것. 비록 반쪽짜리 여행이 된다 하더라도 나만의 풍경을 찾는다면, 그것들이 나의 일부가 되고 쌓이고 쌓여 내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살아간다는 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우산을 안 가지고 나가면 비가 오고,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지고 나오면 비가 안 오는 머피의 법칙 얘기부터 갖고 싶었던 초록색 자켓이 품절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다가 세일 때 득템하신 얘기, 같이 회사에 다니던 '회색 인간' 직원의 얘기까지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법한 얘기들을 재밌는 문체로 풀어낸 그의 책이 참 좋았다. 저자의 확고하면서도 까다롭게까지 느껴지는 취향 얘기들도 읽기 좋았다.
"어눌하게 말한다고 해서 흐리멍덩하게 사는 건 아니랍니다" 라는 책 속의 문장같이 작지만 강한 독서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걸 책을 통해 느끼게 된 시간이랄까. 코트 주머니에도 쏙 들어갈만큼 귀여운 사이즈의 책이라고 내용까지 가벼우리라 너무 얕봤던 것 같아서 괜시리 죄송하다. 저,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