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휘몰아칠 때, 이후 후폭풍까지도 이제는 너무 버겁다. 그만하고 싶
가 있었다. 조형물이든 페인팅이든 어떤 작업이든 상관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제였다. 뭐였는지 주제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철사로 뼈대를 세우고 사이사이 철조망을 엮어 붙여 전체를 까만 라카로 칠해 검고 심플한 모양의 생명체 둘이 마주보고 서 있는 조형물을 만들었다. 제목은 '감정 없는 생물체'였다.
크리틱 시간에 작업을 발표하며,
내 감정들이 너무 힘들 때가 많아, 감정 없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감정 없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만 살아가고, 번식이 필요할 때만 이렇게 둘이 마주보고 교미해 임신, 출산 후 또 다시 다른 객체로 살아가는 생명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교수는 '평소에 느낀 감정을 작업물로 이끌어내고, 또 작업물의 완성도도 높아 좋다'고 칭찬해주었다.
으쓱할 법도 한데, 그 마저도 무덤덤하게 작업물을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구구절절, 해명과 변명 없이 발표 자체도 작업처럼 심플했다. 처음 발상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수월했던 기억이 난다. 작업 사진이 어딘가에 남아있겠지만 찾지 않기로 한다. 글 역시 물 흐르듯 심플하게 쓰고 말련다.
언제나 내 스트레스의 원천은 존재의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바꾸지 못하는 내 과거였다.
이런 것들은 나를 은은하게 좀먹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 밤에 먹구름처럼 거대하고 비대해져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역시, 날카롭게 예리하게 순식간에 나를 파괴하는 건 가족과 관련된 갈등. 그로 인한 스트레스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나를 온통 뒤흔들어놓고, 종일 나를 놔주지 않아 나는 하루종일 유튜브로 피신했다. 도피한 정신이 돌아와, 아이를 챙기고 대화해야 할 땐 마음에 날이 서있는 듯 아팠다. 짜증으로 변환된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가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잠 오게 해주는 차를 마시고 난 후 잠들었지만, 일어나 보니 내 수면의 질은 형편없었다. 중간에 깬 시간이 너무 많았고, 깊이 잠든 시간은 7분에 불과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꿈 속에서도 그 무언가와 싸웠다. 전투에 지쳐 깊이 잠 들 새 없었나보다.
그리고 전화로 또 한번, 갈등을 겪는 가족과 한시간을 통화하며.
이렇게 피해의식에 기반해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거기에 상처받고 분노하고, 그래서 이틀을 엉망으로 보낸 이유를 하나하나 말하다 보니,
오해는 풀리고 서로의 깊은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은 좋은 거구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다 풀고 난 이후에도 나는 기진맥진하여 도저히 힘이 나질 않는다. 심장을 쥐고 있던 손이 없어진 듯 심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계속 혼란스럽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낮아지려면 시간이 걸려서일지 모르지만. 여튼. 이제는 이런저런 갈등들이 다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그 옛날. 20년 전 내가 회화과 실기실 한쪽 구석에 앉아 만들던 그 조형물이 생각났나보다. 까맣고, 전체적으로 카누를 닮은 길다란 생물 둘이 세로로 서서 마주보고 있는 그 것. 거대하게 만들어 시청 앞 광장에 세워놓고 싶다. 제목은 「제발, 제발 이렇게 살고 싶다」로 정하고, '이렇게'가 어떻게인지는 절대 말해주지 않겠다. 특히, 우리 가족들, 친정식구들에게 말이다. 감정의 기복 따위 개나 줘버려. 라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