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나의 첫 순례길 종료

끝맺음과 새로운 시작

by 쑴이

매일 깜깜한 새벽에 다른 사람들의 준비하는 소리에 눈을 떴었는데 오늘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물론 그동안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 늘 일어나는 시간에 잠깐 깼었지만 말이다. 더 이상 북적거리는 도미토리가 아닌 호텔에서 홀로 평온한 아침을 맞았다.


여유롭게 35일 일정으로 계획하고 왔지만 중반 이후부터 열심히 걸었던 덕분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하루 머물면서 시간을 보낼까 했지만 웬만한 곳들은 이미 숙박 예약이 꽉 차있었기에 바로 묵시아 - 피스테라 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산티아고에서 묵시아까지는 약 90 Km, 묵시아에서 피스테라까지 29 km라 총 120km의 일정이라 걸어간다면 나흘 거리. 걸을 수도 있었지만 산티아고에서 하루도 안 쉬고 바로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다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해서 나도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막상 걷는 걸 끝낸다고 생각하니 살짝 아쉬워서 조금 더 걷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는 이제 걷기는 끝이야, 걷기는 산티아고까지만! 나머지는 버스 탈래."

라고들 했다.


나도 사실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니 왠지 동력을 잃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묵시아까지는 버스를 타고 묵시아 - 피스테라까지 29km는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걷기로 했다. 묵시아까지는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 중 여행 일정이 더 남은 파비오와 함께 가기로 했는데 조금이라도 아저씨와 함께 할 수 있어 내심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한 달 내내 혼자 잘 걸었는데 갑자기 혼자 다니는 게 허전했다는 게 참 이상했지만 말이다.


묵시아에 도착해서 파비오와 마지막 식사를 했다. 파비오는 곧장 피스테라로 가서 피스테라에서 포루투(포르투갈의 도시)로 간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길을 마치고 포루투로 가기도 한다.


우리는 조금 비싸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대부분 식당이 브레이크 타임이기도 했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작은 사치는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은 순례길이 아니라 바닷가에 휴양 온 느낌이기도 했다. 와인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는 파비오가 골랐다. 파비오와 그래도 대화를 자주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서로의 직업은 물은 적이 없었다. 파비오는 럭비선수였고 지금은 지역 유소년 럭비팀 코치라고 했다. 전혀 생각도 못한 직업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저씨 어깨가 상당히 넓고 풍채가 좋긴 했다.


파비오와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돌아가면 나도 소믈리에 자격증을 딸 거라고 말했다. 내가 최근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에 와인 두어 잔 곁들일 때였기 때문이다. 파비오는 와인을 알게 되면 일상에서 소소하게 더 많은 행복을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 내가(혹은 나만) 같은 팀이라고 생각했었던, 지난 한 달 동안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던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 중 마지막 한 명과도 헤어졌다.


더 이상 '같이' 걷는 순례길 여정은 없고, 나는 진정으로 혼자가 되었다.

이제 나만의 까미노의 시작이다.


바닷가 근처로 오니 빠에야에 들어간 해물 수준이 한 단계 높아졌다. 함께 마신 샤도네이도 너무 잘 어울렸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봤다. 나는 이별할 때 먼저 뒤돌아서지 않는 편이다. 아저씨 나보다 더 길치던데 혼자서 잘 찾아다닐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묵시아에서 이틀을 머물고 피스테라로 출발했다.

오늘부로 나의 순례길은 완전히 끝난다.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걷는데 초반에 막 걷기 시작했던 그 기분이랑 비슷했다. 마지막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이 하나하나 너무 아름답고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피스테라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나니 조금 피곤했고 혼자 해가 지고 돌아다니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쌤이 알려준 일몰 명소로 향했다.

결과적으로는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해변에서 보는 일몰이 장관이기도 했지만 지는 해를 보니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나의 첫 순례길도, 복잡했던 내 마음도.


사람들이 묻곤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니 달라진 게 있어요?"

산티아고 도착을 앞두고, 도착해서 그리고 피스테라에서 일몰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내가 순례길 걷기를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첫째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회사원으로서의 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의 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 곳에도 속해 있지 않는 나', '이방인 속의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몸만 늙어갔지 정신연령은 20대나 30대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40대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미성숙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를 뒤돌아보기도 하고 변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나의 순례길 여정은 '치유의 시간'이었다. 자연이 자정작용을 하듯 내 상처와 분노, 괴로움을 마주하고 내려놓고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고통의 무게를 측정할 순 없지만 누구나 슬픔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순례길은 그 잠재된 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순례길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다면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게으름을 이기고자, 살을 빼기 위해서 혹은 트래킹이 좋아서 오는 사람들,

장애를 딛고 완주하고 싶어서 혹은 죽음의 문턱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후 오는 사람들,

인생에서 방황이 시간이 왔을 때 다음 챕터를 구상하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픔을 견디기 위해...

다양한 이유로 여기에 온 사람들을 만났다.

각자의 이유로 여기에 왔지만,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완주 후 물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장담하건대 깨닫거나 얻어가는 것 적어도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일몰을 보러 일몰 명소로 가는 길
드넓은 바다를 보니 마음이 뻥 뚫렸다.
오늘의 해는 지지만 내일의 해는 뜰 것이다.




0 km 비석


나는 여기에 다시 또 올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일몰을 보며 끝맺음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0km 비석이 있는 등대로 향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고 있던 옛날 사람들은 이곳이 땅끝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세상의 끝, 혹은 땅 끝이라고 불리는 곳은 여기만이 아니다. 나는 포르투갈, 아일랜드에서도 세상의 끝이라 믿었던 곳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는 곳을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나 보다.


내가 산티아고에서 여정을 끝내지 않고 피스테라까지 오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은 '이곳은 끝이 아니라 시작의 느낌을 준다'라고 했던 후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일몰을 보며 정리를 했다면 오늘은 땅끝에 서서 '0'이라는 숫자를 보면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0'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 잘 될 것이다.

잘 되지 않아도, 조금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앞으로 살면서 최근 몇 년보다 더 괴롭고 어쩌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떻게든 견뎌낼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방치하지 말자.

세상에는 아름답고 감사하고 행복함을 주는 것들이 많다.


*끝맺음*

브런치에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를 담아내는 것은 제2의 순례길 걷기와 같았습니다. 지난 5월 중순에 시작했던 순례길 이야기를 2025년이 가기 전에 꼭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순례길을 걸으며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시작했었는데 브런치가 아니었다면 마무리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소 개인적이고 부족한 글이지만 저의 제2의 순례길을 함께 걸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