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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날이 Jul 31. 2022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 읽기

자본주의와 제임슨의 변증법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의 페이지들을 괄호로 작성했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비디오, 건축, 문학, 이론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의 파편들 속에서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다시 파악”하고 “행동하고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성좌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형식을 창안해내려 한다.(128) 바로 “인식적 지도 그리기”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제임슨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대상은 바로 “시장”이다. 시장은 마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완성되었듯이 당대에 이르러 “시장은 인간의 본성이다”라는 주장처럼 거부할 수 없고,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자유시장뿐만 아니라 계획경제에 있어서도 시장 없이는 효율적인 사회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제임슨은 이러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시장의 가능성과 동시에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보려 시도한다. 이러한 시장의 레토릭에 대한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의 합법화와 연관된다. 제임슨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당대의 실제적인 경제적 제도인 자본주의의 시장과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에서 작동하는 시장 이데올로기를 해석함으로써 “경제”라는 영역에서의 “인식적 지도”를 생산해보려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단어로서의 /시장/이 “교환과 상품을 의미하는 라틴어 어원”이라면, 관념으로서의 《시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밀턴 프리드먼에 이르는 여러 시대를 거쳐 철학자와 이데올로그들에 의해서 이론화된” 개념이라고 구분하며 시장에 대한 글을 시작한다.(483) 그러나 제임슨의 이러한 구분은 단순히 “시장”이라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임슨의 구분은 “시장”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실질적인 리얼리티로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시작점이다. 이러한 시작점은 화폐가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화폐의 철폐를 주장했던 프루동주의자들처럼 이데올로기와 리얼리티를 단순히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즉, 이데올로기와 리얼리티는 일종의 반자율적인 관계로, “진정으로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로 묶일 수도 없다”는 것이 제임슨의 입장이다.(484) 

  제임슨이 보기에 프루동주의자들은 “교환 체계 자체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문제가 화폐로 객관화되어 표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종의 리얼리티와 재현의 조응 모델을 믿는 리얼리스트에 가깝다.(484) 즉, 그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르주아 체계의 혁명적 이상이 존재하지만, 리얼리티의 차원에서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으며 새로운 모델을 통해 충분히 자유와 평등이 실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마르크스는 프루동주의자들과 다르게 자유와 평등의 관념과 가치가 실재하며 객관적이고 사장 체제 자체에 의해 유지기적으로 발생할 뿐만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시장과 불가분의 관계하고 주장한다.1)  또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모더니스트”적이다. 마르크스에게 이데올로기와 리얼리티의 관계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이 리얼리티 안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며, 리얼리티는 그 구조 자체의 필연적 특징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숨기고” 있다.(487) 그렇기에 마르크스에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하나의 이미지이고 그 자체로 이미지로 표시되며 그렇게 남을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은 존재하는 실제”이다.(487) 제임슨은 시장을 분석하는데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라고 설명한다. 제임슨은 /시장/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소라 부르고, 우리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전제해야만 하는”, 즉 개념뿐만이 아닌 리얼리티인 실제 시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일종의 이데올로기 《시장》이기도 한 정치철학은 가치에 대한 개인적 우선순위를 통해 자유와 평등 중에 선택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면, 이데올로기 이론은 이러한 선택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는 단순히 가치 자체가 “계급적이고 무의식적인 근원”에서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론 자체가 사회적 내용에 의해 결정되는 형식의 일종이고, 따라서 해결책이 자신의 문제를 ‘반영’하는 것 이상으로 이론은 사회적 리얼리티를 보다 복잡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491) 즉,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기본적인 변증법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491) 제임슨은 말라르메의 말을 빌려 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미학 사이의 깊은 친밀성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사유가 “사회의 경제적 조직과 인민이 생산을 조직하기 위해 협업하는 방식하고만 관련”되는데, 이것은 사회주의가 “특정 정치적 사유의 종식을 전제”하고 있다.(492) 제임슨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나 시장주의자들에게도 정치철학은 무가치하고, 정치는 단순히 시장을 관리하는 일이 된다. 

  제임슨은 조금 더 자세히 시장이라는 슬로건을 살펴보며 시장이 단순히 “다양한 지시대상체와 관심사를 포괄할 뿐만 아니라, 그 말 자체가 사실상 언제나 잘못된 명칭”이라고 주장한다.(492) 예를 들어 독과점과 같은 계획경제를 대신하는 자본주의의 불완전한 대체물을 보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시장은 선택 혹은 자유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어떤 상품이든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시장이라는 슬로건과 레토릭은 생산이라는 개념성에서 분배와 소비의 개념성으로의 전환과 대체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자유 시장은 아직 가져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뉴라이트에 따르면 지금의 시장 구조는 진정한 자유 시장의 확립에 절대적으로 해로운 구조인 것이다. 그렇기에 제임슨은 시장 이데올로기의 성공을 시장 자체에서 찾기 보다는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형이상학적 판본, 시장과 인간 본성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제임슨이 주목하는 연구자가 밀턴 프리드먼의 애제자로 알려진 시카고 학파의 또 한 명의 핵심적 인물인 게리 베커이다. 

  게리 베커가 주장하는 경제적 접근법은 “모든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가치 있고 통합적인 틀을 제공”하려 한다.2) 베커의 결혼에 대한 접근법을 예로 들면, 베커는 가계의 상품 산출이 극대화 된다면 재정적인 특성이건, 유전적 특성이건, 심리적 특성이건 상관없이 모두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상품 산출commodity output은 일반적으로 측정되는 국민생산national product와는 다르게 “자녀, 동반자 관계, 건강과 그 밖의 다양한 다른 상품을 포함”하는 것이다.3) 여기서 제임슨은 베커의 가장 결정적인 요지를 밝혀낸다. 즉, 베커의 모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생산 모델이라는 점이다. 베커의 모델에서 소비는 상품이나 특수한 효용성, 사용가치의 생산이다. 베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조직체로서 가계는 노동력과 자본을 사용하여 생산에 참여한다. (...) 생산 모델은 가계가 소비 이론에서 분석의 기본 단위로서 적절하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각각의 가계가 내리는 결정이 상호 의존적임을 밝혀낸다.”4) 제임슨은 이러한 베커의 모델이 “모든 인간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완벽하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을 제공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496) 

  이러한 베커의 모델은 자원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강조에서 모든 가치를 시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시간성과 유사하다. 또한 제임슨은 현대이론이나 철학이 모든 인간의 행동에 합리성을 제기하듯이, 베커의 체계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적 자유를 떠올리게도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르트르적 자유란 원하는 것을 실제로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이다.5)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적 선택은 베커가 말하는 상품, 개인이나 집단적 생산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재현적 결과물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재현이 초월성이 존재하지 않고 원근법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폭로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와의 유비는 이러한 해석이 미학의 환상적인 측면에서 포스트모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베커가 포스트모던에서 가능한 더 광적인 소비 형태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임슨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시장이라는 관념 그 자체를 거대한 만족감으로 소비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품화 과정의 보너스 혹은 잉여”이다.(498) 제임슨은 이것이 베커의 계산에서 부족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치적 보수주의가 양립불가능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계산이 생산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한 번 베커의 계산은 『요강』의 서문을 떠올리게 한다. “생산은 소비와 분배의 문제로 전화되고, 그다음에 기본적인 생산 형식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온다!”(498) 

  이렇듯 설명으로서 베커의 모델은 삶의 현실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처방의 차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된다. 제임슨은 베커의 모델이 “하나의 약호전환으로서 그 구조상 포스트모던적”이라고 주장한다.(498-499) 이는 베커의 모델이 인간 행동과 회사나 기업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설명 체계의 근원적 동일성을 주장함으로써 이 두 체계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499) 베커는 이를 통해 여가 시간이 나 성격적 특성 같은 현상을 잠재적 원자재로 재해석해내지만, 이를 통해 가정 문제를 돈이나 경제 그 자체의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게 된다. 제임슨은 베커의 이러한 지점이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결론을 연역해내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베커의 약호전환 과정의 결과는 메타포나 비유적 동일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축자적 자원으로 회귀하고 이는 후기자본주의 공간에서 완전히 증발해버린다. 그래서 제임슨은 베커의 모델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 베커의 선택이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이미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르트르는 이 환경을 “즉자의 우연성과 (대자의) 자유의 공동의 산물”이라는 “상황”으로 이론화한 반면, 베커는 이를 무시했다.6) 그러나 이 둘 모두에게 주체는 “다른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의 합리적인 정보에 대한 의사 결정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이 주체성의 비합리적인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상황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500) 제임슨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상황은 “역사 자체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이다.(500) 이런 점에서 제임슨은 베커의 모델이 단순히 시장 체계에 대한 또 하나의 찬양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의도치 않게 사르트르의 상황처럼 우리의 주의를 역사 자체와 그것이 제공하는 대안적 상황들로 이끌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시장에 대한 본질주의적 옹호는 사실은 완전히 다른 주제와 연관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임슨은 시장 이데올로기에 있어 시장이 궁극적으로 소비보다는 정부의 개입, 자유와 인간 본성 자체의 악과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연구자인 노먼 배리는 애덤 스미스가 자연적 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종류의 혹은 폭력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특정한 인간 개입의 부재 속에서 개별적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혹은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건의 패턴”을 설명하고자 했음을 전해준다.7) 그렇기에 노먼은 시장의 행태가 이러한 “자연 현상의 표본”이며 “가격 메커니즘의 자생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8) 시장의 자생적 질서는 시장을 이루는 구성 요소의 상호 의존성에 의해 발생하며, 어떠한 개입도 이 질서를 무너트리기만 한다는 것이 스미스의 입장이다. 노먼에 따르면, 스미스가 자연적 자유라는 구절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정의라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사람이 완전히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고 경쟁할 수 있는 체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 개념의 힘은 사회적 총체성의 한 모델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모델을 대체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베버적인 혹은 포스트-베버적인 전환, 즉 경제에서 정치 혹은 생산에서 권력과 지배로의 전환과는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강력한 것으로 생산에서 유통으로의 이동이다. 제임슨에 따르면, 이는 고리타분한 판타지적 재현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 시효를 다한 것으로 보이는 ‘지배’ 모델을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제임슨은 시장의 유통이 지니는 가능성의 조건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마르크스로 되돌아간다. 제임슨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요강』에서 유통 혹은 시장 모델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인식적으로 “다른 형식의 지도 그리기에 선행하는 것으로, 사회적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재현”을 제공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유통은 “보편적 소외가 보편적 전유로 나타나고, 다시 보편적 전유가 보편적 소외로 나타나는 운동”으로 “주화나 교환가치 같은 것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운동의 전체 그 자체로서도 나타나는 최초의 형식이기도 하다.”9) 제임슨은 마르크스의 “운동”이라는 표현을 주목한다. 제임슨이 보기에 여기에서 운동은 완전히 다르다고 여겨지는 두 개의 개념,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의 “시민사회”는 이 두 개념의 예기치 못한 화해이다. 특히나 제임슨은 홉스가 두려워했던 것이 스미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임을 중요히 여긴다. “자유주의자는 근본적으로 집중된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만심은 홉스적 공포심의 심층적 본성이다. 홉스는 인간 본성과 경쟁에 내재된 폭력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국가권력을 필요로 했지만, 스미스는 시장이라는 경쟁 체제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에 국가는 필요치 않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시장은 자유를 권장하고 영속화하기보다는 그것을 억압하는 양의 탈을 쓴 리바이어던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시장에 개입하는 순간 시장은 엉망이 된다는 것, 즉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언한다. 시장이라는 인간관계적인 메커니즘은 인간의 오만함과 계획을 대체하고 인간의 결정을 전적으로 대신한다. 우리가 할 것은 오직 시장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은 우리를 보살피고 질서를 유지해줄 것이다. 이러한 시장에 대한 신격화가 현재까지도 보편적 흡입력을 갖는지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제임슨은 이를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포로 보는 것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을 믿었던 마지막 세대인 흐루쇼프 세대의 실패 때문으로 보았다. 흐루쇼프의 실패는 1960년대 서구의 무정부주의와 중국에서의 문화혁명을 발생시켰고, 두 운동 이후 소비주의가 편재하는 포스트모던적 현재에 피터 슬로터다이크가 “냉소적 이성”이라 정의한 것의 유행 역시 그 실패로부터 연장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제임슨의 주장이다. 이러한 정치적 실천에 대한 환멸감은 시장 거부의 레토릭이나 보이지 않는 손에게 인간의 자유를 굴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임슨은 이러한 사유와 논증의 결과 역시도 수많은 소비와 거래들이 어떻게 우리 시대에 매력적인 것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제임슨은 전혀 다른 종류의 재현과 은유적으로 연계시키는 데서 파생되는 자유 시장에 대한 1950년대식 재현의 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시장을 가장 현대적이고 범지구적인 의미에서의 미디어 자체와 연계시키는 것”이다.(507) 이는 포스트모던적 방식으로 작동하며, 두 가지 약호 체계를 동일시하지만 양자 사이에 종합이나 새로운 조합 혹은 통합된 언어 같은 것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미디어와 시장의 유비는 이 둘이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과 시장의 개념이 다른 것처럼, 미디어와 미디어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미디어도 무료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소비자는 그 내용과 종류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소비자의 선택은 자유 선택으로 이름 붙여진다. 물리적 시장의 사라짐과 상품이 브랜드나 로고와 동일시되면서, 시장과 미디어 사이에 또 하나의 공생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이 미디어 이미지의 내용이 되었고, 이러한 내용을 통한 상호 침투는 상품 자체의 속성 덕분에 다른 방식으로 강화된다. 

  상품의 위계질서에서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복제 기술은 자본주의 제3단계의 새로운 정보 기술이나 컴퓨터 기술로 집약되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소비를 상정해야 한다. 제임슨은 이것이 바로 소비 과정 자체에 대한 소비로, 상품에 대한 소비를 넘어서 테크놀로지의 보너스와 같은 쾌락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회계급의 종말이라는 보수적인 레토릭이 연관된다. 제임슨은 이런 레토릭의 결론은 언제나 노동자의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최점단 정보화 과정에 대한 찬양은 포스트모더니즘적 희열로 미디어가 시장 일반 혹은 통합된 과정으로서의 시장이라는 환상을 갖게 만든다. 그렇다면 미디어와 시장 사이의 유비에서 세 번째 특징은 형식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지가 상품 사물화의 최종 형식이라는 기 드보르의 이론적 기원은 그 과정이 전도되어 “상업적 텔레비전의 오락성과 내러티브 과정이 이미지가 되는 것이며 이 이미지가 다시 다양한 많은 상품으로 사물화되고 변형된다.”(509) 제임슨은 이러한 과정이 이전의 역사적 경험과는 전혀 다르며, 이는 예전의 공공 영역 자체가 세속화되어온 현상과 연관된다. 제임슨은 이러한 변화를 이론화하려 시도한다. 제임슨이 보기에 이미지 리얼리티의 부상은 허구적(내러티브)인 동시에 사실적(연속극의 인물들이 실제 유명 스타로서 파악된다는 점)이다. 고전 시대의 리얼리티가 낭만주의적 문화 영역과 독립적으로 존속해왔다면, 현재의 리얼리티는 독립된 존재 양식을 상실한 채 부유한다. 또한 오늘날은 문화가 거꾸로 리얼리티에 영향을 미치며, 오히려 비문화적이거나 문화 외적인 형식의 리얼리티를 문제시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지시대상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제임슨은 실용적 수식 어구로 다양한 신자유주의 이론의 철학적 실험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511) 즉, 시장 이론은 체계적인 ‘규제 철폐’라는 근본적 과정에 적용될 수 없다면, 유토피아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자유 시장의 실현 불가능성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해진 상황과 유사하다. 여기서 지시대상체는 이중적으로 동구권 국가가 시장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와 서구권 국가가 사회보장제도를 위한 규제를 철폐하고 순수한 형태의 시장 조건으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제임슨이 이 두 가지 시도들이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시장이 사회주의가 지키고자 해왔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밝힌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인구의 능동적 다수가 참여하는 위대한 집단적 기획”으로 “그 다수가 소속감을 가지고 그들의 에너지에 의해 건설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512) 제임슨은 시장은 사실상 그러한 기획이 절대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의 계획경제는 집단적 기획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글을 마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의 8장인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은 경제의 문화화, 혹은 문화의 경제화라는 주제, 리얼리티와 이데올로기의 문제, 담론 분석에 대한 비판, 경제결정론, 재현의 문제, 그리고 핵심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는 수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책에서 가장 짧은 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글은 그 다른 장들에 비해 쉽게 읽을 수 있는 장이면서도 가장 길을 잃기 쉬우며, 도데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장이기도 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정갈하고 깔끔한 분석은 그의 "A New Reading of Capital"이기 때문에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고 싶다면, "A New Reading of Capital"를 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단순히 비교적 짧고 난삽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로버트 T. 탤리Robert T. Tally jr는 "Fredric Jameson: The Project of Dialectical Criticism"이라는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이 『후기마르크스주의』와 『보이는 것의 날인』의 속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탤리의 표현대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은 두 책부터 이어지는 제임슨의 사유들이 집대성되어 있는 글이다. 또한 제임슨이 이 글에서 논하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이 각각의 여러 편의 글로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제임슨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훨씬 세련된 동시에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인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야기해볼만한 글이다. 


1) 제임슨은 이러한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입장이 밀턴 프리드먼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자유와 평등은 실질적으로 비자유와 불평등으로 판명되지만 이마저도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찬사 받는다.

2) 책의 494페이지, (Gary Becker, The Economic Approch to Human Behavior(Chicago, 1976), p.14.)

3) ibid, 494페이지, (ibid, p.217.)

4) ibid, 495페이지, (ibid, p.141.)

5) 기다 겐 외, 「자유」, 『현상학사전』, 이신철 역, b, 2011. “사르트르가 말하는 <선택>은 실제의 행위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몽상', '원망', '변덕' 등과는 다르다. 실제의 행위가 성공하는가 하지 못하는가는 거기에서 발견되는 즉자의 '저항률' 등의 우연적인 조건에 의존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택>이 반드시 행위의 수행과 결부된 것이라는 점인바, 그 <선택>이 대자의 자유로운 선택인 한에서 자유가 훼손되는 일은 결코 없다. 우리는 호불호와 관계없이 언제나 무언가의 목적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 있다." 자유는 방종과 같은 뜻이 아니라 언제나 책임과 결부되어 있다.”

6) Jean Paul Sartre, “Being and Doing: Freedom”, Being and Nothingness, trans by Hazel E. Barnes, Pocket Books, 1974, p.488.

7) 책의 501페이지, (Norman P. Barry, On Classical Liberalism and Libertarianism, p.30.)

8) 책의 502페이지, (ibid.)

9) 책의 503페이지,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Collected Works, Vol. 28, p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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