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째려보던 사과야 사과한다: 애플파이
엄마가 얼마 전 집에 왔을 때 사과 한 박스를 주고 갔다. 물론 받으면서도 이 말 저 말하며 사과를 거부했었다. 한 박스 대충 눈대중으로만 봐도 사과가 30개는 들어있는 것 같았다. 결혼하고부터는 대량의 식재료에 두려움이 있다. 과연 내가 저걸 언제쯤 먹어치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혹여라도 버리게 되면 약간의 죄책감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2인 가구 일 때 양가에서 받아오는 김치, 식재료 등에 냉장고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둘 다 직장 다니니 겨우 저녁이나 같이 먹는데 엄청난 양의 김치가 줄어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한 신혼 때는 맨날 백반 한상을 차려 먹지는 않는다. 새댁답게 파스타, 스테이크, 세계요리 등을 휘황찬란하게 차려냈었다. 그러니 냉장고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식재료들이 나에게는 참으로 버거웠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딱 거절하고 필요한 정도만 받아왔다. 그런데 사과 한 박스라니. 애가 둘이니 금방 먹을 거라고 당당하게 두고 가셨다.
사과 너는 이제 나의 새로운 미션이다. 처음 1-2주는 매일매일 열심히 아이들 깎아줬는데 그래봐야 줄어들지 않았다. 필자도 애 키우느라 과일까지 여유 있게 앉아서 먹을 정신도 없었기에 사과의 존재를 점점 잊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주 지나고 한편에 큰 자리 차지하는 사과박스를 버리기 위해 사과를 째려보다가 애플파이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사과는 참으로 신기한 과일인 게 몇 주 지났지만 상태가 멀쩡했다. 그리하여 큰 아이 방학 기념 애플파이 베이킹 홈클래스를 열었다.
어릴 때부터 쿠키나 작은 빵 만들기를 자주 했던지라 큰 아이는 처음 만드는 애플파이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보였다. 직접 해보는 것을 좋아하는 독립적인 아이라 저울에 밀가루와 설탕을 직접 계량하고 기계의 힘을 빌려 반죽을 만들었다.
어느새 아이는 자신은 국가대표 제빵사라고 소개하며 반죽의 과정을 혼잣말로 설명하며 즐거워했다. 아이와 꽁냥꽁냥하는 이런 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다.
몇 번을 열심히 누르더니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다고 필자를 불렀다. 아이랑 요리나 제빵을 하면 정서적으로도 좋다고 하지만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일을 할 때 일의 순서 공부의 순서를 잘 알아서 하게 도와준다고 한다.
나 역시 어릴 때 엄마랑 방바닥에서 카스텔라 만든다고 머랭 치던 추억이 생각났다. 집 안에 퍼지는 버터향기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의 따스한 유년기로 남았다. 빵을 만드는 매 순간 그 시절이 기억나는 걸 보니 엄마와의 홈베이킹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결국 애플파이는 완성되었고 그 맛도 향기도 완벽했다. 사과 많이 줬다고 틱틱거렸던 나는 결국 애플파이를 만들며 엄마와의 베이킹추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애물단지 같던 어제의 사과가 오늘의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내 아이도 나중에 커서 엄마와 애플파이 만들던 오늘을 기억할 것이라 믿는다. 아이에게 애플파이의 향과 맛은 엄마와의 특별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의 엄마도 팔 떨어져 나가게 머랭을 치면서 우리들과 좋은 추억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거품기를 휘저었을 것이다. 사과야 째려봐서 사과한다.