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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Aug 10. 2024

빼빼할머니 뚱뚱할머니

소소한 에세이 과제 - 만나고 싶은 사람

  나의 엄마는 부산에서 오랫동안 초등 교사로 근무하셨다. 어렴풋한 유년기의 기억 중 어린 시절의 내가 출근길에 나서는 엄마 다리를 붙들고 엉엉 울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그렇게 붙들고 울면 하루쯤은 엄마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기대를 했던 걸까? 아니면 잠결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평소와 달리 잠이 덜 깨어 투정을 부렸던 건지도 모른다. 보통은 그냥 무덤덤하게 엄마를 배웅했던 것 같기에 그날의 기억이 어쩐지 비현실적이게 느껴진다.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보육 기관을 다녔으니 그전에는 아마도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밥 먹고 낮잠 자고 놀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집에서 온전히 케어해 준 건 바쁜 엄마를 대신한 어떤 할머니 한 분, 아니 두 분 이시다. 당시는 육아 휴직은 커녕 출산휴가도 채 한 달이 될까 말까 하던 때여서 엄마는 수소문 끝에 믿을 만한 할머니를 고용하셨다. 첫 번째 할머니는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빼빼 할머니’ 이시다. 나보다 세 살 위의 언니는 많이 기억하고, 나는 조금만 기억하는 첫 할머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언니와 꽤 정이 깊은 상태에서 일을 그만두셨다. 어린 언니가 엉엉 울며 빼빼 할머니를 찾고, 그래서 더욱 머쓱한 모습으로 새로운 할머니가 처음 오시던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삐쩍 마른 체형이어서 우리끼리 ‘빼빼 할머니’라고 불렀던 첫 할머니와 상반되는 이미지의 넉넉하고 푸짐한 체형의 할머니. 우리는 두 번째 할머니를 ‘뚱뚱 할머니’라고 불렀다. 물론 우리끼리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뚱뚱 할머니는 마디가 굵고 조금씩 굽은 손가락에 꽉 맞는 가락지를 끼고 계셨다. 손등에는 주름이 많은 그 손으로 맛있는 반찬도 많이 만들어주고, 엄마가 오시기 전까지 빨래,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을 마치고 저녁 준비까지 해 놓고 가셨다. 다진 고기와 야채를 섞어 둥글게 빚은 뒤 납작하게 눌러 밀가루를 묻히는 과정은 나에게 재미있는 놀이였다. 매일 다섯 시 반쯤 우리 집으로 오는 기나긴 복도에 ‘또각또각’ 엄마의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지면, 미리 퇴근을 준비하고 계시던 할머니는 가방을 챙기며 일어나셨다. 어쩌다 엄마가 늦어지면 9시까지 있는 날도 있었고 더러는 엄마의 1박 이상 출장에 우리 집에서 주무시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늦게 퇴근하는 아빠의 저녁상을 차려주시고는 거실에 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작은방에 쏘옥 들어가 계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린 마음에도 아빠와 할머니가 함께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 집안에 흐르는 공기에서 ‘어색함’이라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가 그렇게 좋아하던 ‘가요톱텐’도 보지 않고 들어가시니 아빠가 틀어놓은 뉴스 소리만 거실에 조용히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시금치나물 연근조림 멸치볶음 등 다양한 밑반찬을 늘 만드셨는데,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 때면 갈치 한 토막을 구워 직접 살을 발라주시기도 했다. 내가 조금 더 자라서 복도에서 친구들과 뛰어놀 때면 우리 집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복도에 가득했다. 지나가던 내가 부엌 창문 앞에서 기웃거리면 바삭하게 구워서 앞뒤로 기름과 소금을 넉넉히 바른 김을 전장 그대로 창문 밖으로 내어주기도 하셨다. 짭짤한 김을 자랑하듯 통째로 들고 베어 먹으면 입가가 조금 따갑기도 했지만 평소에 할 수 없는 일탈을 하는 듯 한 기분이 꽤 좋았다. 당시에는 ‘시터’나 ‘아이돌보미’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서 통칭 ‘파출부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할머니네 자녀 분들은 어머니께서 늦은 나이까지 남의 집 파출부로 일하는 게 마음 편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겨우 예닐곱 살인 나에게도 종종 “아들이랑 며느리가 나더러 육십 넘었으니 이 일 그만하라고 자꾸 그런다.”며 퇴직을 예고하시고는 했다. 한 해 두 해 차일피일 미뤄지던 퇴직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결국 이루어졌다. 엄마와 할머니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나와서 인사해야지.” 하는데 왠지 어색하고 서운한 마음에 끝내 현관에 나가 배웅해드리지 못하고 딴청을 부리며 방에 숨어있었다. 내가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으면 할머니가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몇 년 전 언니가 왜 그렇게 울면서 새로운 할머니를 거부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할머니가 그만두시고 나서 나는 매일 학교 다녀오는 길, 경비실에 제일 먼저 들러 우리 집 호수가 적힌 열쇠를 찾아서 올라오게 되었다. 현관문을 잘 잠그고 들어와 이런저런 숙제나 엄마 심부름을 해결하고, 오후 서너 시쯤 엄마한테서 전화가 오면 저녁때 먹을 고기 같은 것을 냉동실에서 꺼내놓기도 했다. 엄마가 저녁에 일이 있어 늦는다고 하면 언니랑 둘이 자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옆 단지 아파트에 사는 큰 이모네에 건너가서 엄마가 다시 전화할 때까지 저녁 먹고 TV를 보기도 했다. 나에게는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었는데,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네 엄마들은 나를 꽤 자주 집으로 초대하셨다.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으면 간식도 내어주시고, 저녁때가 다 되어가면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집에 전화를 해주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전업주부인 엄마들이 더 많은 시대여서,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가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 시절의 엄마처럼 나도 일하는 엄마가 되고 보니 요즘은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좋은 시터를 고용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그분들에게 주어야 하는 임금을 생각해 보면 내 월급의 대부분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당시 엄마의 월급 역시 넉넉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루 종일 아이를 봐주고 모든 집안일을 커버하며 가끔 몇 박을 함께 해주는 ‘믿을 만한’ 할머니를 고용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 인생에 딱 두 분의 좋은 할머니를 만나 오랜 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어린 나에게도, 어린아이들과 살림을 모두 파출부 할머니에게 맡기고 출근하던 젊은 엄마에게도 말이다.


  파출부 할머니였지만 진짜 할머니보다 더 많이 살을 부비고 밥을 나눠먹고 낮잠을 함께 잔 할머니. 그때 연세가 환갑이 넘으셨으니 지금은 살아 계시더라도 아흔을 넘어 백세에 가까워지셨을 나의 ‘뚱뚱 할머니’. 이미 빼빼 할머니와 정이 깊은 데다 사춘기가 왔던 언니와는 끝내 친해지지 못하셨지만, 어린 나를 친손주처럼 예뻐하며 키워주셨는데도 마지막 날 인사를 제대로 못 한 것이 아쉽고 죄송스럽다.

  너무 어린 시절에 함께해 성함도 모르지만,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자녀분들과 얼굴 자주 보며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잘 지내시면 좋겠다. 혹시 그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보고 계시겠지? 그때 키워주신 그 꼬맹이가 지금 이렇게 결혼도 하고, 아이 둘 낳고, 직장도 다니며 열심히 잘 살고 있는 것을. 가끔은 할머니가 무더운 여름날 뚝딱 해주시던 달콤하고 짭짤한 간장설탕국수가 먹고 싶은데, 내가 해도 그때의 그 맛을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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