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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날이 Jul 06. 2022

<기묘한 이야기>를 기묘하게 논평하기

동시대의 알 수 없는 기묘한 것들(Stranger Things)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지속적으로 다루고 싶은 문제는 해석의 문제이다. 즉, 본인은 각각의 영화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역사적 맥락context 안에서 이야기해보는 것을 목표로 하며, 해석을 통해 각각의 작품들texts에 기입되어 있는 동시대에 대한 역사적 특이성들을 알아보는 것이 이 블로그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까지 두 편의 영화를 분석해보았고, 이번에 살펴볼 텍스트는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의 개국공신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 있는 시리즈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2016년 공개 이후로 시즌 1, 2, 3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시즌 4는 2부로 나누어 2022년 5월 27일과 2022년 7월 1일에 각각 공개되어 시즌 4를 마무리지었다. <기묘한 이야기>에 대한 세세한 줄거리는 아직 시리즈를 보지 못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살게 뻔하기에(물론 아무도 이 글을 보지는 않겠지만), 줄거리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배제하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논평을 해보려한다.


시리즈의 배경인 80년대 미국의 소도시, 인디애나주 호킨스에서는, 작중 경찰서장(이후 일레븐의 양아버지)으로 등장하는 호퍼의 대사를 빌리자면, 최근 몇 년간 가장 위험한 일이 올빼미가 사람의 머리를 자기 둥지로 착각해 공격한 일이었다. 그랬던 소도시에서 원제( <기묘한 이야기>의 원제는 Stranger Things로 직역하면 "이상한 것들"이다.)처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mood이 뿜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기분은 단순히 공포라고 할 수도 없고, 스릴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상한 것이다. 이 이상한 기분은 시리즈 전체에서 시종일관 흐르고 있다. 이 시리즈를 본 시청자들은 결코 이 기분을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시리즈를 정의할 만한 장르적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장르의 혼합은 고전 할리우드 이후로 흔한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굳이 <기묘한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기묘한 이야기>는 SF, 미스테리, 공포의 혼종이다. 이렇게 혼종적인 장르 속에서 시청자들은 도무지 이 시리즈의 중점적인 기분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종의 기분은 시청자들이 가장 공감하는 요소이다. 사실 이러한 기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동시대이기 때문이다.


마틴 하이데거는 기분Stimmung(mood)를 분석하며 개념화할 수 없는 독특한, 그러나 사소할 정도로 짧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오랜 기간동안 등한시되었던 기분을 하이데거는 정상성의 상태의 근본조건으로 격상시킨다. 즉, 우리가 기분에 젖어있는 정상성의 상태는 현존재Dasein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현존재로서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분이라는 것을 통해 깨닫게 된다. 모더니티의 대표적 기분은 '권태'라는 기분이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권태라는 기분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서구권을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모더니티 이후인 포스트모더니티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정의할 수 있는 기분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어졌다.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앤디 워홀의 구조 영화가 대표적일 것이다. 수시간 동안 재생되는 워홀의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도 없으며, 어떠한 기분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이나 <엠파이어>에 흐르는 기분은 도저히 특정지어지지 않는다.


확실히 우리는 이러한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는 프레드림 제임슨의 "감정의 퇴조"([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서 그는 정동의 퇴조라고 칭했지만 이후 [리얼리즘의 이율배반]에서 자신이 감정emotion을 정동affect으로 잘못 이야기했음을 반성한다)라고 불리는 하나의 현상이다. 즉, 후기자본주의에 이르러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으며 감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강렬도만 존재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강렬도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현상적 담론을 "정동 이론affect theory"라고 부를 수 있다.(필자는 제임슨의 의견을 따라 정동 이론을 이론 혹은 철학으로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에서 보았다. <조커>를 보면 알 수 없는 강렬함만이 도시와 아서 플렉을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그 짓눌림은 아서의 분노로만 표출된다.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은 사회에서 아서는 오로지 폭력으로만 알 수 없는 감정을 해결한다. 호킨스에 흐르고 있는 기분은 제임슨의 진단그리고 <조커>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 기분은 미스테리한 기분, 공포스러운 기분으로도 이야기 되기 어렵다. 도저히 짐작이 불가능 하고, 제목 그대로 이상하고 기묘한 분위기만이 호킨스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시즌 1,2,3는 SF라고 하기엔 과학적이지 않으며, 미스테리라고 하기엔 신비롭지 않고, 공포라고 하기엔 공포스럽지 않았다. 즉, 80년대 미국의 소도시를 모델로 하고 있는 호킨스에 깔린 이상하리 만치 기묘한 기분은 감정 없는 동시대에 대한 조그만한 판본과 같다. 이러한 기묘한 기분은 간혹 일레븐의 분노로 돌출되어 튀어 나올 뿐이다.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마다 뒤집어진 세계로부터 등장한 괴생명체들을 무찌르기 위해 사용하는 일레븐의 능력과 함께 질러대는 비명에서만 이 기묘한 분위기를 짐작해 볼 뿐이다. 즉, 일레븐의 분노는 강렬도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지표이다.


이는 기표의 연쇄와도 연관된다.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로 기호와 기의 사이의 연결고리는 점점 옅어졌다. 이는 상품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용 가치라는 사물 고유의 가치와 함께 등장한 교환 가치라는 추상은 사물 자체를 분열적으로 만든 하나의 형식이었다. , 자본주의는 교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  상품의 가치와 동일한 특별한 형태의 무엇이 필요했는데,  무엇이 바로 화폐이다.  화폐라는 추상이자 구체, 주체이자 객체는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모더니즘은 이러한 추상적 등가에 저항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 기호와 의미 강력한 분리를 요구했다. 영화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   고다르, 크리스 마커,  다양한 모더니스트들이 이러한 조건 속에서 미학적 실천을 꿈꾸었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첨언처럼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구조주의적 언어학 이후로 다양한 의미에 메여있지 않은 다양한 시도들을 꿈꾸었다. 그러한 이러한 시도는 후기자본주의에 이르러 단순 기호와 의미 분리를 넘어서 기호를 이루고 있는 기표와 기의의 분리로 발전되었다. 즉, 모더니티에서 기호와 의미 사이의 분리로 인한 히스테리가 시대적 증상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티에서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단절로 인한 분열증이 시대적 증상이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티는 기의와 분리된 기표의 자율성, 혹은 기표들의 부유를 통한 유희로 정의 될 수 있다. 앞에서 동시대가 감정의 쇠락이라고 불리는 이유 역시 이와 같다. 즐거움, 분노라는 기표는 더 이상 특징적 감정이 아니라, 말 그 대로 기의와 단절된 기표 그 자체에 불과하다. 즉 즐거움 혹은 분노라는 텅 빈 글자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서의 아무 의미 없는 웃음이 의미하는 것도 어떠한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는 일레븐의 얼굴도 모두 이를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는 8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들을 하나의 텅 빈 기표로서 활용한다. 시즌 1의 <괴물the thing>과 음모론, 시즌 2의 <고스트버스터즈>와ㅣ 일레븐의 스모키 화장, 시즌 3의 쇼핑 몰과 냉전시대, 그리고 이번에 공개된 시즌 4의 80년대 호러 시리즈들까지. 이렇게 <기묘한 이야기>는 8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거대한 유희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기묘한 이야기>는 80년대에 대한 패러디 혹은 기억으로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의 혼성모방 개념을 빌려와 패러디와 구별되는 텅 빈 문체에 대한 모방을 개념화 했다. 제임슨에 따르면, 혼성모방은 "언어적인 가면을 쓰고 죽은 언어", "중립적인 흉내 내기", "웃음조차도 결여된 단순한 흉내내기", 즉 "공허한 패러디"이다.([[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 64페이지]]) <기묘한 이야기>의 80년대 미국 문화에 대한 모방은 어떠한 동기나 풍자적 비판도 존재하지 않는 기표 그 자체로서 작동된다.  


이러한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떠다니는 기표들은 동시대의 모든 것이 파편화된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들이다. 동시대에 우리는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토대가 무엇인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제국주의 자본주의 시대에 제1세계 도시인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상품이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착취의 산물임을 몰랐다면, 금융화 자본주의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상품이 무엇인지 조차도 알기 어려워졌다. 동구권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라는 개념조차도 사라진채로 자본주의=세게가 되었으며, 더 이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존재없음으로 기능한다. 더구나 파생상품과 비트코인뿐만 아니라 최근의 NFT 상품들은 이제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의 물질성마저도 추상화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했던 추상의 지배 혹은 관념의 지배는 동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킨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채 희생되는 주민들은 이러한 금융화 자본주의의 일반 시민과 유비를 이룬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위치한 발전소에서 비윤리적 연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다. 그 발전소에서 있었던 착취로 인해 자신들이 거대한 위험 아래 있음을 알아낼 수도 없다. 오히려 그러한 착취 덕분에 호킨스라는 마을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묘한 이야기>는 시즌4를 마무리지으며, 시리즈 내내 위협해오던 뒤집어진 세계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공개했다. 시즌4에 이르러 모든 시즌동안 풍기던 기분은 어디서부터 기인되었는지 가시화되었다. 시즌4의 메인 빌런인 베크나의 등장은 시리즈 내내 부유하던 파편들을 하나의 성좌constellation으로 만들어냈다. 이 성좌 속에서 일레븐과 주인공들은 드디어 누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성좌는 베크나의 네 번의 살인을 통해 만들어진 호킨스 시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절단면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자본주의의 이면에서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 벌어지던 착취의 민낯이 2020년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아주 잠시 들추어졌던 것처럼 시즌4의 피날레에서 호킨스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추악한 민낯, (자본주의적) 착취가 가시화된다. 여전히 호킨스의 주민들은 그 성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어 애먼 사람(에디 먼슨)을 희생양으로 삼지만, 일레븐과 주인공들은 그 위협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알고 있다. 이들은 다시 한 번 이 위험으로부터 마을주민들을 지켜내려 노력할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생산된 모든 문화 생산물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한 영웅이 되는 것처럼, 일레븐과 너드 사총사들은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한 영웅이 될 것이다. 


드디어 하나의 성좌가 만들어진 시즌4를 넘어 마지막 시즌이 될 시즌5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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