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문화가정의 어린이들을 교실에서 만나면서 우리 사회의 빛과 그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기억나는 대로 몇 아이들을 불러 본다.
어느 날 체구가 아담한 할머니 한 분이 교실로 찾아오셨다. 학부모 상담 기간도 아니라 무슨 일로 왔는지 긴장되었다. 해성이 할머니는 손주 사랑이 지극한 분이었다. 해성이 엄마가 선생님을 만나고 왔는데 아무런 얘기를 해주지 않아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친구들하고는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무척 알고 싶어 했다.
해성이는 차분하고 말이 없지만 집중력은 뛰어났다, 공부도 곧잘 하고 줄넘기를 잘해서 줄넘기 급수제를 빨리 통과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음식을 골고루 먹지 않는 것이었다.
“진즉 선생님을 찾아올 걸 그랬네요. 우리 손주가 어찌 지내나 궁금했는데 오기를 잘했네요.”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활짝 웃었다.
해성이는 엄마가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민이다. 해성이는 한글을 다 익혔고 수업을 따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관계 맺기였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어 해서 교실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혼자 다녔다. 짐작컨대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 맺기를 건너뛰었거나 혼자 있는 게 편해서일 수도 있었다.
해성이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그때는 마지못해 하기는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렸다. 그래도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면 작고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해성이 어머니에게는 그 이야기를 다 했고 학년이 올라가기 전에 신경을 쓰기로 약속했다.
할머니는 그날 내가 편해 보였던지 해성이 엄마 흉을 실컷 늘어놓았다. 돈 벌러 다닌다는 구실로 집안일에 소홀하고 한국 음식을 배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특히 위생 관념이 희박해서 해성이가 병이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다, 틈틈이 들러 집안 청소를 해주지만 나도 늙고 힘들어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해성이 엄마가 학부모 상담 시간에 와서 한 말과는 정반대였다. 해성이 아빠가 자기를 믿지 못해 생활비를 한 푼도 안 준다, 친정에 돈도 부치고 해성이 학원이라도 보내려면 돈을 벌러 다녀야 한다, 왜 내 살림인데 해성이 할머니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지 모르겠다…….
섣부른 판단과 조언보다는 묵묵히 들어주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했다. 두 사람 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데서 오는 갈등을 좁히려는 의지가 필요해 보였다. 팽팽한 줄을 어느 한쪽이 조금만 풀어놓으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서로 네 탓만 하다 보면 결국 피해를 보는 건 해성이 아닐까. 어쩌면 부모들의 첨예한 갈등을 보고 자란 해성이가 스스로 말문을 닫아버린 건 아닌지 몰랐다.
송인이는 해성이처럼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다. 위로 누나 둘이 있는데 공교롭게 세 아이 모두 내가 담임을 맡았다. 학부모 상담을 하러 왔을 때 우리 둘 다 보통 인연이 아니라며 반가워했던 기억이 있다.
송인이 아빠는 송인이 엄마보다 열다섯 살 많다. 전국의 건설 현장을 다니면서 일하는데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른다고 했다. 엄마하고만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아빠와 아이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어쩌다 오면 잔소리나 하고 엄마를 타박하는 아빠가 반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송인이 아빠가 전화를 했다. 아이들이랑 통화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송인이 엄마가 중간에서 방해하는 것 같다고, 송인이가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저간의 복잡한 사정이 읽혀져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통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송인이 엄마 험담을 했다. 자기는 잘못이 없고 모두 송인이 엄마 탓이라고 몰아세웠다.
베트남의 가정에는 호찌민 주석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한다. 호찌민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남의 집 하인을 비롯해 선원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결국 나라를 되찾았다. 그후 베트남의 초대 주석이 되었으며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호’ 할아버지라 불렸다.
내가 만난 베트남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했다.‘호’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송인이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본 송인이 엄마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일터를 오가며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다며 폭력적인 남편과 시댁의 무관심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이 땅에 뿌리 내리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나는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졌다.
노래면 노래, 공부면 공부 못 하는 게 없는 승찬이는 6학년 때 전교회장이 되었다. 승찬이 엄마는 중국에서 온 우리 겨레인데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아 지역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유라는 자신이 고려인의 핏줄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태국에서 온 혜민이는 엄마 나라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나중에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다.
오마르는 이집트에서 온 아이다. 수의학을 연구하는 아빠를 따라 단기간 한국에 머물게 되었는데 종일 집에만 있게 할 수 없어 학교를 보냈다. 한국어를 전혀 몰라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영어도 할 줄 몰라 수업 시간 내내 코란을 베껴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한글을 가르쳐 보려고 했으나 배우려는 의지가 없어 쉽지 않았다.
“피라미드 봤어?”
“스핑크스는 어떻게 생겼어?”
이집트에서 왔다 하니 반 아이들이 우르르 와서 손짓 발짓 섞어가며 물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는지 얼마 안 가 시들해졌다.
한 학기를 끝내고 오마르는 이집트로 돌아갔다. 짧은 기간 동안 오마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오마르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로 기억될까?
이 아이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나는 장편동화 <오늘은 퓨전요리사>를 펴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부모를 둔 아이들이 다른 나라 음식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다른 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해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책을 통해 피부색과 언어,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공동체를 꾸려가는 데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질문하고 싶었다. 요리라는 창을 통해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데 어울려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갈 수 있을지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그 부모가 그렇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몸으로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었다. 여리고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부모가 어디서 왔는 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들을 다독이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비록 출발이 느리고 더디지만 언젠가는 각자의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
선생님, 저 해성이에요.
제가 말을 잘 하지 않아서 많이 답답하셨죠? 선생님이 일부러 말을 시키려고 애쓰시는 거 알고 있어요.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큰소리로 발표도 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놀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말을 하려고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어요. 큰맘 먹고 용기를 내 묻는 말에 대답했을 때 선생님이 목소리 예쁘다고 칭찬하셨어요. 그 뒤로 조금 목소리가 커진 것도 같아요.
엄마는 제가 말을 잘 안 하는 이유가 뱃속에 있을 때 자기가 말을 너무 안 해서 그렇다고 해요. 그때 엄마는 아빠랑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종일 집에만 있었대요. 그러면 아빠라도 일 끝나고 와서 엄마를 데리고 산책도 가고 말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 집으로 가버렸대요. 엄마가 하는 반찬이 입에 맞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요. 아빠만 보고 어린 나이에 먼 나라로 온 엄마는 어떡하라고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아빠가 휴대폰을 사줬더라면 좋았을 거래요.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과 이야기라도 할 수 있어서 향수병에 걸리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런데 아빠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데 방해가 된다며 사주지 않았대요. 지금도 가끔 그 얘기를 꺼내면 엄마 목소리가 커져요.
엄마는 제가 태어나서 너무 기뻤대요. 하지만 먹고 재우는 건 하겠는데 한국말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라 걱정이 많았대요. 다행히 할머니가 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말을 가르쳤어요. 아기는 엄마가 하는 말을 듣고 배우는데 저는 할머니를 통해 배운 거지요.
할머니는 아는 것도 많고 말씀도 잘하세요. 그런데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말은 잘 안 해요. 길을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버무리거나 한숨을 쉬며 묻지 말라고 하세요. 엄마가 베트남 사람인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텐데요.
엄마는 물건을 늘어놓기는 하는데 잘 치우지 않아요. 반대로 할머니는 물건이 제 자리에 정리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에요. 그것 때문에 두 분이 맨날 티격태격 해요.
“그냥 놔두세요. 제 살림이라고요.”
“누가 네 걱정하냐? 내 손주 해성이 잘못될까 봐 그러지.”
엄마가 그럴 일 없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섭고 답답해서 눈치만 보게 돼요.
처음부터 엄마와 할머니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어요. 엄마가 한국말을 할 줄 몰랐을 때는 할머니가 시장에서 물건 사는 것도 알려주고 반찬 만드는 것도 알려주셨어요. 아빠가 엄마한테 함부로 말하면 야단도 쳐주셨고요. 그러다가 제가 유치원 들어가고 엄마가 이주민센터에 다니면서 한국어 실력이 늘었어요. 물론 지금도 알림장 내용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요. 엄마는 엄마 생각이 옳고 할머니는 할머니 생각이 옳다고 하니까 큰 소리가 나는 거지요. 그걸 보고 저는 더 말이 하기 싫었는지 몰라요.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같은 조건이 아닌데도 다그치면 쪼그라들 수밖에 없어요. 동물도 사람도 각자의 환경과 개성이 있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오리는 목욕을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물을 싫어해요. 그런데 고양이가 씻지 않는다고 야단치면 안 되잖아요. 고양이는 냄새로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데 어쩌겠어요.
선생님이 급식 시간에 이것저것 골고루 먹으라고 하실 때 좋았어요. 제가 말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신 것도 고마웠어요. 제 목소리가 예쁘다는 말은 선생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우리 부모님, 할머니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머니는 엄마 신발을 신어봐야 하고 엄마도 할머니 신발을 신어봐야 해요. 각자 살아온 길을 생각해 보면 지금처럼 거친 말을 쏟아낼 필요가 없어요.
말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말을 할 줄 알아도 거친 말을 쏟아내면 가시가 되고, 말을 할 줄 몰라도 따뜻한 마음을 지니면 햇빛처럼 주변을 밝게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이 기다려 주셨기 때문에 쥐구멍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말이 햇빛 속으로 조금씩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