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그리고 이전 모든 시대에도 기본적 생계 수준 이상의 사람들은 사회가 준 잉여를 그다지 유용한 목적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활을 더 확장하거나 더 현명하고 똑똑하고 이해심 넓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잉여를 과시하려고 한다.
-T. Veblen,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New York: Modern Library, 1934, ⅹⅳ쪽.
베블런이 1899년 펴낸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아이의 조기교육을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을 읽다 베블런이라니, 고등학교 때 교과서 활자로만 존재했던 사회학자, 철학자 이름이 이렇게 내 일상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대가가 한 말이 너무나 적확해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수백년 전 이미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사회는 불평등했다는 것이다. 아니,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인류는 불평등을 견디며 살았다. 그리고 베블런은 그 형태를 아주 간결하고 짧게 잘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차차 책을 읽어내려가며, 이 교육학자가 꼬집은 세태가 지금 한국사회를 정말 잘 담고 있어 또 밑줄을 막 그었다. 자신의 잉여를 '일하지 않음'과 '불필요한 소비'로 과시해온 상류층, 그런데 변수는 여성운동이 일어나면서 (바깥)일을 하고 있지 않지만 집안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점이 부당하다는 사회인식이 일어났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을 쓰는 것만이 자랑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그러자 '일하지 않음'으로 과시하지 못하게 된 부유한 가정은 아이를 고가의 교육, 패션으로 치장하며 잉여를 과시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는 내용이다.
우와, 이거 뭔 일이래...이 사람 지금 한국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나. 싶어 책 표지를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장에서 발간연도를 살폈다. 맙소사. 책은 미국의 교육학자가 1987년에 발간한 책이다. 50년 전 미국의 모습이 지금 우리나라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니. 이 책이 지금도 읽히는 건 인간이 잉여를 자랑하고픈 욕망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또 1987년으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조금 달라져있지 싶기도 하다. 이제는 다시 여성운동 이전의 시절처럼, (재산의) 잉여가 있어 일하지 않음이 굉장한 부러움의 대상 아닌가. 불과 5년?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와 내 친구들, 나를 둘러싼 이 사회 구성원들은 '그래도 사람이 일을 해야지, 안 그럼 우울해져. 일은 해야돼. 재벌 아들딸들 봐, 해외유학 다녀와서 자기 부모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잖아.'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이를 나를 포함한 모두가 몹시 부러워한다. 그 과정에 어떤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설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불법의 소지가 있었던 과정이라 하더라도- 결과론적으로 지금 부유한 그 결과만을 추앙하는 세태가 있다. 주식으로 벌었든, 코인으로 벌었든, 위법과 불법-합법의 경계에서 사각지대를 이용했든, 심지어는 보이스피싱 배달책으로 돈을 벌었든, 마약 운반책으로 돈을 벌었든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파이어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젊은이들이 파이어족을 자처하는 사람의 인터뷰에 골몰하는 걸 보며 사회가 정말 달라졌음을 느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경고했다. '유한계급의 상징으로 성장한 아이들(부모가 부의 과시를 위해 아이를 명품옷과 장난감, 말도안되는 고가의 조기교육과 문화예술교육을 일찍부터 시키며 큰 아이들 말이다. 루이비똥 아기용 코트를 입고 세상에 승마를 하고, 다섯살에 펜싱과 발레를 배운 아이들 말이다)은 부모가 자신에게 당연히 뭐든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노력하거나 기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할 수 있다. 주식으로 큰 돈을 벌거나, 히트 곡을 만들어 부자가 되거나, 부유한 친척으로부터 상속을 받을 거라 생각하다. 일을 하더라고 그 일에 몰두해 노력하지 않는다. '선험적'으로 자신은 특권을 타고 났으며, '태생적'으로 유한계급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느낀다'
수능 결과가 나와 오늘 하루종일 수능만점자, 전국1위인 학생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같은 재수학원을 다녔고, 이 학원의 이름은 놀랍게도 모든 주요언론사 인터뷰 기사에서 실명으로, 그 커리큘럼까지 자세히 다뤄주었다. 나도 부모인 이상 혼란스럽고 불안감이 앞선다. 내가 이 사회에서 아이를 '온전히,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까. 지금 조기교육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1980년대 발간된 책이나 읽고 있어도 되는 걸까. 주말을 앞두고 마냥 들떠도 될 저녁시간에, 마음은 마냥 가라앉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