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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축구 읽어주는 남자 Mar 29. 2021

축구 기자석의 '성공한 덕후'는 관중석으로 돌아왔다

"좋아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에 둬도 괜찮아."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내가 축구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작은누나가 해주었던 말이다. 취미가 일이 되면 더 이상 즐겁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대학 시절 광고 동아리를 열심히 했던 누나가 직접 광고 회사를 다니며 얻은 경험이 흠뻑 묻어있는 한 마디였다.


가수인 김동률 님의 아버지께서도 "음악이 이제껏 너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을 텐데, 그걸 직업으로 하면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될 텐데 괜찮겠냐?"라고 물었다던데 같은 맥락일 것이다.


2016년 9월 난 축구 기자가 됐다. 그리고 2021년 2월 기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일로 대하게 된 축구가 더 이상 '위안'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지난 4년 반은 행복했다. 우선 축구장 자체가 즐거웠다. '성공한 열혈 팬'은 공짜로 축구장에 다녔다.


축구가 좋았지만 글엔 내 생각을 넣고 싶었다. 사실 축구는 내가 가진 생각을 투영하기에 적절한 대상이었다. 2020년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내 아래 있어야 안도감을 느끼고, 모든 것들이 경쟁의 논리로 이해되는 시대. 매일 승패를 따져가며 경쟁의 세계를 사는 축구는, 역설적이게도 경쟁의 가치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어줬다. 


때론 패배에서도 승리 그 이상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의 결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인터뷰들이 여럿이다. 2017년 6월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인터뷰, 2018년 7월 주세종 선수의 인터뷰, 2019년 11월 진창수 선수의 인터뷰는 사람 냄새를 듬뿍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승리만이 지상 목표인 피치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단한 일상, 투쟁심,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이상까지 두루 느낄 수 있었다.


축구 자체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런 글들을 쓰고 싶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축구는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한다. 졸전을 펼치고도 3-0 승리를 거둬서 기뻐하는 날도 있는 반면, 정말 좋은 경기 내용으로도 0-1 패배를 거둘 수 있다. 그리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숫자'는 그날의 기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또한 축구 그리고 스포츠의 지상목표가 승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고 있어야, 1경기의 결과가 다음 경기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비난받을 패배가 아니라, 발전을 위한 시행착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인터뷰들도 남길 수 있어 좋았다. 2020년 10월 김병수 감독의 인터뷰, 2020년 12월 김기동 감독의 인터뷰는 K리그1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도자들의 지도 철학과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 2021년 1월 퇴사가 결정된 뒤 만났던 설기현 감독과 인터뷰는 아마 현재 세계 축구의 최첨단에 선 전술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축구를 이해해보려고 긴 시간 노력했지만, 동시에 평생 엘리트 축구라고는 경험해보지 못한 '초짜'였기에 아마 독자들에게 더 필요했던 질문들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축구를 조금 더 깊이 보고 싶은 이들에게 분명 도움이 됐을 것이라 믿는다.



축구 기자를 그만두기로 했던 이유는 축구가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승리'를 생각하며 축구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 스포츠 언론, 특히 축구를 다루는 매체들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은 축구 그 이상으로 치열할지도 모르겠다. 때론 그 경쟁이 치졸하다는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사의 유통은 거의 전적으로 포털사이트에 의존하고 있으니,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으려면 독자들의 클릭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루에도 여러 매체에서 같은 내용을 자극적으로 다루기 마련이다. 한국 선수들에 대한 외신 평가를 쓰거나, 유명 스타들의 성생활이나 사치, 날이 서 있는 팬들의 반응을 쓰면 그날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다. 스포츠 언론의 생존을 위해 광고 수익과 조회수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당연한 선택이다.


다만 깊이 들여다보는 글,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는 기사들은 빛을 보기 어렵다. 쓰는 것에도 노력이 많이 들지만, 읽는 것에 모두 공이 많이 든다. 기자들은 더 많은 시간들을 쏟아서 쓴 글이라더라도, 독자들이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휙휙 올려가며 읽기엔 너무 진지한 글들이다. 당연히 '조회 수 경쟁'의 측면에선 잘 취재한 기사를 쓰는 것보다, 외신을 번역해서 내는 것이 이론의 여지없이 더 효율적이다. 


승리 이상의 가치를 조명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 역시도 경쟁과 효율, 숫자로 평가되는 판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판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축구 기자를 그만뒀다.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다른 팬들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할 창구가 열린 것이 이 선택을 도왔다. 아직 수익이 창출되지 않는 작은 규모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어차피 기사로 나가도 포털사이트에서 소비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튜브에선 내가 생산하는 이야기들을 즐기고 싶은 이들이 모이고 있다. 축구 유튜브를 운영하는 채널 가운데 1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도 없었다. 다만 축구가 왜 이토록 즐겁고 재미있는지 나누면 그것으로 족하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우리 곁에 있는 K리그가 사실 곰곰이 뜯어놓고 보면 즐길거리가 많다는 걸 알리면 그만이다.


축구장의 기자석을 떠나 이제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대학 시절에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던 '고시 생활'을 시작했다. 20대의 나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난 내가 선택한 길에 불만이 없다. 밥벌이는 다른 곳에서 하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 이야기는 조회 수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하면 충분하니까. '성공한 열혈 팬'이었지만 이제는 내 나름대로 '행복한 열혈 팬'이 되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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