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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날이 Dec 21. 2021

진정한 기적을 받아들이는 순간

<엔칸토: 마법의 세계>에 대한 잡담 (spoiler alert)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이 저절로 열리고 계단을 내려갈 땐 미끄럼틀이 되어주며, 서랍과 접시들이 리듬을 만둘어주는 마법의 집, 까시타. 이 집은 마드리갈 가족에게 마법이라는 기적을 선물해주었는데, 마드리갈 가족들은 날씨를 조절하고, 음식을 통해 치료를해주고, 미래를 예언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며, 아주 작은 소리도 감지해주며, 무한한 힘을 통해 건물을 옮겨주고,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하고,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의 기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지 못한다. 단지 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군인들의 총칼에 쓰러지던 날부터 이 기적이 생겼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러나 마드리갈 가족들은 기원을 알 수 없는 능력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마을 공동체를 위해서만 봉사한다. 마을사람들도 마드리갈 가족들 덕분에 화목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유지하며, 이들에게 의지한다. 


 오랜만에 뮤지컬을 벗어던졌던 디즈니의 전작인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과 달리 60번째 디즈니 영화인 <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The Family Madrigal>이라는 뮤지컬 노래로 시작한다. 까사 마드리갈의 재치있는 연주와 주인공인 미라벨의 밝은 에너지를 통해 전체적인 영화의 풍이 밝고 따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따뜻하고 화려한 색감과 재치있는 마법의 이면에는 슬픔이 숨겨져 있다. 


  주인공인 미라벨은 이러한 화려한 마법을 사용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능력도 받지 못한 일반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집에서 사촌들이나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수다. <The Family Madrigal>에서 미라벨은 마을 아이들에게 가족들의 능력을 설명해줄 때도 본인의 이야기는 극도로 꺼리며 가족들의 멋있는 마법에 대해 노래부르곤한다. 미라벨은 자신이 어떠한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으며 항상 가족들을 생각한다. 마법같은 기적은 없지만, 작은 힘으로나마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안토니오가 선택받는 날 더욱 따스하게 다가온다. 온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법을 받지 못했던 그 자리에서, 미라벨은 하루종일 할머니에게 구박받은 서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안토니오를 위해 그와 함께 계단을 오른다. 그런 미라벨에게 드디어 진정으로 가족들을 도와야할 일이 생긴다. 미라벨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마법의 집 까시타에 금이가고, 둘째 언니 루이사가 힘을 잃어감을 알게 된 것이다. 미라벨은 강력한 그녀의 가족들과 달리 어떠한 능력도 없지만 기적이 사라져가는 이유를 파헤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미라벨은 원인을 찾는 와중 세상 누구보다도 강력한 능력을 가진 가족들의 내면의 두려움을 알게된다. 실수를 두려워하고, 실패를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항상 남을 도와야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이 원치 않는 결혼을 감내하기도 한다. 심지어 미라벨의 삼촌인 브루노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긴커녕 저주와 같은 예언만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야했다. 미라벨의 언니들, 루이사와 이사벨라가 부른 <Surface Pressure>와 <What Else Can I Do?>는 이러한 가족들의 내면에 대한 노래이다. 거대한 산도 옮겨야하는 루이사의 두려움, 언제나 아름다운 꽃만 만들어내야하는 이사벨라의 고통은 이러한 노래들을 통해 뿜어져나온다. 마지막에 미라벨은 가족들을 떠난 삼촌 브루노가 사실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긴커녕 저주와 같은 예언만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리고 그 삼촌이 집의 벽 뒷편에서 몰래 지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 모든 가족들의 두려움이 마드리갈 가족의 대모, 아부엘라 마드리갈(미라벨의 할머니) 때문이라고 결론 짓는다. 즉, 할머니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 가족들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지고 가족 구성원들을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닌 기적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는 미라벨과 아부엘라의 마지막 격정적 말다툼을 통해 보여진다. 그러나 이 격정적 싸움을 통해 화려했던 까시타는 무너지고 가족들에게 찾아 왔던 기적들은 사라진다. 남은건 부서진 벽돌들 뿐이다. 


  디즈니 특유의 권선징악 스토리가 없는 가족 구성원들의 성장 스토리에서 유일하게 대척점에 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아부엘라를 꼽을 수 있을까? 미라벨이 발견한 것처럼 마치 아부엘라의 요구대로 움직인 가족 구성원들은 내면에 점점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갔고, 이는 곧 기적의 사라짐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엔칸토>를 반쪽짜리로 만들 수 밖에 없는 발견이다. 주체의 불완전함을 외부의 요인에서 찾음으로써, 오히려 주체를 사라지게 만들테니 말이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의 부정성을 공산주의에서 혹은 북한, 중국의 독재자들에게 찾는 것과 유사한 유치한 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는 <엔칸토>를 보고 더욱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한다. 


  미라벨이 발견한 것은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주는 압박이 아니라 할머니조차 갖고 있는 그 두려움이다. 즉, 마드리갈 가족들이 내면에 숨기고 있던 두려움은 주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혹은 주체란 것이 당최 무엇인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토록 화려한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동시에 내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라는 그 두려움 말이다. 르네 데카르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않을까?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통해 주체를 설명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표현을 통해 주체의 확실한 존재를 재현해낸다. 즉, 중세철학의 기독교 세계에서 탈구된 주체라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세계와 단절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와 단절된채로 존재하면, 그것은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을 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다. 즉, 존재는 다시금 세계에 연결되어야한다. 이 기묘한 움직임(이를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 주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텅 빈 공백, 즉 무이다. 마드리갈 가족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무'일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주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다. 주체가 아무것도 아니라 세계의 질서에 의해 구조되어질 뿐이라고 한다면, 주체는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드리갈 가족들은 결코 가족들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무너집 집을 내버려두고, 자신들에게 찾아왔었던 기적 역시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미라벨은 애초에 자신이 텅 비어있었음을을 알고 있었을까? 마드리갈 가족들의 예외이면서도 포함되는 존재, 미라벨. 그렇기에 그녀의 기적의 문은 애초에 텅 비어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어떠한 기적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라벨을 통해 자신을 알게된 아부엘라의 변화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콜롬비아 내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페드로의 죽음을 목도하고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혼자가 되어버린 아부엘라. 그녀가 그렇게 세계에 대한 단절을 절규했을 때, 그녀의 존재를 채워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 바로 마법이라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마드리갈 가족에게 찾아온 기적은 마드리갈 가족의 변화였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마법을 되찾고, 다시 한 번 숨겨진 마을을 위해 힘쓸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욕망에서 충동으로의 전환이다. 욕망이란 자신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대상을 탐한다. <엔칸토> 초반에 마드리갈 가족들이 갖고 있는 마법에 대한 집착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이것이 사라진다면 어떤 대상이 나를 채워줄 수 있을지 근심에 차있다. 반면 충동이란 그 대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이 공백이 결코 충족될 수 없음을 알고 끊임없이 대상을 선회한다. 즉, 충동은 대상이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이 운동 자체를 즐긴다. 마드리갈 가족은 아무 능력도 같지 못한 미라벨에게 문고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자신들에게 기적이란 더 이상 마법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이 대상을 선회하는 데 있음을 직시한다. 마드리갈 가족은 마법이라는 대상을 선회하는 의미로 마을 사람들과 집을 복구하자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닫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그 존재는 모든 콜롬비아인들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이다. 우익의 민병대에 이유없이 죽어나간 농민들이 지닌 두려움, 마법과 같은 능력이 없다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 콜롬비아 내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페드로의 죽음을 목도하고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혼자가 되어버린 아부엘라가 평생을 홀로 갖고 있었던 그 두려움과 같다. 이 두려움을 마주하고서야 마드리갈 가족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다. 


  이렇듯 디즈니는 <엔칸토>에서 다시 한 번 뮤지컬 드라마를 통해 밝으면서도 독특한 콜롬비아의 분위기를 만들어냈지만, 아쉽게도 급한 갈등 봉합, 빈약한 스토리, 흐릿한 결말을 가리기 위해 화려한 뮤지컬 노래를 사용한 듯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주토피아>, <모아나>만큼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디즈니 특유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특별한 거부감 없이 작품으로 녹여냈다는 점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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