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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무슨별 Sep 12. 2023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서 쓰러지다..! #남미여행

남미 땅에서 서늘하게 죽는 건가 싶었던 날 기록


정확히 언제쯤 잠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일어난 시간은 새벽 1시쯤이었다. 대략 11시쯤부터 잤다고 가정하면 2시간쯤 자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역대급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별 수 있나, 비행기 시간은 고정이니 맞춰서 움직일 수밖에. 짐을 싸고 나갈 준비를 하고 우버를 잡고 기다리면서 본 시간이 새벽 01:52이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뭐 하나는 과감히 포기하고 와서 일찍 잘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2시쯤 택시를 탔는데 완전 새벽 시간이어서 그런지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아서 20분도 채 되지 않아 공항에 도착했다. 정확한 이륙 시간은 05:03이었는데, 수속 또한 빠르게 마치고 들어오니 02:27이었다. 두 시간 반이나 여유 있게 도착했는데, 공항 내에서 잠시 쪽잠을 잘만한 공간은 여의치 않아 보여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역시나 공항답게 기념품샵이 있어서 예의상 들러주었다. 하필 전날 워킹투어로 현금이 필요해진 탓에 급하게 환전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금액을 환전하게 되어서 일부는 공항에서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칠레 페소 들고 한국 가서 환전하면 제대로 못 돌려받을 확률이 높다 보니 최대한 남은 현금은 그 나라에서 다 쓰는 게 답이었다.)


먹을거리, 가방, 액세서리, 키링 등 다양한 용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Britt Shop Chile라는 기념품샵을 구경했는데, 무엇을 사면 현금도 소진하면서 어느 정도는 활용도 있게 구매한 물건을 여행하며 써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보온병이었다! 여러 종류의 보온병을 비교해 보고 퀄리티가 무난한 제품으로 구매했다. (역시나 공항답게 퀄리티 대비 가격은 높은 편이었다. 16,950 페소 / 한화 약 27,000원)


비행기 탑승 전 찍어둔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고, 탐승하고 나서는 정말 말 그대로 기절했었다. 전날에 잠을 거의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미에 온 뒤로 워낙에 쉴 틈 없이 돌아다닌 탓에 ‘몸이 부서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인생 최고의 피로 누적이었다. 기내에서 작성하라고 준 입국확인서 등의 서류도 반쯤 정신 나간 채로 작성했던 것 같다.


볼리비아 라파스 예정 도착 시간은 07:05이었으나 예상보다 조금 늦어져서 8시 조금 전에 도착했던 것 같다. 기내에서 공항으로 나오자마자 느낀 것은 산티아고와 달리 꽤나 쌀쌀하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내 차림은 영락없는 여름 차림(반팔/반바지)이었는데, 쌀쌀을 넘어 춥다고 느껴져서 얼른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긴팔 남방은 하나 갖고 있었는데, 나머지 옷들은 부치는 짐에 있어서 빨리 나가서 짐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혼란의 공항 실신 에피소드가 시작되는데… 우선 한여름이었다가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 때문에 컨디션 또한 갑자기 안 좋아져서 이대로 오래 지속되면 큰일이 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입국 수속을 하려는데 온갖 사사로운 것들 때문에 시간이 지연 됐었다. 예를 들면 마스크 이슈가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수속 줄 서는 곳으로 못 넘어간다고 하여 현장에서 어찌어찌 마스크를 구했으나, 귀에 거는 부분이 긴 끈 형태로 풀려있어서 얼굴 사이즈에 맞게 직접 묶어야 했다. (챙겨 온 마스크는 모두 부치는 짐에 들었어서 꺼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그 와중에 마스크 묶고 쓰고(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시간이 꽤 소요됐었다..), 입국 수속을 위한 서류도 뭔가 더 작성하라고 해서 부랴부랴 작성했다. 상황도 정말 경황이 없었는데 공항은 너무너무 추웠고 체온이 내려가니 갑자기 배도 아파왔다. 근데 이 복통이 배를 쥐어짜듯이 강하게 아프다가 잠시 괜찮아졌다가를 무한 반복하는 복통이었다. 화장실 배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아픔이어서, 화장실 한 칸에 틀어박혀서 한동안 못 나오기도 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너무 춥고, 배는 아프고, 식은땀이 줄줄 나는 증상이 계속되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에 일단 바닥에 주저앉았다. 줄이 정말 길고 일처리가 느려서 수속 절차는 아직 한참 남은 상황이었다.(수속 공간에 들어온 지 30분 이상 지났음에도 줄이 거의 줄지 않았었다) 사람도 북적이고 혼란스럽다 보니 누군가가 환자인 나를 발견해서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심각한 복통에 저체온에 얼굴은 핏기가 사라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잠시라도 서있을 수 없는 몸상태였다. 이러다가 타지에서 죽겠다 싶어서 일단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아픔을 참고 있었는데, 거기서부터도 한참을 기다려도 줄이 줄지 않았다. 식은땀에 복통이 계속되다 보니 이번에는 탈진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온기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달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창백하면서도 누렇게 떠있었고, 결코 사람의 색이 아니었다.


정말 도저히 안 되겠어서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갔다. 바닥에서 거의 기어간다 싶을 정도로 좀비 같은 몰골로 한 명 한 명 사정을 설명하고 앞으로 나갔는데, 거기서 또 한 번 예기치 못한 설움이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도저히 서있을 수 없는 상태였다. 서 있다가는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느낌 혹시 뭔지 아실까요..?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어느 국적인지 알 수 없다 보니 영어로 한분 한분 양해를 구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한국 분들이셨고, 모르는 분들이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내심 잠깐동안이라도 안도되는 마음이 있었다. 혹시나 이 분들이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한국 분들이셨군요..! 제가 지금 너무너무 아파서 쓰러질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한 칸 먼저 앞으로 가도 될까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은 본인들끼리 하는 말로 ‘뭐래는 거야? 어쩌라는 거지'였다.


살면서 여러 다양한 여행 경험 중 외국인들에게 억울하거나 열받는 상황은 종종 있었지만, 한국인 분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줄에서 먼저 가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면서 다른 외국인들은 내 몰골을 보자마자 먼저 가라고 흔쾌히 자리를 내어준 것과는 정반대였다. 엄마 아빠 뻘 되어 보이셨는데.. 아픈 상황에서 이런 상황이 닥치니 너무 서러워서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울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꾹꾹 참았다. 여러 번 같은 말로 양해를 구했으나, 먼저 가라는 말은 없고 구시렁거리며 빈정대는 말들 뿐이어서 일단 살고 봐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죄송하지만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앞으로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서 쓴 터라, 곧장 어딘가에 눕지 않으면 이제는 정말 정신을 잃겠다 싶었다. 그런데 마땅히 누울만한 곳이 없었고 수속이 많이 지연됐다 보니 짐들은 다 컨베이어 벨트 밖으로 꺼내져 있었다. 여기저기 하나씩 뿔뿔이 흩어져있는 짐들이 원망스러웠지만, 버리고 갈 순 없으니 바닥에 기어 다니며 어찌어찌 하나씩 끌고 와서(이때도 짐이 너무너무 무거워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한데 모아둔 뒤 급한 대로 아무 의자에 쪼그리고 누웠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힘도, 아프다고 끙끙댈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누워있으면 통증이 덜한 것 같아서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팔걸이 있는 의자여서 온전히 눕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분을 혼자 복통에 어지러움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직원분이 오셔서 괜찮냐고 물으셨다. 너무 아파서 아프다는 말조차 못 하고 있으니, 직원분께서 저쪽에 응급실이 있으니 그쪽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런 곳이 있었다면 진작에 누구라도 알려줄 수 없었던 걸까, 공항 직원들은 정말 나를 못 봤던 걸까 하는 아쉬움은 한참 뒤 정신 차리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서 인생 처음으로 공항 내 응급실에 갔다. 눕자마자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셨고,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서 대략 10분쯤 지났을 때, 산소 농도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산소는 정상이었을지 몰라도, 식은땀이나 복통 등 다른 증상은 호전되지 않아서 지금 바로는 못 나가겠다고 했다. 직원은 강경하게 그래도 너는 나가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말 물리적으로 내가 두 발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서 죄송하지만 지금 내 몸 상태로는 나갈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 30분 넘게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며 얼른 나가라고 침대 앞에 직원이 서서 감시를 했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닌데 쫓아내듯이 닦달하니 어쩔 수 없이 기어 나왔고, 그렇게 공항 내 의자에 또 한 번 누웠다. 공항에서도 도난 사건이 잦은 남미였기 때문에 짐을 모두 팔에 걸고 웅크려서 그대로 혼절하듯 잠들었다. 그렇게 잠깐 쉰다는 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정말 다행히도 잠깐 자고 나니 조금은 에너지가 회복된 것 같았다.


그 틈을 타서 공항 내 환전소에서 최소한의 금액만 환전한 뒤, 공항 앞에서 그룹택시로 보이는 ‘콜렉티보'라는 것을 탔다. 여러 명이 모여서 같이 타는 봉고차의 형태였는데 라파스 시내에 가는지 확인 후 탑승했다. 가는 길은 잘 모르겠지만 대략 지도를 보면서 숙소와 가까워질 때쯤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하고 아무 데서나 내리는 것이었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서 그 말을 현지어로 못 할뿐더러, 언제 어디서 재빠르게 말하고 내려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 도착한 도시에서 이런 난감한 상황이라니… 우선 지도를 보다가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곳에 누군가 내릴 때 따라서 내렸다.


무작정 내렸던 위치는 지도상으로 봐도 숙소까지 꽤 거리가 있어 보여서 이번엔 무조건 개인택시를 타야 했다. 그런데 또 하필 내린 곳에서 반대편으로 돌아가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사람도 길을 건너기 어려운 곳이었어서 어쩔 수 없이 육교를 통해 올라갔는데, 경사가 정말 너무 가팔라서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맞닥뜨려야 했다. 한 발짝씩 조심스레 움직이며 짐을 이고 지고 겨우겨우 넘어왔고, 마침내 택시를 타고 겨우겨우 숙소에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숙소에 와서는 모든 걸 다 내던지고 그대로 6시간을 기절했다. 온몸의 세포가 파업을 해서 완전히 방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대로 내일 아침까지 잘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군가 알람을 끄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6시간 내리 자고 일어나니 그래도 정신은 조금 돌아온 것 같았는데, 몸 상태는 움직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전혀 회복되지 않았었다.(살면서 아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경험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현지 시간은 벌써 오후 4시가 넘었은 시각이었고,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날까 싶어서 어제 미리 사두었던 엠빠나다와 체리, 요구르트를 먹었다. 그런데 몸이 진짜 망가진 건지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서(토할 것 같아서), 엠빠나다는 속에 고기 부분만 겨우겨우 먹었고 체리 조금에 요구르트 정도만 간신히 먹었다. 그 어떤 작은 자극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듯한 통증으로 이어졌다. 걷는 것도 천천히 한 발짝씩 호흡을 깊게 하면서 걸어야 했다.


밖에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몸상태였으나 아쉬운 마음에 숙소 루프탑 해먹에 누워 멍 때리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충분히 쉬다가 숙소비 지불 등 이래저래 현금이 꼭 오늘 필요해서 잠깐 회복이 된 건가 싶었을 때 환전 하러 잠깐 나갔다 왔다.


볼리비아 라파스는 해발 3500m가 넘는 고산 지역이다 보니 건강한 사람도 탈이 날 수 있는 곳인데, 나의 경우 전날 역대급 일정으로 쉴 틈 없이 돌아다녔고 잠도 못 잤고 그런 상황들이 누적되어 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탈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남미에 도착해서 제대로 쉬었다고 할만한 날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매일매일 달리기만 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 쌓여온 피로가 전날을 하이라이트로 터져버리고야 만 것이다. 탈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쓰러짐 이슈로 볼리비아 라파스에서의 첫날은 허무하게 지나갔지만, 앞으로는 너무 몸을 혹사시키지 않게, 여행은 여행답게 잘 다녀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이후부터는 하루에 메인 일정 1개 정도만 계획해서 여유 있는 여행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한 없이 침대 아래로 끝없이 꺼지는 느낌으로 기절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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