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조율사 2

by starr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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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비엔나에서 녹음해 온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녹음 파일 속에서 나는 서스테인 페달을 밟고 레가토로 음과 음을 이으며 한 구절이 마무리될 때까지 한 호흡으로 연주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 레가토로 이어져야 할 부분인데 끊어진 곳도 귀에 들어왔다. 절정 부분에서는 애초의 속도를 벗어나 루바토로 연주하고 있었다.* 끝부분에는 가게 안으로 갑자기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악보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녹음되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친구에게 녹음 파일을 보냈다. 연주를 담은 2분 13초가 그에게는 얼마만큼의 시간으로 느껴졌을까.


음악학자 오희숙은 『음악이 멈춘 순간 진짜 음악이 시작된다』에서 음악의 시간은 물리의 법칙을 거스르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음은 짧은 순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지만 음악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근대물리학의 문을 연 뉴턴의 이론에 바탕한 시간관을 넘어서기도 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라는 직선의 방향으로 균일한 속도로 끊임없이 나아가던 시간은 음악이라는 장이 펼쳐지면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다가,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마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시간의 지속’에서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는 시계가 상징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영원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인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토끼가 “때로는 단 1초가 영원이 되기도 하지.”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오희숙은 음악이란 음향적 재료를 시간 속에 조직하고 고정하는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즉, 작곡가와 연주자는 템포와 리듬, 점점 빠르게(accelerando, 아첼레란도), 점점 느리게(Ritardando, 점점 느리게), 또는 음을 잇거나(legato, 레가토) 음을 끊어지게 (non-legato, 논레가토) 하는 등 다양한 재료를 조합하여 연금술사처럼 시간을 잇기도 하고 쪼개기도 하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 인간은 시간의 창조자가 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녹음 파일을 보내며 바랐던 것처럼 모든 연주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음악에 몰입하여 그 시간을 아주 짧게 느끼는 것일 테다. 관객들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찰나처럼 느껴지는 주관적 시간 속에 빠져드는 음악적 체험을 하길 바라지, 연주 내내 시계를 보며 길고 지루한 시간과 사투를 벌이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피아노라는 악기는 음이 울리는 순간 허무하게 공기 중에서 사라져 버리는 시간 예술의 특성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부단하게 개선되어 왔다. 톤 마이스터 이세호와 피아니스트 이진상의 설명에 따르면 피아노는 베토벤의 시대를 거치면서 눈부신 혁신을 거듭했다. 베토벤의 음악적 아이디어는 당시의 피아노가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 너머에 있었다. 그는 피아노의 음량과 울림, 진동면에서 혁신을 요구했는데 건반을 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건반을 눌러 음을 지속하는 연주를 하고자 했다. 베토벤의 까다로운 요구 덕에 피아노 액션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소리를 지속시키고 증폭할 수 있게 되었다. 음정과 음정을 잇는 레가토 연주도 가능해졌다.**** 거기에다 서스테인 페달까지 장착함으로써 피아니스트들은 낱낱의 음정을 이어가면서 짧은 순간 속에 영원의 느낌을 담을 수 있었다. 음악 전체는 한순간처럼 느껴지길 원하지만 그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피아니스트들은 본인들의 운동에너지로 만든 소리가 공기 중에서 파동을 일으켜 관객의 귀를 진동시키고 결국 심장을 울리기를 기대하며 음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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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세기 초 시간을 주관적이며 질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며 시간에 대한 독보적인 사유를 펼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 따르면 사람은 각자 자기 나름의 시간을 지니고 사는데 그 시간은 쪼갤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속되고 연결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이 수명을 뛰어넘어 객관적 시간을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철학자 박구용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술과 철학을 통해 주관적 시간을 늘리려 노력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다. 주관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은 고통스럽고 짧게 느껴지는 시간은 즐겁게 느껴지는 시간의 딜레마가 그것인데, 인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과 철학을 통해 정지된 시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매혹적인 타자를 만난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느낌, 정지된 순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유한한 시간을 늘릴 수 있는 방편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여행도 예술이나 철학처럼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에 정지한 채 머무르게 함으로써 그 순간 영원을 살게 하는 마법을 보여준다. 여행 마지막 날 출국을 몇 시간 앞두고 매혹적인 장소를 우연히 마주했다거나, 나를 반하게 하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나는 어느새 자아를 잊어버리고, 그 장소나 상대에게 몰입한 내 몸의 감각은 그 순간을 정지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몇 초가 영원으로 다가온다. 인증샷을 찍는 것도 잊어버리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미루면서 짧은 순간과 순간을 레가토로 이으면서 시간을 창조하는 사람은 여행의 마지막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러다가 남은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면? 여행자는 <비포 선셋>의 제시처럼 돌아갈 티켓을 버리거나,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과 제시처럼 다음 만남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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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다. 샤오위는 상륜이 있는 미래로 가기 위해 곡을 천천히 연주하고, 상륜은 곡을 빠르게 연주해서 마침내 과거의 샤오위에게 다다른다. 음이라는 기본 재료에 템포와 리듬, 그리고 각종 악상기호를 더해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작곡가나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행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상륜처럼 시간을 조직하고 창조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갈 티켓을 들고 있는 여행자는 기본적으로 ‘시한부’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암 말기에 다다르지 않고도 시한부 인생을 살 수 있는 여행이라는 특별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일상을 지배하는 정량화된 시간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속도로 시간을 연주한다. 가던 발길을 멈추고 표지판이나 작은 들꽃을 응시할 때 시간은 테누토.****** 아무런 계획 없이 구도심의 구부러진 골목을 어슬렁거릴 때 시간은 루바토.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않고 예견된 죽음을 맞이했던 이들의 묘비 앞에서 시간은 어느 결에 그때로 돌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불러낸다. 하지만 이 모든 여행의 발걸음은 칸타빌레. 언제나 노래하듯이.


여행지의 시간이 소 되새김질 하듯 반복되며 나를 순식간에 그때 그곳으로 데려갈 때가 있다.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이 가득 차오를 때면 귓가에 맴도는 곡조를 연주한다. 그러다가 피아노 본체를 열어본다. 한 손으로는 건반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현을 지그시 누르며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전달되는 떨림을 느껴본다. 내 손끝을 떠난 움직임이 피아노 안에서 떨리고 울리면서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오는 이 여정을 종종 경험해 보기로 한다. 피아노와 함께 하는 시간 여행이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하면서.



* 루바토(Tempo Rubato)는 곡의 특정 부분에서 일시적으로 재량껏 빠르거나 느리게 속도를 바꾸어 연주하는 것이다.

** 오희숙. 2021. 음악이 멈춘 순간 진짜 음악이 시작된다. 21세기 북스. 62-65쪽.

*** 같은 책. 70쪽.

**** 클래식톡. 2020. 피아노는 원래 이소리가 아니었다 (피아노의 속사정이 궁금하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YbDJ5UelhE 12분 ~ 17분.

***** 박구용. 2020. 예술과 미학 21.

https://www.youtube.com/watch?v=KDETjIFmXsA&list=PL_gx3MOYjs5HehhVjffBoZ63A5pOamUie&index=47 6분 40초~11분 30초.

****** 테누토(Tenuto)는 ‘음을 지속해서’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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