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
그림 자체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가능한 매체이지만,
그림의 많은 요소 중 '색깔' 만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도 없다. 아프리카에서 자란 사람과 북극에서 자란 사람, 그리고 나까지 셋이 서울의 스타벅스에서 만나 하나의 커피잔을 그렸다고 할 때, 셋이 가장 차이를 보이는 요소는 형태나, 크기, 묘사, 명암이 아니라 색깔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문화의 상대성에 대해 배울 때 북극의 에스키모족은 눈을 나타내는 색깔이 백 가지도 넘게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눈을 표현하는 색깔로 '흰색'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또 무지개 역시 이런 상황에 아주 적절한 예시다. 또 역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무지개 색이 '빨주노초파남보'라고 말할 때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세 가지 색깔로, 남미의 어느 사람은 스물몇 가지 색으로 무지개를 얘기할 테니 말이다.
쨋든, 색깔은 전적으로 경험에서 기인한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경험하고 인지한 색이 아니면 만들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한다. 대부분 그렇다는 뜻이다. 이건 내 개똥철학 중 하나인데,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인지한, 익숙한 색 위주로 채색을 하더라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옛날에 내가 티베트박물관에서 일할 때 한 관람객이 물었다. "왜 티베트 사람들은 저런 원색을 쓰는 거냐. 이유가 뭐나." 난 문화인류학을 배운 적도 없고 그렇다고 색깔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철학도 없던 그냥 대학생일 뿐이라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 질문은 그 후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나름의 답을 찾고 싶어 책도 읽고 사진도 보던 중, 희한한 걸 발견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거의 모든 원시문명은, 원색의 문화에서 출발했다는 거다.
티베트뿐인가 어디. 우리나라 역시 색동저고리를 가지고 있고, 황하문명으로 시작한 중국 고대 문명부터 최근의 복식을 보면 어느 한 때도 원색이 아닌 적이 없다. 일본 기모노와 러시아 주변의 알타이 문명에서 비롯된 여러 부족의 옷과 가옥은 어떤가. 유럽의 그 많은 나라들의 전통의상을 보라. 지금 멕시코 의복이 기인한 마야문명과 잉카문명, 아즈텍 문명은 어땠나. 미국이 세워지기 전 인디언들의 복식, 아프리카 부족들의 집과 옷, 페이스페인팅. 모두 원색에 원색. 흰색과 검은색,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이 무리 없이 어울린다.
자연이 원색이기 때문이다. 봄이면 노랑 초록, 여름이면 파랑과 빨강, 노랑, 초록, 가을은 빨강과 주황색과 노랑이, 겨울엔 검은색과 흰색이. 모든 색이 나타나는 게 자연이다. 자연 속에 살았던 인간들이 자연의 색 아니면 무엇을 따다 옷을 짓고 벽을 칠했을까. 지금은 일반화되고 일상이 된 회색 건물은 산업화 이후 나타난, 그 전에는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무채색 문명의 시작이었다. 콘크리트가 자연이 없어진 자리를 대신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옷도 검은색, 진회색, 그냥 회색, 옅은 회색, 차가운 회색, 따뜻한 회색, 미색, 흰색으로 교체됐다. 자연 속에 살던 옛날 우리 조상들이 보지 못했던 회색의 다채로움을 우리 현대인들은 수십, 수백 가지로 분류해 이름을 붙여 구분하고 있는 거다. 마치 에스키모인들이 눈을 백여 가지 흰색으로 구분하듯 말이다.
그래서 난 원색이 유행하는 현상이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으로 느껴진다. 반면 경기가 활성화되고 도시가 붐비고, '문명'으로 시작해 도사화에 성공한 인간의 자신감이 충만할 땐 무채색 패션이 유행한다. 회색 코트와 흰색 셔츠는 자연을 딛고 일어난 인간 문명의 표상이다. 자연 속에 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다는, 자연 없이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다는 오만함의 단적인 표현이다. 인류의 무의식에 원색을 향한 강한 향수와 무채색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역시 내 무의식과 상관없이 오늘도 '튀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검은 코트를 입고 출근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